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여자의 물음에 가람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모르겠어요. 정말 이해가 안 돼요…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가람의 대답에 스토커는 주먹을 움켜쥐고 파들거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좋은 상황 같아 보이지 않았다. 불안해진 솔은 눈치를 살피며 슬며시 가람의 손을 붙잡으려 팔을 뻗었다. 하지만 솔의 손은 허공을 헛손질하다 가람의 팔꿈치 언저리를 스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좋아하면 그 사람이 행복하길 바라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작은 터치에 가람이 조그마한 용기를 얻었는지 스토커에게 질문을 이어 나갔다. 사실 여자의 행동이 처음부터 이렇게 뒤틀렸던 건 아니었다. 가람의 머릿속엔 자신을 집요하게 괴롭히던 그녀에 대한 기억도 있지만, 힘들고 외롭던 시절 자신을 응원하던 여자의 모습도 함께 존재했다. 그래서 가람은 더더욱 그녀가 이해되지 않았다.
가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다면 본인이 아프더라도 얼마든지 그의 행복을 응원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우는 얼굴을 하는 것보단 웃는 얼굴을 하는 것이 좋았다. 정말 좋아한다면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적어도 이 자리에 서 있는 강가람이란 사람은 그랬다. 하지만 가람의 물음에 돌아온 여자의 목소리는 격양되어 있었고 금방이라도 날아들 송곳처럼 뾰족했다.
“너 때문이잖아. 내가 이러는 거 다!! 너 때문이라고. 이게 다!!! 네가 자초한 거야!!”
“이게 나 때문이라고요?”
“이봐요!!”
여자의 외침에 가람을 포함한 모두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혹 범인을 자극하는 일이 될까 주춤거리며 상황을 살피고 있던 지호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이 더는 들어주기 힘들 정도로 역겹게만 느껴졌다.
피해자는 강가람과 성솔, 범인은 지금 말도 안 되는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가람 외에는 누구와도 대화할 생각 따윈 없는지, 큰소리치는 지호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고는 제 할 말만을 꿋꿋하게 이어 나갔다.
“너도 나 좋아한다며, 우리 잘 사귀고 있었잖아!!! 네가 아무것도 아닐 때부터!! 내가…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그런데 니가 어떻게 날 이렇게 무시할 수 있어?!”
귀가 아플 정도로 소리를 지르던 여자가 솔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멤버들은 니트릴 장갑을 낀 스토커의 손끝이 솔을 가리키는 것조차 싫어 얼굴을 구겼다.
“내가 뭐라고 했어? 계속 그런 식으로 나 무시하면 네가 아니라 쟤를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내가 경고했지?”
솔은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터져 버린 댐처럼 범인이 마구잡이로 고함치며 토해 낸 말들을 듣기가 힘들었다. 쉼 없이 토해 내는 여자의 말에 솔은 머리가 어질할 지경이었다. 그녀의 주장은 이랬다. 가람과 자신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그가 유명해지면서 변했다. 자신이 가람을 얼마나 사랑했는데 어떻게 그런 자길 버릴 수가 있냐, 다시 바닥을 치면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기억해 내고 돌아올 거다, 등등 현재 그녀의 발언은 제대로 된 사고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계속 그 뒤틀린 감정으로 가득한 고함을 듣다 보니 속이 뒤엉킨 솔이 하얗게 질려 주춤거리자 여자의 시선이 솔을 훑었다. 솔은 이제 증거고 뭐고 어서 빨리 골목 어귀에 경찰차나 영호의 벤이 보였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더 이상 저 사람과 한자리에 서 있고 싶지도 않았다. 가람은 물론이거니와 멤버 모두와도 떨어뜨리고 오늘 저 사람이 서 있고 만졌을 숙소 현관문과 복도까지, 할 수 있다면 공기까지 깡그리 지워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귀긴 뭘 사귀어요. 그런 적 없잖아요!”
“내가 지금 거짓말한다는 거야?!? 가람아, 자기야, 여보! 자꾸 그렇게 나오면 나도 다 방법이 있어.”
솔이 저를 피해 고개를 돌리는 것이 무언가 범인의 트리거를 건드린 것일까, 아니면 가람의 말 때문일까. 갑자기 그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자의 별것 아닌 작은 행동에도 멤버들은 한껏 긴장을 한 채 움찔거렸다. 솔은 스토커의 시선이 자신에게 똑바로 꽂히자 희번덕거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 모든 상황이 그저 빨리 그리고 무사히 끝나길 바라는 것밖에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시선이란 것에 물리력이 있다면 솔의 얼굴엔 커다란 구멍이 뚫렸을지도 몰랐다. 여자는 그 정도로 맹렬히, 빤히 솔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불편해진 솔이 지호나 가람의 뒤로 자리를 옮기려 하자 그녀의 머리가 기이하게 돌아가며 솔에게 따라붙었다. 순간 덥석 스토커의 손이 자신을 피하는 솔의 손목을 붙잡았다. 여자는 솔이 피하지 못하게 그를 붙잡곤 다른 손에 들린 쇼핑백을 흔들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쇼핑백 안에서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디가? 너 주려고 선물 가져왔어.”
니트릴 장갑의 고무 감촉이 소름이 끼쳤다. 대체 왜 장갑을 끼고 온 것일까. 갑자기 여자에게 붙잡혀 너무도 놀란 솔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태오가 놀라 몸을 움직였지만 바로 옆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던 지호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지호는 여자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한번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일까? 스토커는 지호에게 손이 잡히자마자 빽 비명을 질렀다.
