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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를 뽑고 싶어-172화 (172/192)

#172

솔은 여린 생김과 달리 그 감정이 올곧아 지호는 그 감정의 끝에 제 자리가 없다는 것을 빨리 깨달았다. 결국 지호는 형으로서 깔끔하게 물러서기로 했다. 대신 가까이서 상황을 관망하다 가끔은 속앓이하는 두 사람을 골탕 먹이는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괜히 나까지 끼어들어 힘든 애들 더 힘들게 만들지 말자.’

형제가 많은 집엔 알게 모르게 작은 희생들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일방적인 강요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희생 말이었다. 지호는 동생을 위해, 힘든 부모님을 위해.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작은 양보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지호는 저와 눈을 마주치며 웃어 보이는 솔을 보며 같이 웃어 주었다. 시답지 않은 농담 몇 마디를 더 주고받고 나자 태오와 득용이 들어갔던 조사실에서 인기척이 일었다. 그때 열리지 않는 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솔이 혼잣말처럼 웅얼거렸다.

“근데…. 그 칼은 뭐였을까?”

솔의 말에 지호는 스토커가 들고 있던 쇼핑백에서 떨어진 커터칼을 떠올렸다. 어떤 용도였는지 당사자만 알겠지만 여기 다들 무사히 앉아 있다는 게 새삼 다행스러우면서 가슴이 철렁하기도 했다. 지호는 솔의 등을 토닥이며 그를 달랬다.

“생각하지 마. 우리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해도 이상한 거니까 괜히 곱씹지 마. 지금은 그냥 잘 끝났으니까 다들 무사하단 사실에 감사하자.”

말은 그리했지만, 지호도 쉽사리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만약, 혹시라도 그 자리에서 스토커가 멤버들에게 커터칼이라도 휘둘렀다면? 머릿속에서 스토커가 난잡스럽게 쏟아 내었던 사진과 물건들이 불안과 함께 휘감겼다.

이것 봐라.

자신이 아니더라도 세상이 이토록 이들을 괴롭히며 머릿속까지 어지럽게 만들어 주는 데, 힘든 아이들 사이에 자신까지 끼어들어 더 버겁게 만들 필욘 없었다. 여기선 한발 물러서서 아끼는 동생들을 감싸 주고 힘들 때 이야기 한 번쯤은 들어주는 그 위치가 자신에겐 딱이라고 생각하며 지호는 쿵쿵 뛰는 가슴을 달랬다.

제 심장도 불안함을 머금고 뛰는 주제에 솔이 스토커와 대치했던 상황을 곱씹지 않도록 지호는 끊임없이 솔에게 말을 걸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리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만 내뱉었는데도 솔은 세상을 잘 모르는 순진한 천사처럼 방긋 잘도 웃어 주었다.

대체 카메라는 왜 이렇게 이쁘게 잘 웃는 솔의 그런 모습만 잡아냈는지. 그때와 달리 지금의 솔은 너무 이쁘게 웃어 혼자 보기 아쉬울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별것 아닌 소소한 모습이라도 잠시나마 독점할 수 있는 게 어디인가. 굳게 문이 닫힌 방에 들어가 있는 두 사람도 이 정도는 자신에게 양보해 줘야 한다고 지호 홀로 생각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누가 봐도 득용의 부모님으로 보이는 두 분이 경찰서로 뛰어 들어왔다. 모를 수가 없는 게 앞장서서 뛰어 들어온 중년의 남성은 정말이지 득용이 그대로 나이를 먹은 것처럼 똑 닮아 있었다. 성이 난 듯한 인상이었지만 그는 울먹거리는 덩치 큰아들을 보자마자 와락 안아주었다.

솔은 서로를 닮은 사람들이 서로의 안위를 확인하는 모습이 보기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조금 씁쓸했다. 태오도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솔을 살짝 곁눈질 했다. 딱히 표정이 담긴 것도 아니었지만 시선이 오고 가는 그 느낌이 좋았다. 그 시선만으로도 일종의 동질감과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그런 만족감 같은 것이 샘솟았다.

