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지호의 집을 떠나 회사에 도착한 세 사람은 웃음기가 싹 가신 영호의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그 표정이 퍽 심각해 마주하는 순간 솔은 혹 가람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철렁 가슴이 내려앉을 뻔했다. 다행히 영호의 뒤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밝아 보이는 가람의 얼굴이 보여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무슨 일 있나요?”
“태오야, 하아… 조금 있다가 다 모이면 회의실에서 얘기해 줄게.”
“회의해요?”
“그럼, 상황이 이 꼴이 되었는데 회의해야지. 정말 면목이 없다. 내가….”
뒤돌아서 가는 영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처음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가야 한다고 말할 때도 무척 어렵게 말을 꺼냈었는데, 지금은 그의 곱절은 더 침울해 보였다.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아도 영호가 저리 침울할 정도로 안 좋은 이야기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솔은 조금 전까지 지호의 집에서 즐거웠던 때를 떠올렸다. 한 번씩 해맑게 웃고 나면 꼭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생기는 것 같아서 이럴 때마다 매번 극과 극을 달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영호가 어떠하든 솔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저들에게 다가오는 가람을 보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가람은 자연스럽게 솔을 끌어안으려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빠르게 걸어왔다. 솔은 제게로 다가온 가람을 끌어안아 주고 토닥여 주며 괜찮냐고 재차 확인해 물었다. 가람은 모든 것이 다 괜찮았고 오히려 오랜만에 후련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며 솔을 포함한 멤버들의 걱정을 덜어 주었다.
가람이 팔을 둘러 등을 토닥여 주자 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전에는 안 좋은 소식과 기분에 하염없이 매몰되었다면 지금은 이렇게 금방 털어 버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영호가 떠나고 아직까지 도착하지 못한 득용을 기다리며 멤버들은 연습실에 모여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뜬금없이 스토커 검거라는 사건이 생기긴 했지만, 얼마 남지 않은 경연을 위해서라도 여전히 하루는 평소대로 돌아가야 했다. 다들 연습 벌레 태오에게 전염이라도 된 것인지 모여 앉아 침묵하는 와중에 지호가 ‘우리 곧 촬영인데…’ 라는 말로 화두를 꺼냈다. 심지어 가람은 어제 병원에서 부모님과 있으면서 쉬기는커녕 편곡을 약간 수정했다는 기함할 소식을 전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마아스>에 대해 언급하며 태오의 눈치를 살폈다. 태오가 다시 제 발로 찾아와 합류하기로 하긴 했으나 아직은 조심스러운 탓이었다. 두 사람의 눈길을 받은 태오는 솔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곡한 거 들어보고 어제 보긴 했지만, 안무부터 따자.”
태오의 말에 세 사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자세를 바로 했다. 가람이 준비해 온 노래를 틀자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전주 앞부분에 누구든 알 법한 클래식 곡을 샘플링하고 믹싱하여 기존에 준비해 두었던 곡으로 이어지게 아주 매끄럽게 다듬었다. 가람의 말대로 큰 변화라기보다는 그저 약간의 수정이었지만 아무래도 고풍스러운 클래식이 들어가서인지 분위기가 이전과는 색달랐다.
그리고 전주 앞부분에 몇 마디가 추가되면서 그 시간만큼 안무에 공백이 생겼다.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는 와중에 무대에 가만히 서 있을 수는 없으니 전주 앞부분에 새로운 안무를 짜 넣어야 했다. 가람이 준비해 온 노래를 듣자마자 솔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아침을 든든하게 챙겨 먹은 덕분일까, 아니면 가람의 편곡이 좋아서일까? 짧은 시간에 머릿속에 수십 개의 동작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태오는 팔짱을 끼고 가람을 바라보았다.
“심신 안정이 필요하단 말 몰라? 병원에서 검사 받고 쉬라 했더니…”
“그러게, 잠을 한숨도 안 잤단 소리네.”
