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176화 (176/192)

#176

고작 몇 시간 부모님과 함께 보냈을 뿐인데 득용의 얼굴엔 반질반질 윤이 나고 있었다. 멤버들에게 벌어진 일들로 인해 회의실로 향하는 걸음걸이가 무거운 영호와 달리 그저 마냥 기분이 좋아진 철없는 막내는 쉼 없이 형들에게 그 잠깐 사이 뭘 얼마나 먹었는지에 대해 떠들었다. 크게 한우 농가를 하는 득용의 부모님은 아들의 소식을 듣고 정신없이 상경하시는 와중에도 아들 먹일 고기를 바리바리 싸 들고 오셨다. 덕분에 득용은 형들에게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처럼 ‘이따 밤에 숙소 가서 고기 먹어요.’ 하고 촐싹거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촐싹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영호와 함께 들어간 회의실엔 그간 보지 못했던 사람들까지 여럿 앉아 있었는데, 분위기가 퍽 엄숙해 절로 눈치를 보게 되었다. 누가 봐도 말단 직원 같지는 않은 사람들에게 영호가 ‘대표님’하며 인사를 하자 솔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이전에 마주쳤을 땐 실신으로 끝이나 대표의 얼굴이 영 기억이 나질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그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대표가 저렇게 생겼었나? 아예 처음 만나는 사람 같은 생경한 느낌에 솔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솔이 대표를 바라보며 의자를 찾지 못해 주춤거리자 태오가 쓱 그의 의자를 밀어 꺼내 주곤 솔의 손목을 붙잡아 앉혔다. 태오에게 손목이 잡힌 솔은 그제야 대표에게서 시선을 떼며 현실로 돌아왔다. 그렇게 멤버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시작된 회의는 회의라는 말이 무색하게 사실상 통보나 마찬가지였기에 무척이나 간결하게 끝이 났다. 다만 멤버들만이 그 내용을 수긍하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저희가 왜 하차해야 해요?”

고기 먹을 생각에 신이 났던 득용은 어디로 가고, 사나운 인상을 더욱 사납게 만들며 입을 내민 득용이 말했다. 불뚝 모가 나다 못해 찔릴 듯 날카로운 어조와 목소리에 영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영호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도 말만 전달하는 일개 직원일 뿐이었지만, 득용에겐 화와 의문을 풀어낼 대상이 필요했다. 득용의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도 영호에게 떠들어 봤자 감정풀이 밖에 되지 않음을 알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피차 억울하고 화가 나긴 매한가지였다.

“그게… 학폭이나 결격사유가 될 만한 논란이 생기면 자진 하차한다는 계약 조건을 걸고넘어져서.”

영호는 한숨을 푹 내쉬고 어렵사리 회의 내내 반복했던 말을 다시 되풀이했다. 촬영을 시작할 당시 그런 조항이 이 계약서에 있었다고 한다. 몇몇 타사의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이따금 학교 폭력 고발이나 문란한 사생활이나 미숙한 발언 같은 문제로 구설에 오르내리며 프로그램까지 같이 휘청거리는 일이 있자 일말의 손해도 용납하기 싫은 제작사 측이 내건 요구 조건이었다. 반복되는 영호의 말을 듣고 있던 득용이 결국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만큼은 지호도, 가람도, 태오도 그 누구도 득용을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다들 입술을 꾹 깨문 채 분을 삭이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범인도 잡혔고!”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논란으로 프로그램에 손해를 끼치면…"

타격이 없었다곤 말하지 못하겠다. 실제로 솔의 태도나 있지도 않은 과거 논란이 터지며 ‘그런 논란 멤버를 소비하지 않겠다.’라는 물결이 없지는 않았으니까. 논란이 일단락되며 지금은 그런 반응은 사그라들었지만 일단 논란 자체가 문제였다. 진실이 어찌 되었든 해명이 어찌 되었건 간에 원래 결과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게 일반 대중들이었다. ‘아니면 말고’, 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이미 등을 돌리고 떠나간 사람은 아무리 해명이 올라와도 결국 솔을 논란이 있었던 멤버로 기억할 것이다. 아이돌에게도 이런 점은 치명타였지만, 대중의 반응에 예민한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욕 나오네. 애초에 그쪽에서 일부러 솔이 몰아가려고 장작 넣은 거잖아요.”

