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이 새벽에 이렇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다들 주무시고 계셨을 텐데….”
“아뇨. 솔 오빠가 온다는데 저희가 어떻게 잘 수 있겠어요!”
인사를 할 타이밍도 놓쳐 버린 솔과 태오가 쭈뼛쭈뼛 뒤늦게 인사를 건네자 세 여자는 방앗간 앞에 모여 앉은 참새처럼 쉼 없이 자그마한 몸을 움직이며 짹짹거렸다. 느닷없는 시간과 장소에서 새삼 자신의 인기를 체감하게 된 솔은 얼떨떨했다.
‘좋아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오늘 꽤 많이 만났는데 모두 다 그 느낌이 달랐다. 가람을 향하던 스토커의 감정은 섬찟했고 지금 제 눈앞에서 지호의 여동생들이 보내오는 감정은 웃음이 절로 나올 만큼 즐거웠다. 태오가 전해 준 감정은 솜털처럼 몽글몽글했고.
자신을 보며 세상을 다 가진 듯 눈을 반짝이는 지호를 똑 닮은 동생들이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 솔은 넋을 놓고 그녀들이 무슨 말을 하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낯이 뜨거워질 정도의 주접이 이어졌다. 두 뺨이 발그레해져선 무슨 말을 하든 고개만 끄덕이는 솔이 그녀들에겐 역으로 귀여워 보여 서로가 서로를 귀여워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그냥 놔뒀다간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지호는 제 동생들의 손에서 솔의 손을 가로챘다. 하얗고 긴 손을 더듬는 여동생들의 손길이 지호의 눈엔 추잡스러운 아저씨들 같아 보였다.
“자! 쳐 자!! 꺼져!! 우리 피곤해! 잘 거야!”
지호가 윽박지르며 덩그러니 남은 세 여자의 손바닥을 찰싹 쳐냈다. 순간 세 쌍의 눈이 아주 매섭게 날카로워지며 정색했다. 그러곤 언제 눈을 흘겨 떴냐는 듯 다시 솔과 태오에겐 아주 친절하고 귀엽게 웃어 보이며 그들을 지호의 방으로 안내했다.
“피곤하시죠. 저희 오빤 바닥에서 자면 되니까 오빠 방 쓰세요.”
“저 가증스러운 것들….”
솔과 태오에겐 그저 귀엽고 친절하기만 한 모습이지만, 피를 나눈 혈육의 눈엔 아주 가증스러워 보였다. 지호는 주먹을 꽉 움켜쥐고 바들거렸다. 지호가 숙소 생활을 하며 빠져나간 탓에 현재 지호의 방은 막내인 지아가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도 미리 연락받고 대충 정리해 두었는지 다행히 어느 엄마들이 기겁하며 소리치는 돼지우리 꼴은 간신히 면한 상태였다.
솔과 태오가 손가락만 움직여도 태풍이 몰아친 듯 호들갑을 떨어 대는 셋, 아니 네 여자를 쫓아낸 지호는 이부자리를 정리해 주며 갈아입을 옷까지 내어 주었다.
“침대에서 자.”
“내가 바닥에서 잘게.”
“형이 침대에서 자요.”
반질반질 얼굴에 윤이 나도록 세안을 끝마치고 나온 세 사람은 침대를 두고 이상한 실랑이를 해야 했다.
“나 우리 집에서 맨날 바닥 신세니까 신경 쓰지 말고 너희 편하게 자.”
“우리 마음이 안 편해….”
“알았다. 알았어. 하여간 답답이들.”
제 옷가지를 걸치고 울상을 짓는 솔을 보고 있자니 목이 콱 멘 지호는 가슴을 퍽퍽 치곤 두 고집쟁이 뜻대로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그제야 만족한 듯 태오와 솔은 바닥에 곱게 깔아 둔 이부자리에 몸을 뉘었다. 지호는 속으로 하여간 저 자식들은 잘되라고 좁아터진 방에 가둬 놔도 서로에게 더 편한 자리를 양보하다 결국 아무것도 못 할 자식들이라며, 한숨을 푹 내쉬곤 두 사람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부자리에 몸을 뉠 때만 해도 심장이 벌렁거려 잠들긴 글렀다 싶었는데, 어지간히 다사다난한 하루였던 터라 머리가 땅에 닿자마자 가물가물 잠이 몰려왔다. 이불을 턱 밑까지 바싹 끌어올린 채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솔의 몸도 몰려오는 잠에 점점 자연스레 풀어졌다.