잠시 후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이 꾸질꾸질해진 득용이 부모님과 함께 떠나자 태오가 지친 표정으로 솔과 지호의 옆에 앉아 숨을 돌렸다. 거대한 일을 치렀는데 영 현실감각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지친 기색이 역력한 영호가 누차 솔과 태오의 상태를 확인하고 자기 집에 가도 된다고 제안했다.

사실 어느 쪽의 신세를 지던 미안한 건 매한가지라 태오와 솔이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 지호의 부모님이 도착해 얼떨결에 함께 경찰서를 빠져나오게 되었다. 새벽 늦은 시간에 차를 끌고 데리러 와 주신 지호의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차에 오르니 어색함이 감돌았다. 하지만 그 어색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게 다, 무슨 일이니.”

“그러니까.”

“새벽에 기절초풍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이번엔 확실히 잡은 거지?”

“응.”

“아이고, 다행이다. 다들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래.”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지호의 어머니는 지호의 복사판처럼 똑같은 구석이 많았다. 평소 지호가 숙소에서 보여주는 모습과도 퍽 닮은 부분이 많았는데, 웃긴 건 숙소에선 늘 지호가 말하고 솔이나 태오, 가람이 툭툭 단답형으로 대답했다면 차 안에선 지호가 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솔과 태오는 섣불리 대답하기가 어려워 그저 멀뚱히 앉아 있고 정작 늘 말이 긴 지호는 귀찮다는 듯이 설렁설렁 대충 대답했다. 솔은 늘 자신을 엄마처럼 살뜰하게 챙겨 주는 큰형이 제 엄마에게 툭툭대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뭔가 평소랑 달라 보여서.”

저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눈치챈 지호가 어둠 속에서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그에 솔은 수줍게 살포시 웃으며 어깨를 들썩여 보였다. 솔의 반응에 지호가 뻔뻔스레 머리를 쓸어 넘기며 눈썹을 씰룩거렸다.

“왜? 더 잘생겨 보여?”

조금 전 엄마랑 툭툭 대화하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모르게, 평소의 능글맞은 지호로 돌아와 으스대며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이번에 돌아온 건 솔의 긍정적인 대답이 아니라 지호와 똑 닮은 말투의 핀잔이었다.

“지호야. 너 지금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거야.”

“아, 엄마!”

“아유, 내 아들이 제일 이뻐 보여야 하는데 워낙 다들 인물들이 훤칠해서 지호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더라고.”

지호가 꼭 득용처럼 굴었다. 그 모습에 솔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장정 세 사람이 뒷좌석에 구겨져 있다 보니 고개를 살짝 돌리는 것만으로도 태오의 어깨에 머리가 닿았다. 확 가까워진 거리에 솔이 얼굴을 붉히며 반대편으로 몸을 기울이려던 찰나, 태오가 솔 쪽으로 몸을 내밀며 지호의 부모님께 인사를 했다. 덕분에 솔은 태오의 품에 안길랑 말랑, 아슬아슬함을 느껴야 했다.

“감사합니다. 민폐 끼쳐서 죄송해요.”

“민폐라니, 365일 우리 집에서 살아도 돼.”

지호의 어머니는 태오의 인사에 활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고는 운전 중인 아버님께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아들을 하나 더 낳을 걸 그랬어, 여보.”

“갑자기?”

“두 번째 만드는 건 좀 더 잘 만들지 않았을까? 이름 하여 김숙현 걸작선. 그리고 첫 번째 작품도 나쁘지 않지만 두 번째는 엄마가 다빈치보다 더한 조각상을 만들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영문 모를 말에 지호가 얼굴을 찌푸리며 반문하자 지호의 어머니는 유쾌하게 까르르 웃으며 대답했다. 그 대답에 지호는 얼굴을 더욱 찡그려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김 여사님 핸드폰 켜고 가족사진 보세요. 만들어 놓은 자식들 다 그 나물에 그 밥이거든요. 타고난 유전자에서 그리 크게 달라질 순 없는 법이야.”

