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166화 (166/192)

#166

가람은 솔에게 쉬이 잘될 거라고 태오가 돌아올 거라고 대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어젯밤 마지막으로 본 태오는 무척이나 확고해 보였다. 그를 설득하려 몇 마디 주고받다 결국 모진 말을 쏘아 내고 말았다. 입 밖으로 내뱉고 바로 후회했지만, 일종의 분풀이였다.

“지호 형도 마음에 들어 할 거야. 득용이야 말할 것도 없고.”

잠시 뜸을 들이긴 했지만, 가람은 모범적인 답안을 도출해 냈다. 꿈도, 솔도 늘 쉽게 손에 닿을 수 없는 것을 탐내는 게 어쩌면 제 운명인 듯싶었다. 그 결과를 알면서도 어떻게 마음을, 곁을 내주지 않을 수가 있을까. 가람은 솔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마주하며 혼잣말하듯 나지막이 말했다.

“솔 널 보니까 알겠어. 다 잘될 거야.”

두꺼운 흙을 뚫고 마침내 피어오른 솔을 보니 그냥 그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태오를 질투하는 이 마음도, 지금은 솔을 보며 그저 씁쓸하기만 한 마음도 결국엔 사그라들고 모든 일의 끝엔 다 같이 웃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호 형 오기 전에 우리 둘이 더 다듬어 두자.”

“응. 그러자.”

가람의 말에 솔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미 반이나 흘러가 버린 시간. 다음 방송까지 얼마 남지 않았고 태오가 끝내 연습실로 돌아올지, 솔을 둘러싼 말들이 사그라질지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이상하리만치 믿음이 생겼다. 지금의 솔이라면 뭐든지 다 잘 해낼 것 같았다.

솔이 갈래만 잡힌 안무를 보여 주며 가람의 의견을 구했다. 지호와 득용이 오기까지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의견을 주고받았다. 연습실에서 대화를 주고받는 내내 가람은 지금의 이 자리로도 만족하기로 스스로를 다스렸다. 제 친구를 향한 마음으로 반짝이는 솔을 가장 가까이서, 그가 돌아보면 닿을 위치에서 지켜보는 자리로 만족하기로.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자 일이 한결 쉬워졌다.

솔과 가람이 윤곽을 거의 다 잡아 갈 때쯤, 득용과 지호가 연습실에 얼굴을 비쳤다. 태오의 부재로 책임감을 느끼는지, 지호의 얼굴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연습실에서 밤을 꼴딱 새운 솔과 알리지도 않고 뛰쳐나온 가람에게 지호가 꼭 엄마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큰형의 잔소리를 듣기 싫은 막내처럼, 솔은 그의 앞에 동영상을 들이밀고 가람은 다짜고짜 미션을 준비하자는 말을 던져 지호의 입을 막았다.

아까 가람에게 보여 줬을 때보다 훨씬 매끄러워진 진행과 가람이 편곡을 어떻게 할 것인지 방향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자 두 사람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나섰다. 틀은 솔이 모두 잡아 두어 자신은 숟가락만 얹었다고 가람이 말하자, 지호와 득용이 솔에게 박수를 보냈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시간은 촉박했고 다섯 명이 온전히 무대에 오를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지만 어떤 무대가 될지 한눈에 그려졌다.

모두가 만장일치로 동의하자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화려한 무대 의상을 준비할 시간도 없었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 아쉬움이 남지 않았다. 준비 과정이 마냥 순탄하지는 않았다. 중간중간 안무를 다듬으며 솔은 수십 번도 넘게 이럴 때 태오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비단 그것이 솔만 느낀 것은 아닌지 가람도 지호도, 득용도 얼떨결에 태오의 이름을 내뱉었다.

밤샘을 연달아 반복했는데도 졸음이 쏟아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피곤하지 않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몸은 피로했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당장 이불에 들어가 누워도 잠들지 못하고 밤새 뒤척일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할 바엔 연습실에 남는 편이 나았다. 새벽임에도 연습실엔 불이 환했다. 득용과 가람은 녹음실에 올라갔고 지호는 방음 부스에 들어가 있었다. 뒤늦게 시작된 준비에 각자가 바쁜 것도 있었지만, 무시무시한 집중력을 보여 주고 있는 솔을 배려해 모두가 연습실을 비워 준 것이기도 했다.