새벽 어두운 동네 골목길에 여성의 비명이 울려 퍼지자 캄캄했던 집들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높은음의 비명에도 지호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도지호는 득용처럼 무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더욱 힘을 주어 그녀를 솔에게 떼어 내고 있는 힘껏 밀쳐 버렸다. 지금 지호에겐 팬을 폭행했다는 구설수나 저 미친 여자의 고소, 혹은 지호 본인이 다치는 일보다 솔을 보호하려는 마음이 더 컸다. 스토커를 패대기치는 지호의 손길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저보다 큰 체구의 남성이 휘두른 힘에 중심을 잃은 여자의 몸뚱이가 바닥에 철퍼덕 널브러졌다.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도 함께 널브러지며 그 내용물이 새카만 아스팔트 바닥 위로 쏟아졌다. 어지럽게 쏟아진 여자의 물건들을 보며 멤버들 모두 얼굴을 굳혔다. 일부러 인화한 듯한 그 사진엔 활동할 때의 솔이 아닌 그저 편안하게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솔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연습실에 오갈 때의 솔의 모습을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도촬한 듯한 사진. 심지어 솔이 병원에 들어가는 사진도 들어 있었다. 가람에서 솔에게로 집착이 옮겨간 것인가 의심될 만한 사진들이었다. 하지만 진가는 그 사진들 아래에 숨어 있었다.
지호는 툭, 운동화 끝으로 그녀가 쏟아 낸 물건들을 흐트러뜨렸다. 수없이 많은 사진 더미 아래에는 본인의 것으로 보이는 옷가지와 속옷, 심지어는 커다란 커터칼과 무엇인지 모를 음식도 들어 있었다. 순수한 팬심으로 멤버에게 주려 싸 온 도시락이라고 보기엔 지호의 발에 밟힌 사진들이 바닥에 쓰러진 여자를 멀리하라 경고를 아주 쩌렁쩌렁하게 보내고 있었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았다면 가람과 여자가 정말로 사귀었다고 착각할 만한 사진들이 그곳에 한가득 널려 있었다.
마치 데이트하며 핸드폰으로 찍은 듯한 셀카 사진들. 어떻게 이리 교묘하게 합성한 건지 놀라울 지경이었다. 심지어는 보기 민망할 정도의 노출이 있는 사진도 있었다. 스스로 이런 사진을 찍고 그 위에 가람의 얼굴을 합성했을 모습을 생각하니 지호는 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다. 솔을 향한 괴롭힘은 그저 가람의 관심을 끌려고, 제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가람과의 연애가 끝이 났음에 대한 보복 같은 것이었다. 지호는 벌레라도 만진 듯 질색하며 손을 제 옷에 벅벅 문지르곤 여전히 얼어 있는 솔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솔아, 쳐다도 보지 마.”
이미 못 볼 꼴을 다 봐 버렸지만, 지호는 솔을 끌어안아 숨기듯 제 품에 품었다. 여자는 제 뜻대로 풀리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바닥에 주저앉아 정말 미친 사람처럼 악을 쓰기 시작했다. 새벽이란 시간에 대한 생각 없이 온 힘을 다해 내지르는 여자의 비명에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씩 깨어나 창문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난처해지려는 순간, 골목 안을 자동차 라이트 불빛이 환하게 밝혔다.
“얘들아!”
탁, 탁 자동차 문을 여닫는 소리와 함께, 환한 라이트 불빛을 뚫고 영호와 그렇게 기다리던 경찰의 모습이 보였다. 드디어 나타난 경찰의 모습에 안도한 멤버들이 탄성 섞인 숨을 내뱉자, 바닥에 앉아 비명을 지르던 여자가 벌떡 일어나 반대편으로 달려 나갔다. 이런 상황을 진작부터 예상하고 길목을 막고 있던 태오가 재빨리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중심을 잃은 스토커가 넘어지자 경찰관들이 재빨리 다가와 그녀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번쩍이는 경광등 불빛에 잠을 방해받은 주민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와 무슨 일인지 살폈다. 경찰은 스토커를 체포해 경찰차에 태우곤 바닥에 흐트러진 스토킹의 증거들을 하나씩 수습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허겁지겁 운전해 왔는지, 영호는 파자마 차림으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얘들아 괜찮니? 다친 데는 없어? 병원… 병원 가야…!”
“놀라긴 했는데 저희 괜찮아요. 영호 형. 그보단 경찰서 가는 게 먼저일 것 같아요.”
사색이 된 채로 땀을 뻘뻘 흘리는 영호를 보며 태오가 말했다. 파리하게 질린 가람과 솔을 일단 빠지게 하고 싶었지만, 태오의 생각을 눈치챈 가람이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입술을 꽉 깨문 가람은 이번에는 어떻게 해서든 저 스토커를 꼭 처벌받게 할 의지로 가득해 보였다.
놀랐던 솔도 지호가 등을 어르고 토닥여 주자 진정했는지, 영호에게 괜찮다는 말을 건넸다. 그러자 핸드폰을 든 채로 굳어 있었던 득용이 울음을 터뜨렸다. 커다란 덩치가 한껏 구겨져 영호를 보며 무어라 연신 하소연했지만, 울음에 발음이 뭉개져 하나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흐어엉…어엉. 여엉호혀어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