지호의 방은 지호의 말대로 좁았고 지아와 지호의 짐이 한대 뒤엉켜 있었다. 거기다 자그마한 공간에 커다란 두 장정이 누우려니 협소할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 누운 태오와 솔의 사이엔 주먹 하나 들어갈 만큼의 공간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사이에 힘 빠진 솔의 손이 툭, 떨어졌다.
툭, 자신을 두들기는 감촉에 태오는 고개를 돌려 솔을 바라보았다. 아예 등을 돌리고 누운 지호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몸을 크게 움직이면 쌓아 둔 짐이 쓰러지는 작은 방에서 태오는 옴짝달싹하기도 어려웠다. 잠이 들락 말락, 눈꺼풀이 이미 반쯤 덥힌 솔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고작인 태오는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곧 태오의 손가락이 솔의 새끼손가락에 걸렸다.
묵언의 약속이라도 나누듯, 손가락이 얽히자 솔은 무겁던 눈꺼풀을 들어 올려 태오를 바라보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서로의 눈이 선명하게 마주쳤다. 어둠 탓에 쑥스러워 붉게 달아오른 귓바퀴나 뺨까진 보이지 않았지만 가까워진 거리 탓에 오히려 팔랑거리는 속눈썹과 어둠 속에서도 서로의 모습을 담고 반짝이는 눈동자만은 마치 돋보기로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세세히 잘 보였다.
너무 가까운 탓일까. 이렇게 눈을 맞추는 일이 처음도 아닌데 이상한 기분이었다. 무대나 연습실에서 함께 안무를 하며 수없이 잡은 손인데도 아슬아슬하게 걸친 손가락 끝이 오늘따라 저릿한 듯 간지러웠다. 너무 가까워 혹 제 숨 쉬는 소리가 이상하게 들리지는 않을까, 솔은 숨을 쉬는 것마저 조심스러웠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숨을 쉬는 탓에 숨이 찬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숨이 찬 건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서로 눈길을 주고받기를 잠시, 태오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이 아주 살짝, 솔의 이마에 닿았다.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을 넘겨주려는 듯 조심스럽게 이마에서 관자놀이로 태오의 손가락이 흘러내렸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 태오의 눈꺼풀이 검은 눈동자를 한번 감싸 안았다 떠지고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조차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슬로우 모션으로 보이던 그 순간. 별것 아닌 그 모습에 푹 빠져 솔은 넋을 놓고 태오를 바라보았다.
내뱉는 숨의 끝이 떨리고 얼굴을 따라 스치는 손끝의 감각에 가슴이 울렁거리는 순간, 고요하던 지호가 갑자기 몸을 뒤척였다. 순간 바스락거리며 돌아눕는 지호의 움직임에 태오와 솔은 큰 죄를 짓고 벼락을 맞은 것처럼 황급히 돌아누워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부스럭거린다 싶었던 지호의 기척이 사라지자 솔은 흘끔, 한쪽 눈만 떠 지호를 살폈다. 시간이 시간이기도 했고 여러 일이 있었던 터라 지호는 금세 잠이 든 듯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슬쩍 머리도 들어 올려 지호의 앞에서 알짱거려 보였다. 그렇게 완전히 잠이 든 지호를 확인한 후에야 솔은 한숨을 내뱉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솔이 깊은숨을 내뱉자 기다렸다는 듯이 태오도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새끼손가락 걸고 머리카락 좀 쓰다듬으며 눈을 마주쳤을 뿐인데, 대단한 애정 행각이라도 하다 적발당한 것처럼 호들갑을 떤 게 우스웠다. 지호의 눈치를 보는 지금 이 상황이 답답할 만도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솔은 이 상황이 우습고 가슴이 콩닥거리는 게 재미있기도 했다.