깔끔하게 이어지지 않는 동선 탓에 솔은 계속해서 제 동작을 다듬으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대략적인 준비는 끝이 났지만, 솔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다음 방송까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혹시라도 당장에 태오가 합류한다면 적은 연습량으로도 금방 따라올 수 있도록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물론 안무쯤이야 금방 뚝딱 따 제 것으로 만드는 태오였지만 그래도 솔은 많은 고민을 기울였다. 한참 같은 동작을 반복하던 솔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하는 게 더 쉽…지 않을까…. 태오야.”

손 모양을 바꿔 보며 솔은 습관처럼 뒤를 돌아 텅 빈 자리에 물었다. 제 실수를 알아차린 솔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더니 끝은 한숨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조금 전까지 오로지 안무 생각에 푹 빠져 느끼지 못했던 공허함이 한순간에 몰려왔다. 늘 이렇게 잘 풀리지 않는 구간을 가지고 끙끙거리면 태오가 적절한 의견을 주었더랬다. 새삼 그의 빈자리가 다가왔다.

솔은 거울 속에 혼자 서 있는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런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었다.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고 솔은 다시금 열을 올렸다. 처음부터 다시 동작을 맞춰 볼 요량으로 솔은 가람이 보내 준 음악 파일을 재생시켰다. 부드러웠던 원곡보다는 조금 더 힘이 실린 전주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자 솔은 제 동선뿐 아니라 다른 멤버들의 자리까지 번갈아 서 보며 연신 몸을 움직였다.

조금 전, 손동작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반복했던 그 부분이 또 걸렸다. 억지로 꿰맞춘 듯 이어지는 동작이 어색하게 느껴지고 움직이기에도 불편했다. 홀로 흘러가는 음악을 놓아 버리고 솔은 그 자리에 멈춰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고개를 저었다.

“오른쪽에 섰을 땐 괜찮은데 왼쪽에선 불편하지. 안무 자체는 좋으니까 왼쪽 라인에 선 사람만 반대편으로 진행하면 돼.”

“아!”

사실은 지금 연습 중이 아니라 잠이들은 게 아닐까? 꿈결같이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솔은 몸을 획 돌렸다. 연습실 문 앞에 모자를 푹 눌러쓴 태오가 서 있었다. 제 고민을 손쉽게 날려 버린 주인공을 보며 솔은 바보처럼 오도카니 서 있었다. 마음 같아선 한달음에 뛰어가 풀썩 안기고 싶었지만, 솔은 차분히 태오의 말을 기다렸다.

“이 시간까지…. 안 피곤해?”

태오의 물음에 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밤을 꼬박 새운 자신보다도 태오가 훨씬 더 피곤한 낯빛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까. 고심 끝에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솔은 제 혀를 깨물어 버리고 싶었다.

“어떻게 왔어….”

주워 담고 싶은 말이었다. 잘 왔다고 붙잡아도 모자란 마당에 어떻게 왔냐니. 솔은 모르겠지만 그의 얼굴엔 스스로의 발언을 자책하는 티가 여실히 드러났다. 입을 열었다가 더 멍청한 말이 튀어나올까, 솔이 입을 다물었다. 태오는 그런 그를 보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핸드폰을 꺼내 들고 솔에게 다가왔다.

“이거 보고.”

태오가 대뜸 내민 핸드폰 화면에 솔은 대번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의 핸드폰에 떠오른 화면은 지난 며칠 익히 봐온 어느 커뮤니티의 게시판이었다. 또 무언가 이상한 말이 나도는 건가, 사색이 되어 그의 손을 덥석 잡아당겼다. 핸드폰에 코를 박을 듯 가까이 얼굴을 들이민 솔은 울렁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빠르게 글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마아스> 성솔 인성 논란 반박 글입니다. (제발 읽어주세요!!)

반장 | 08:20:48

조회 310,565

(솔이의 고등학교, 중학교 졸업 사진.jpg)

(앳된 솔이가 함께 서 있는 단체 사진.jpg)

(체육복을 입은 채 반 아이들 사이에 웅크려 앉아 있는 솔의 사진.jpg)

+ 필요하다면 제 이름도 공개하겠습니다.

