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지금 저기 있는 사람이 저를 괴롭혔던 그 사람이 맞는지, 제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옮겼던 가람은 자신을 붙잡는 억센 손길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곧 저를 붙잡은 손의 주인을 확인하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든 가람은 제 팔을 붙잡은 태오와 핸드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솔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깊이 잠든 솔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다음엔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던 그날의 기억이 머릿속에 되새김질 되었다. 하지만 그 기억과 함께 캄캄한 숙소 안 철컥이며 끝없이 반복되던 문소리도 함께 되살아났다.
두려움을 꾹 참고 움직이던 가람을 태오가 붙잡자, 가람의 두 발은 말뚝이 박힌 듯 그 자리에 멈춰 버렸다. 가람은 순간 태오가 자신을 붙잡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고 말았다. 단순한 숨이 아니라 입을 통해 영혼과 공포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긴 한숨을 내뱉고 나자 머리털이 쭈뼛 서던 감각들도 잠잠해졌다. 그리고 자괴감이 찾아왔다. 가람은 경찰과 통화하고 있는 솔을 곁눈질했다.
태오의 어깨 너머에 숨어 핸드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솔의 얼굴에는 걱정과 다급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가람의 시선을 느꼈는지, 통화를 이어가며 솔이 가람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가람을 향한 걱정이 가득했고 조금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가람은 그 순간 왜 태오는 되고 자신은 안 되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일순 밀려오는 허탈함에 태오를 향한 일말의 질투마저 사라졌다.
“영호 형! 빨리요.”
매니저인 영호도 전화를 받았는지,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득용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람은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몸에서 힘이 쭉 빠지자 순간 몸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훅 쪼그라들었다.
“강가람, 괜찮아?”
태오가 가람의 어깨를 잡으며 물었다. 가람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가람에게로 향하는 그때, 솔은 다시 전등불이 꺼진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복도에 난 창문, 캄캄한 그 자리에 무언가가 어른거리듯 보였다. 금방 출동하겠다는 경찰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은 솔은 눈살을 찌푸리며 태오를 피해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다.
“가람 형.”
“괜찮아.”
하얗게 질린 가람은 두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이를 악물었다. 그가 허리를 숙이자 깜짝 놀란 득용이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부축했지만, 가람은 그를 밀어냈다.
두 번이나 솔의 앞에서 겁쟁이가 될 수는 없었다. 가람이 숨을 고르고 다시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자 태오가 격려하듯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뒤에서 일어난 소란에 잠시 한눈을 팔았던 솔은 다시금 시선을 복도로 옮겼다. 분명 뭔가가 있었던 것 같았는데 불이 환하게 켜진 복도에는 아무런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센서 등이 고장 난 것은 아닐까? 별거 아닌 오작동인데 자신들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솔은 미간을 찌푸리고 아늑해야 할 숙소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다시금 불이 꺼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불현듯 동네 전체가 조용한 느낌이라 솔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솔은 이젠 불이 꺼진 복도의 창문에서 쉽사리 시선을 떼지 못했다.
지난번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사실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맞았다.
스토커라는 존재가 이런 거구나. 솔은 새삼 느껴지는 두려움에 흘긋, 가람을 돌아보았다. 괜찮다고 말하지만, 넋이 반쯤 나가 보이는 가람을 여전히 태오가 꽉 붙잡고 있었다. 태오가 손을 놓으면 가람은 그대로 어디론가 달려가 버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게 이 자리를 떠나 도망치는 것이든 저 캄캄한 복도에 숨죽이고서 있을 스토커에게든.
지금 솔에게 상대방의 생김새나 성별, 흉기 같은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냥 누군가 낯선 이가 어둠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고, 나의 보금자리에 함부로 들어오려 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 더 무서웠고. 상대방은 나에 대해 잘 알지만 나는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무지에서 기인한 두려움과, 솔직히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나에게 저런 광적인 집착과 감정을 쏟을 수 있다는 것이 솔에겐 더 충격적인 일이었다.
“지호 형 어디 가요!”
“다들 여기 가만히 있어!”
“아니, 형이나 가만히 있어요!”
득용과 지호의 목소리에 솔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성큼 이동한 지호가 공동 현관문을 붙잡고 서 있었고 그런 지호를 득용이 붙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같이 경찰서를 끌려가든, 기사가 뜨던 잡아야겠어.”
그렇게 말하는 지호의 표정은 화가 가득했다. 지난번에 확실하게 잡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두 번으로도 모자라 세 번이나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단순히 센서 등의 고장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불이 켜질 때 언뜻언뜻 보이는 그림자가 단순한 고장이 아님을 그에게 암시해 주고 있었다.
지호는 득용을 비롯한 가람과 솔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지금 이 상황이 가장 공포스러울 가람은 말할 것도 없었고 솔도 정신이 반쯤 나가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숙소는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오롯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 아늑하고 그 무엇보다 편안해야 할 보금자리를 공격받는 느낌은 생각보다 더 더러웠다. 그리고 이런 짓거리를 하는 상대에 대한 분노가 거대했다.
이미 영호와 솔을 통해 가람의 스토커와 솔을 비방하는 글을 올린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전해 들은 지호와 멤버들이었다.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가람으로도 모자라 솔까지 괴롭히는지 지호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무 화가 나 직접 대응하지 말라던 경찰과 회사의 말 따위 무시하고 당장이라도 뛰어 올라가 그 얼굴을 한 대 갈겨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벌벌 떠는 솔과 가람을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자니 본인의 피가 다 마르는 것 같았다.