태오의 우려를 들은 지호도 한마디 거들었다. 가람은 딴청을 피우며 조금 긴 제 머리카락을 휘저었다. 솔은 혹시나 가람이 어제의 일로 숙면이 어려웠던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솔의 걱정 어린 시선을 마주한 가람은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얼마 안 걸렸어. 그리고 덕분에 다른 생각 안 하고 오히려 더 푹 잤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의 말 한마디에 안도할 수는 없었으나 어찌 되었든 그 결과물은 무척이나 흡족스러웠다. 솔은 ‘끙’하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을 보고 태오의 옆에 섰다. 팔과 다리를 쭉쭉 늘려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하자 안무 숙지를 이미 끝낸 지호와 가람도 복습할 생각으로 몸을 움직였다.
“새로 추가된 전주는 내가 조금만 더 생각해 볼게…. 일단 안무 숙지가 급하니까 그것부터 하자.”
머리에 떠오른 건 많지만 아직 정리하지 못한 솔이 손을 꿈질거리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번 무대의 안무야 태오가 참여할 상황이 아니었으니 적극적으로 나서서 솔이 이끌어 나갈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엄연히 리더가 돌아왔지 않은가. 솔이 슬쩍 몸을 빼자 가람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 전에 의견이 있는데….”
소심하게 빼꼼 뻗은 자세와 달리 워낙에 길쭉한 체형 탓에 그의 팔이 허공에 우뚝 솟아올랐다. 모두의 시선이 가람에게로 쏠리자 가람은 애초에 구상한 바가 있다는 듯, 여유 있는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새로 추가한 전주 부분 말이야. 솔 솔로가 들어갔으면 해.”
“나?”
갑자기 지목당한 솔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
“응. 발레든 한국 무용이든, 현대 무용이든 뭐든 좋아. 솔 네가 네 마음껏. 솔 혼자 하는 단독 무대.”
“어어…? 그렇지만 우리 팀 무대인데…”
가람은 아주 확신 있는 모습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떻게 추가된 간주 부분을 채워 매끄럽게 동선을 이을까, 머릿속이 복잡했던 솔은 그 대답에 순간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마아스>는 엄연히 그룹 경연 프로그램이었다. 7조, 그러니까 지금은 TEAM ONE이라는 이름으로 5명의 멤버로 이루어진 그룹으로 무대를 준비해야 했다. 예외는 있지만 사실 카메라에 비치는 순간만큼 ‘그룹’에서 예민한 것은 없었다. 그간도 매 무대마다 댄스 브레이크 구간은 있었지만, 가람이 말하는 ‘단독 무대’와는 그 느낌이 달랐다. 가람은 정말 오롯이 솔이 혼자 무대에 등판해 클래식 간주 구간을 꾸며 주길 바랐다.
자신을 괴롭히던 일들이 얼추 정리되자 가람은 밤새 솔을 생각하게 됐다. 그러다 문득 얼마 전까지 만지작거렸던 경연곡이 떠올랐다. 꿈을 향해 열심히 달렸지만 모진 풍파에 잠시 지쳐 뒤를 돌아보는 노래. 하지만 포기하거나 안주하지 않고 잠시 숨을 돌린 후 제 뒤에서 자신을 지켜봐 주는 사람들의 애정을 확인한 사람이 다시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노래였다.
솔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 파일은 반복해서 재생하며 가람은 자신도 모르게 무대에 홀로 선 솔을 그렸다. 생각 없이 재생한 노래를 듣다 보니 솔이 떠올랐다. 솔은 멤버들, 특히나 태오를 위해 이 노래를 택한 듯 했지만 사실 이 노래의 주인공으로는 솔이 더 잘 어울렸다.