팔짱을 낀 채 잠잠히 있던 지호도 결국 입을 열었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나겠냐는 말이 있지만 이번 일은 정말 불 한번 지펴 보지 않은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른 일이었다. 프로그램 측 또한 일방적으로 피해만 봤다기엔 애초에 논란이 야기될 환경을 조성한 것도 그들이었다. 악의적인 편집으로 솔이 마치 다른 참가자들을 무시하거나 비웃는 것처럼 만들어 의심을 키워 준 것이 바로 그들이었다.

“본인들이 잘 타라고 장작에 기름까지 가져다 놓고. 불나면 무조건 우리 잘못이라니.”

지호의 말에 가람과 득용, 그리고 영호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영호도 이게 부조리하단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해당 조항이 쓰여 있는 계약서는 존재했고 일개 소속사가 방송사의 행패에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었다. 괜히 눈 밖에 나면 여기 모여 앉은 이들뿐 아니라 다른 소속 연예인들까지 물먹을 수가 있었다. 어찌 되었든 상대는 국내 유일무이한 음악 방송사였다. 애초부터 이런 짓거리로 유명한 놈들이지만 다들 그를 알면서도 뛰어들 수밖에 없는 판인 것이다.

속 시원해질 답이 없어 가라앉은 분위기에 솔이 멤버들의 눈치를 살폈다. 대표가 먼저 회의실을 나서자 그때부터 입을 꾹 다문 태오는 검은 눈동자에서 레이저가 나오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글거렸다. 차라리 원성이라도 터뜨리면 나을 텐데 입술을 꽉 깨물고 무표정하게 있는 모습이 더 살벌했다. 표정 변화는 없어도 그가 화가 났다는 것이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살짝 맞닿은 팔꿈치를 따라 소름이 타고 올라올 정도였다. 결국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생각에 솔은 고개를 숙였다.

후회하지 않고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늘 언제나 인생은 후회투성이였다. 자신이 애초에 핸드폰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빨리, 핸드폰 분실을 알렸더라면. 그도 아니면 방송에서 좀 더 능숙하게 굴었다면 이런 결과가 벌어지지 않았을 거란 생각만 자꾸 들었다. 솔은 고개를 푹 떨구고 웅얼거리듯 사과를 내뱉었다.

“미안해.”

“네 잘못 아니니까 사과하지 마. 성솔.”

“으응….”

“나야말로 미안해. 나 때문에 괜히 솔까지.”

“강가람 너도.”

솔과 가람의 사과를 태오는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제재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태오의 단호한 태도에 솔은 입을 비집고 나오려던 자책이 가득한 말을 다시 주워 담았다.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 내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멤버들을 휘 둘러보니 안심하라는 듯, 태오가 슬쩍 제 팔을 솔에게로 가져다 대었고 그대로 서로의 팔이 맞닿았다. 멤버들이 있는 데서 아무렇지 않게 손을 잡기가 영 신경 쓰여 조심스레 한 행동이었는데 숨을 쉴 때마다 손등과 손등이 스치는 것이 덥석 손을 잡는 것보다 더 간질거렸다. 상황도 잊고 그 작은 접촉에 사람이 풀어지려던 찰나, 태오가 영호에게 물었다.

“그래서 저흰 이대로 ‘네, 알겠습니다.’ 하고 하차하는 건가요?”

무덤덤한 어조와 달리 말에는 뼈가 있었다. 사실 이 상황이 제일 억울할 사람은 이곳에서 가장 길었던 연습생 생활을 버텨 온 태오와 가람이었다. 그 때문인지 영호는 차마 태오를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애먼 곳에 시선을 둔 채 없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일단 이번 경연까진 참여하고 순위에 따라서 자진 하차하는 걸로… 어쨌든 그쪽이 갑이니까.”