지호가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끼고 핀잔을 주었다. 그렇게 잠시 자신의 어머니를 흘겨보던 그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태오와 솔을 바라보았다. 솔은 이미 조금 전부터 지호와 그의 어머니의 대화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웃음을 참는 중이었다.

조금 전 지호의 타박에 정말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신 지호의 어머니가 ‘아이, 참! 다 똑같이 생겼네.’ 하고 입을 삐죽이는 것이 진짜 화룡점정이었다. 그리고 그 가족사진 속 인물들을 실제로 보게 된 솔은 다시 한번 웃음을 참지 못하고 경건히 고개 숙일 수밖에 없었다.

***

“와. 진짜 아이돌은 이렇게 생겼구나.”

“저희 집에 어서 오세요.”

솔과 태오의 앞에는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지호1, 모자를 쓴 지호2, 안경을 쓴 지호3이 서 있었다. 도지호의 어머니, 김숙현 여사님의 나지막했던 혼잣말처럼 정말 다 똑같이 생겨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닮은 형제들이야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지만 정말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신기할 정도로 똑 닮아서 시선을 쉬이 뗄 수가 없었다.

야심한 시각이니만큼 최대한 조용히 들어간다고 도둑고양이처럼 살금거렸는데 정작 지호의 가족들은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고는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어지는 감탄사에 지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긴 머리를 질끈 묶은 여동생에게 물었다.

“…너넨 왜 안 자?”

“지금 자게 생겼어?”

“도지은 너는 왜 모자 쓰고 있냐?”

한창 잘 시간인 잠 많은 동생이 번듯하게 일어나 있는 걸로도 모자라 머리를 안 감았다고 집에서 모자를 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평소엔 집에만 들어오면 구멍이 뚫리고 목이 늘어진 티셔츠에 캐릭터가 그려진 수면 잠옷 바지 차림이 일상인데 지금은 외출해도 손색없을 차림을 하고 있었다. 눈치 없는 지호의 물음에 모자를 쓴 지은이 짜증을 확 냈다.

“시간이 모자라서 머리를 못 감았어!”

“아니, 이 시간에 그러니까 왜 안 자고 머리를 감냐고!!”

차례대로 도지영, 지은, 지아는 타박을 주는 지호를 거들떠보지 않고 간증이라도 하듯 두 손을 꼭 모은 채 솔과 태오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솔에게 손을 살포시 내밀었다. 솔은 얼떨결에 ‘손!’ 하는 명령을 들은 강아지처럼 세 사람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려 두었다. 지호가 평소에 종종 하던 행동이었다. 지호의 세 동생은 그런 솔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으며 열렬한 고백을 늘어놓았다.

“저 진짜 팬이에요. 마아스에서 오빠 제일 좋아해요. 인기투표 맨날 솔 오빠예요.”

“저도요. 태오 오빠도 좋아하는데…. 투표는 솔이 오빠 했어요.”

“도지호가 인생에 도움이 되는 날이 있다니. 대박이다. 진짜… 이 새벽에 이런 누추한 곳까지….”

피는 못 속인다고 보는 눈들도 취향도 정말이지 한결같다고 지호는 생각했다. 빛나는 눈으로 태오를 보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세 동생 모두 태오보다 그 옆에 있는 솔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평소 ‘오빠’라는 소리에 학을 떼는 것들이 처음 만난 솔과 태오에게 ‘오빠’ 소리가 잘도 넙죽넙죽 흘러나왔다.

지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심드렁하게 제 동생들의 바라보는 사이 솔은 세 사람에게 둘러싸여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지호의 분신 세 명의 위력은 그만큼 굉장했다. 지금도 듣기 민망할 정도의 주접을 거리낌 없이 속사포처럼 솔의 앞에 늘어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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