조금 전 벼락을 맞은 듯 푸닥거린 자신도 우습고 태오답지 않게 허둥댄 모습도 되새겨 보니 웃겼다. 솔은 결국 참지 못하고 배시시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옆에서 솔이 웃음을 흘리자 태오가 다시금 몸을 돌려 솔을 바라보았다. 왜 웃느냐고 묻는 듯한 태오의 눈길에 솔은 대답 대신 이불 위를 더듬어 조금 전 스치듯 머물렀던 익숙한 온기를 찾았다. 큼직한 태오의 손을 솔이 와락 끌어 잡자 태오의 귓바퀴가 터질 듯이 붉어졌지만,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손을 잡는다는 단순한 행위만으로도 솔은 그저 기뻤다.
지금 이 자리, 이 공간, 이 순간 모든 것이 솔의 마음에 들었다. 푸근함이 느껴지는 오붓한 공간과 마주 잡은 손의 온기, 귓가에 살포시 들리는 지호의 규칙적인 숨소리, 뺨에 닿는 태오의 눈길.
심지어는 천장에 붙은 벽지의 미세한 펄까지도 마음에 쏙 들었다. 단순한 생물체처럼 기분이 좋아진 솔은 태오의 손을 잡은 채 이불속에서 발을 꼼지락거렸다. 발을 좌우로 흔들자 솔의 굳은살 박인 발이 태오의 발등을 툭툭 건드렸다.
아이처럼 사소한 장난을 치는 솔을 태오는 고요히 바라보았다. 가볍게 들뜬 자신과 달리 조용한 태오가 솔은 점점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태오가 본래 가타부타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더 말이 없고 생각이 많아 보였다.
늘 어떤 상황에서든지 앞에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고 항상 제일 먼저 인사하는 태오인데 경찰서에서부터 지금까지 내내 지나치게 조용했다. 솔은 자신이 너무 생각 없이 들뜬 게 아니었나 싶어 꿈질거리던 발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는 태오에게 속삭이며 물었다.
“무슨 생각해?”
“그냥.”
태오의 입에서 ‘그냥’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생경했다. 실실 웃음을 잘만 흘리던 솔의 표정이 태오의 그 상투적인 대답에 딱딱하게 굳자 태오는 말을 이어 붙였다.
“그냥 네 생각.”
“내 생각?”
“지호 형처럼 너를 먼저 감쌌어야 한다는 후회.”
스토커가 솔을 붙잡았던 순간을 태오는 오는 내내 되새기며 후회했다. 태오도 마음만은 범인에게서 솔을 멀찍이 떨어뜨리고 지호가 했던 것보다 더욱 그를 감싸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두 번이나 범인을 놓쳤었고 심지어 그 중 한번은 명확한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사유로 아무런 처벌도 못 한 채 범인을 보내 주어야 했었다.
당시에는 지금 명확하게 범인을 잡아야 솔과 가람이 더한 피해를 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집중했는데, 지호가 솔을 감싸는 걸 본 순간 자신이 지나치게 계산적이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눈앞에서 그런 여자 앞에 솔을 방치했다는 후회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소중한 걸 이미 한번 잃어 봤는데 그런 일을 두 번 겪고 싶지 않았다.
태오가 내내 후회하던 제 감정을 솔에게 털어놓자 솔은 그의 손을 더욱 꽉 잡으며 웃음 지었다.
“그게 태오 너잖아. 네가 사람들을 아끼는 방식이잖아.”
‘좋아한다.’라는 말은 같은데 사람마다 그 표현 방식이 달랐다. 물론 오늘 마주쳤던 그 스토커의 방식과 감정은 한없이 어긋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 자신을 감싼 지호와 무섭지만 꿋꿋하게 마주했던 가람. 형들에게 걱정 끼칠까 봐 상황이 마무리될 때까지 눈물을 꾹꾹 참았던 득용. 그리고 반드시 범인을 잡아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움직인 태오. 거기에 자신을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던 세 자매까지.
누군가를 향한 애정을 표현하는 데에 이토록 많은 표현의 갈림길이 있다는 것이 멋졌다. 그리고 그만큼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솔은 그 생각만으로도 배가 부른 듯했고 가슴이 벅찰 정도로 빠듯해지는 것 같았다.
솔의 말에 태오는 손에 힘을 주었다. 너무 솔의 손을 억세게 잡지 않도록 손가락 사이에 조그마한 공간을 두고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한참 속닥거리던 두 사람이 조용해지자 지호는 침대에 얼굴을 푹 파묻고 혼자만 들릴 작은 소리로 웅얼거렸다.
“바보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