“우리가 우승할 수 있었는데!”

득용이 책상을 주먹으로 쾅 두들기며 분통해했다. 맞는 말이었다. 생방송에 들어서면서 인기투표가 탈락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지만 다소 의문스러웠던 평가를 받았던 때를 제외하곤 TEAM ONE은 늘 상위권에 위치했다. 앞일은 모른다지만 사실 이대로 경연을 계속한다면 솔과 멤버들이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였다. 왜 하차가 더욱 아쉽고 분한지 영호도 알고 있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푸념하듯 말을 내뱉었다.

“너희들 말이 다 맞아…. 애초에 참가하는 게 아니었어. 다른 회사들이랑 이미 커넥션이 있었던 거고 그쪽은 그냥 욕받이 역할이 필요했던 거야. 누차 내가 면목이 없다.”

처음부터 그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을 반대했던 영호였다. 까라면 까야 하는 입장이기에 어쩔 수 없이 멤버들을 다독였었지만, 애초부터 글러 먹은 자리였다. 모르긴 몰라도 분명 몇몇 소속사들과 짜고 치는 고스톱일 것이 뻔했다. 그리고 거기에 희생양이 필요했던 거고. 이제 와 후회한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영호도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영호를 묵묵히 바라보던 태오가 누구도 쉬이 꺼내지 못했던 말을 꺼내 들었다.

“그럼 저희 데뷔는요?”

“…….”

순간 회의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애초에 그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된 것도 데뷔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우승은커녕 하차를 하게 된 지금 그렇다면 멤버들의 데뷔는 어떻게 되는지가 제일 중요한 문제였다. 또 무산되는 걸까? 태오는 멤버들을 쭉 훑어보다 솔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번만큼은 틀림없다 확신했는데, 이쯤 되니 온 세상이 그의 데뷔를 뜯어말리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라. 일단 너희한테도 휴식이 필요했던 건 사실이야. 솔이랑 가람이는 이번 일도 있었으니 치료에 좀 더 집중하고, 태오 너도 마음 추스를 시간 좀 가지고.”

한참 만에야 침묵을 깬 영호는 어렵사리 멤버들의 마음을 달랬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영호가 확답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며칠 쉬는 동안 죽어라 실장을 찾아가 징징거리는 거 밖에 답이 없었다. 그리고 사실 핑계로 들고 온 말이지만 실제로 멤버들에게 휴식이 필요하긴 했다. 태오는 상을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병상에 누워 있었다. 많이 좋아졌다곤 하나 솔은 여전히 치료 중이었고 다른 멤버들도 경중이 다를 뿐 엄연히 스토킹 피해자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회사 측에서도 그저 얌전히 방송국의 행패에 당해 줄 생각은 없었다. 어찌 되었든 마지막 방송은 아름답게 좋게, 그들의 하차가 아쉽고 배가 아플 정도로 화려하고 멋지게 마무리해야 했다. 회사는 여러 가지 안타까운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하차를 택하게 되었지만 그 후 멤버들에게 정말 휴식 시간을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멘탈이며 체력이며 모든 면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도록 아이들이 쉬는 동안 회사는 기사를 내보낼 생각이었다. 솔직히 아직 데뷔도 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피해자’나 ‘안타까운 가정사’의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이 좋은 선택지라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태오의 말처럼 넙죽 네, 알겠습니다하고 당해 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회사에서 생각한 대로라면 멤버들은 휴식기를 가지는 사이 이런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들에 노출되어 상처받았지만, 여전히 희망을 잃지 않고 재기를 노리는, 불쌍하고 안타깝지만 응원해 주고 싶은 인물이 될 것이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악의적 편집과 결국 하차를 종용한 제작사가 팬들에게 욕을 먹게 되는 건 덤으로 그거야말로 메인보다 더 맛있는 디저트가 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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