그룹에서 인트로를 솔로로 꾸미는 일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요즘엔 컨셉에 따라 오프닝을 한 멤버가 끌어 나가는 방식도 종종 보이곤 했다. 딱히 문제 될 건 없었지만 선곡의 이유가 이유이기도 했고, 솔직히 혼자 무대를 독식한다는 것이 솔은 영 부담스러웠다. 갑자기 훅 몰아친 부담감에 솔은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며 난색을 보였다. 주저하는 솔을 본 태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성…. 솔한테는 미안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새로 동선과 안무를 추가하고 다 같이 움직이기엔 너무 촉박할 거 같아. 나도 좀 버거워.”
다른 멤버들처럼 편하고 다정하게 ‘솔’이라고 부르고 싶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태오는 평소처럼 딱딱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가람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았지만 솔은 순수하게 레드 카펫을 깔아 주면 그 위에서 능수능란하게 자신을 뽐낼 인물이 아니었다.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솔의 등을 한번 툭, 쳐줄 손길이 아직은 필요했다. 그래서 태오는 타당한 이유와 되지도 않는 엄살을 덧붙였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완전 찬성”
태오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엄살처럼 아직 전체 안무를 보지도 못한 태오였지만 사실 지호는 그가 걱정되지 않았다. 어차피 한두 번 보면 안무를 완전히 따 버리는 게 솔과 태오였다. 동작 한번 잊어버리는 일도 없었고, 시간이 촉박하긴 하지만 태오라면 능숙하게 시간에 맞춰 준비를 끝마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머지 멤버는 아니었다.
특히나 가람과 지호는 안무 숙지가 더딘 편이었다. 애초에 지호는 솔로 가수를 지향하며 홀로 무대에 꼿꼿이 서서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었고 가람은 늘 언제나 마지막까지 안무 때문에 고생하는 인물이었다. 태오는 솔의 등을 밀어주려 한 말이겠지만 덕분에 일을 두 배로 하게 된 솔에겐 미안하게도 지호는 내심 안도를 했다.
반박할 구석이 없는 태오의 말에 솔은 잠시 고민하는 듯 머뭇머뭇하더니 득용에게도 물어보고 괜찮다면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사실 득용에게 물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랩 파트때문에 머리를 쥐어뜯던 득용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일이 줄어든 것에 두 팔을 들고 환호할 게 분명했다.
떨떠름한 얼굴로 솔이 고개를 끄덕이곤 태오에게 제가 짠 안무의 포인트를 알려주었다. 혼자 힘으로 오롯이 전곡의 안무를 손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지라 솔은 쑥스러워 쭈뼛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혹 태오의 맘에 차지 않는 부분이 있을까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두 사람은 몰입하기 시작했다.
이미 안무 숙지를 끝내고 몇 번이나 맞춰 보았는데도 가람은 태오와 솔을 따라가기가 벅찼다. 둘만의 세계가 따로 있는 듯, 멜로디를 흥얼거리면서 이따금 ‘딱따따따!’ 같은 귀여움 추임새까지 넣으며 솔이 대충 동작을 해보이면 태오는 귀신같이 제대로 된 동작을 표현해 냈다. 아까 보여줬던 태오의 엄살이 무색하게, 그는 솔이 전체적인 안무를 한번 보여주자 능수능란하게 모든 걸 소화해 냈다. 순서와 디테일에 약간의 혼란이 있었지만, 몇 번 더 반복해서 맞춰 보면 흠잡을 곳이 없을 듯싶었다.
제 빈자리는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알차게 안무를 구성한 솔의 능력에 태오는 내심 뿌듯해했다. 하지만 그런 태오를 보며 솔은 어쩐지 자신이 당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버겁긴 뭐가 버겁단 말인가. 태오의 속도라면 안무를 통째로 뒤바꿔도 문제없을 정도였다. 미묘한 기분이 된 솔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곤 자신의 안무를 제 것으로 만들고 있는 태오를 바라보았다. 그가 부린 엄살에 한마디를 할까 하는 찰나, 연습실 문이 열리고 얼굴이 반질반질해진 득용이 반대로 거무죽죽하게 얼굴이 죽은 영호와 함께 멤버들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