“지호 형. 괜히 사고 나요. 영호 형이나 경찰 오면 같이 올라가요.”
침착한 목소리의 태오가 지호를 달랬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도 지호처럼 화가 치밀어 오르긴 마찬가지인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눈은 부리부리하게 치켜뜨고 있었다.
“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던 솔이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지호는 솔이 낸 소리에 경기하듯 크게 반응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꼭 제 새끼를 과보호하는 강아지 같았다.
“왜, 솔아.”
“내려온다.”
“뭐?”
솔의 말에 모두가 공동 현관을 바라보았다. 계단을 따라 난 작은 창문이 순서대로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솔은 차근차근 켜지는 불빛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이내 그의 긴 목이 더 이상 피로하지 않을 만큼 수평이 맞춰지자 이 사단을 만들어 낸 존재의 형태가 온전히 드러났다. 불이 켜진 계단에 누가 봐도 사람인 것이 오도카니 서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 이 한밤중에 검은색 후드티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검은색 마스크까지 한 사람의 손에는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그렇게 멤버들과 공동 현관 문 하나를 두고 마주 선 스토커는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다섯 남자를 쭉 훑어보았다.
스토커와 눈이 마주친 순간 솔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제 가슴께까지 밖에 오지 않는 자그마한 체구인데 살짝 마주친 눈동자가 너무도 꺼림칙해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설마 당당하게 제 발로 걸어 내려올 줄은 몰랐던 터라 공동 현관 바로 앞에 서 있던 지호와 득용도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멤버들이 그저 바라만 보고 서 있자 스토커는 마치 건물에 사는 주민처럼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걸어 나왔다. 지호와 득용에겐 관심도 없다는 듯이 자연스레 스쳐 지나치는 그녀를 가람이 불러 세웠다.
“진짜…. 진짜 왜 그러는 거예요? 왜 괴롭히는 거예요?”
“…네?”
가람의 목소리가 쥐어짜는 것처럼 들렸다. 힘겹게 내뱉은 그의 말에 돌아온 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한 반문이었다.
“무슨 소리세요?”
“…와.”
도리어 무슨 말이냐 묻는 그녀의 태도에 지호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경찰과 영호가 도착하는 내로 CCTV를 돌려보면 확실해지겠지만 지금 당장은 그녀가 스토커라는 증거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익히 알고 있는 가람이었지만 상대방은 지금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한 채였다. 뚜렷한 증거도 없이 섣불리 행동했다간 도리어 멤버들이 곤경에 처할 수도 있었다.
태오가 슬쩍 움직여 스토커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멤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경찰이 도착하기 전까지 그녀가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물리력 없이 붙잡는 것밖에 없었다. 가람은 스토커를 똑바로 쳐다도 보지 못할 만큼 두려워하면서도 계속해서 스토커에게 말을 걸었다. 덩달아 솔까지 엮여 버렸지만 처음 시작은 가람의 팬이었던 사람이었다. 지금도 가람이 말을 걸자 걸음을 멈추고 다음 말을 기다리듯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가람은 그녀의 걸음을 붙잡고 관심을 끌기 위해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숙소 찾아와서 문 열려고 하고 저한테 문자랑 전화하고…. 솔이 비방하는 글 올린 것도 다 그쪽이잖아요.”
“무슨 소리신지 모르겠어요.”
“그쪽 맞잖아요. 진짜 왜…. 왜 그러시는 거예요.”
혼자였다면 감히 말을 붙이기는커녕 쳐다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스토커와 피해자는 대화로써 해결이 되지 않는다. 애초에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한 상대였다면 이 정도의 병적인 집착을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대화가 스토커의 병적 망상을 이어갈 떡밥이 되기 때문에 만나서도 대화를 해서도 안 됐다. 하지만 가람은 오히려 더 말을 걸며 침을 크게 꼴깍 삼켰다.
“처음에 제 팬이라고, 저 응원한다고 하셨잖아요. 저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왜,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거예요?”
오늘 여기서 끝내야 했다. 눈앞의 스토커보다도 그로 인해 솔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더 끔찍했다. 가람이 스토커에게 계속해서 말을 붙이며 관심을 끌자 태오가 스토커가 도망갈 수 있는 방향을 틀어막으며 지호에게 눈짓했다. 태오가 보내는 신호를 파악한 지호는 혹여나 그녀가 가람이나 솔에게 달려들지는 않을까 조심스럽게 두 사람 사이로 다가갔다.
“솔이에 대한 글 다 거짓이었다고 밝히고 사과해 주세요. 그리고 다시는 저희 숙소에 찾아오지도 말고 저한테 문자로 DM도 보내지 마세요. 제발. 제발요!”
“…….”
마스크와 모자 사이 까맣게 반들거리던 눈동자가 일순 섬뜩한 기운을 풍겼다. 다 똑같은 사람의 눈일 뿐인데 마주치는 순간 상대해선 안 되겠다는 느낌이 머리를 강타했다. 그때까지 모른 척 시치미를 떼던 여자의 가면이 벗겨졌다. 그녀는 가람의 말에 몹시 기분이 상한 듯 화가 난 모습으로 파들거리며 비웃음 섞인 질문을 던졌다.
“내가 왜 그러는지 정말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