태어나서 이런 곳에 글 써보는 것도 처음이네요. 솔이랑 고등학교 같은 반이었던 사람입니다. 솔이는 저희 학교에서 유명인이었어요. 외모도 외모지만 무용 천재라고 상도 타고 대회도 나가고... 같은 시기에 학교 같이 다닌 친구들 중에 솔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솔이는 절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글 쓰게 되었습니다.

여태까지 왜 조용히 있었느냐 하면 사실 솔이한테 닥쳤던 사고 때문에 함부로 말을 하기가 그랬어요. 솔이는 뒷담은커녕 너무 조용한 친구라 솔직히 학교 다니면서 무슨 일이 있었다고 말할 것도 없어요. 반에서 늘 조용히 있다가 집에 가는 친구였고 가끔 같은 반 애들이 솔이한테 질문하고 사진 찍자고 그러면 엄청나게 부끄러워했어요. 덕분에 솔이랑 같이 찍은 사진이 적어서 찾느라 거의 전교생한테 연락을 돌렸네요.

무용으로 상 타서 반 친구들이 다 같이 축하해주니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맙다고 말하던 아이입니다. 선생님들도 다 이뻐했어요. 말수가 많진 않았지만 그래도 잘 웃는 친구였는데 사고 이후로 무용도 그만두고 학교도 잘 안 나오고... 나와도 정말 없는 사람처럼 있다가 가고 그랬어요. 인성 논란이고 뭐고 3학년 땐 솔이랑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눠본 사람이 없을 거예요.

솔이한테 일어난 일이 너무도 큰일이라 저희도 솔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어요.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솔직히 솔이가 본인이 왕따 당했다고 말해도 할 말이 없어요. 저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연락하는 친한 친구들 모두 요즘 솔이가 TV에 나와 웃는 모습 보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었는데...

이런 일로 다시 솔이가 상처받진 않을까 많이 걱정됩니다. 솔이 진짜 착하고 이런 논란 있을 친구가 아니에요.

p.s 솔아 사탕 잘 먹고 있지? ㅎㅎ

└ 같은 무용학원 다녔는데요. 솔이 보면서 와 진짜 천재는 이런 애 보고 하는 말이구나 싶었어용~ 잘난척 좀 할법도 한데 애가 진짜 너무 수줍음 많고 순해서 오히려 선배들이 질투하고 괴롭혔어요. 그런 애한테 인성 논란이라뇨

└ 전에 글 올린 동창이라던 사람 대체 누구신지??? 솔직히 성솔 학교에 친구 없었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작 말해주고 싶었는데ㅠㅠ 괜히 나댔다가 이게 더 성솔한테 상처가 될까 봐 닥치고 있었다

└ 머임????? 그럼 태오랑 싸웠다는 그런 얘긴 뭐임???

└ 나 어제 회사에서 장례식장 갔다가 7조 멤버들 다 봄. 리더가 가족상 당한 거 같더라

└ 헐...

└ 기사보고 띠용함 아니땐 굴뚝에 연기날 수 있구나 진짜 무슨 억하심정있어서 사람 하나 죽이려고 이런건지 이해가 안된다 혼자서 꿋꿋하게 잘 살아보려고 하는 애 괴롭히면 재미있나? 인간 맞음? 학교에 솔이랑 친한애 있었으면 걔는 하루종일 선물이랑 편지 배달만 해야했을꺼임 수줍음 진짜 많아서 열마디 이상 나누기가 힘들었음 그래도 애들이 말걸어주면 잘 웃어주고 고개 열심히 끄덕이고 그랬는데ㅠㅠ

└ 무용학원 원장 선생님 엄청 무섭게 생기셨는디 솔이 무용 그만둔다고 한 날 막 수업중에 울어서 다들 얼탐;; 괴롭히던 언니들도 막상 이렇게 그만두니까 불쌍하다고 미안해했었음

그 아래로 수없이 쭉 이어진 댓글들. 모든 댓글이 솔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내밀어진 손길에 솔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만 굴려 태오를 바라보았다. 솔과 눈이 마주치자 태오는 깊게 눌러쓴 모자를 벗으며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거 보니까, 네가 보고 싶어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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