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아예 시스템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연습실에 홀로 남은 솔은 차근차근 상태 창과 아이템 창 여러 가지를 확인했다. 상태 창은 여전히 떠올랐고 아이템 창에도 그가 보유한 얼마 안 되는 포션들이 그대로 나타났다.
하지만 아무리 수없이 ‘미션’, ‘퀘스트’ 등등 얼추 관련된 알림 창을 불러올 만한 말을 소리 내어 뱉어 보기도 했지만 기다리는 민트색 알림 창은 떠오르지 않았다. 처음 느낀 감정은 당혹이었다. 변화에 세세하게 신경 쓸 만큼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까맣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션이 떠오르지 않자, 솔은 순간 내비게이션이 꺼진 운전자처럼 갈 곳을 잃은 듯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무엇이 원인이 되어 상황이 변한 것인지 되짚어 보았다.
정확히 언제부터 알림 창이 뜨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생방송을 촬영하던 날. 오직 방송을 빨리 끝내고 태오에게 가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지만 1위를 했음에도 미션에 성공했다는 알림 같은 것을 본 기억이 없었다.
무엇이 달라져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 그 원인을 알아내려 허겁지겁 기억을 되짚어 보던 솔은 일순 생각을 멈췄다. …사실 이게 정상인 거 아닌가? 아무런 시스템 창도 뜨지 않는 것이 말이다.
내 삶인데 어떤 존재가 목표를 정해 주고 그걸 성공하지 못하면 죽는다니 말도 안 되는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덕분이라기도 묘했지만, 솔직히 미션에 등을 떠밀려 걸음을 내디딘 점도 없잖아 있었다. 온전히 그것 때문이라곤 말할 수 없었지만, 처음 멤버들을 만났을 때. 화장실에서 그런 일을 겪지 않았더라면 도망쳤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이제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내가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아….’
분명 무서워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새 시스템 창이 뜨지 않아도 눈치채지도 못하고, 등을 떠미는 손도 없는데 스스로 미션을 하겠다고 이 시간에 연습실에 남았다.
잠시 당황했던 솔은 고개를 세차게 휘저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분명 태오에게 그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게끔 자신이 다, 알아서 준비해 놓겠다고 말한 솔이었다. 영호와 회사가 아직까지 태오의 하차를 기정사실로 하지 않은 이상, 태오는 TEAM ONE의 멤버였고 멤버로 남아 있는 한 태오는 책임을 다할 사람이었다.
정식적으로 하차가 결정 나지 않은 태오는 아직 TEAM ONE의 멤버이고 TEAM ONE이 참가하고 있는 <마이 아이돌 스타즈>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공식적으로 발표 난 것이 없다. 그 사실이 솔의 희망이었다.
태오가 정말로 팀을 나가는 것이, <마아스>에서도 빠지는 것이 글로 또렷이 적히지 않는 이상 그는 제 자리에 충실히 역할을 다할 사람이었다. 그러니 완전한 끝은 아니었다. 아직 태오의 자리가 남아 있었다.
솔은 더 단단하고 확고히 태오의 자리를 만들어 둘 생각이었다. 설령, 이번이 정말 태오와 함께 무대에 오를 마지막이 되더라도 웃으며 내려올 수 있도록 말이었다.
솔은 촬영장에서 들었던 다음 미션을 곱씹어 보았다. 언제 탈락할지 모르는 상황이 돼서일까, 예선 때와 같은 선곡에 대한 제한이 사라졌다. 매 회차가 마지막이 될 수 있는 만큼,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해 보라는 배려라고 봐야 할지. 주제도 뭉뚱그려 MC가 모호한 말만 내뱉었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았다는 거창한 인사말로 시작해 이곳까지 팀으로서, 개인으로서 걸어온 길을 보여 달라는 말로 다음 방송의 미션을 알렸었다.
‘걸어온 길’. 솔 자신이 걸어온 길은 설명 불가였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시스템 창에게 위협을 받아 억지로 하다 보니 어느새 진심이 되었다고, 멤버들과 함께 무대에 서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는 것처럼 다른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고 이야기해 줄 수는 없지 않은가.
솔 자신이 걸어온 길은 아니지만 대신 어떤 이가 최선을 다해 멋지게 걸어온 길을 그는 알고 있었다. 가람, 지호, 득용이가 걸어온 길. 그리고 지금 지켜 주고 싶은 태오가 걸어왔고 걸어가야 할 길.
더 이상 시스템 창은 필요 없었다. 비록 미션을 알리는 알림 창은 뜨지 않게 되었지만, 솔은 머릿속으로 자신만의 퀘스트를 만들었다. 안정의 포션도, 상태 창도 이젠 그런 것 따위 없어도 상관없었다. 다른 것을 지켜야 할 때이니까.
***
“솔, 솔!”
저를 흔드는 손길에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며 솔은 앓는 소리를 내었다. 딱딱한 바닥에서 잠이 들었던 터라 관짝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온몸이 뻐근했다. 사방이 막힌 연습실인 터라 시간 가늠이 어려워 솔은 자신을 깨우는 가람을 흐린 눈으로 확인하고 대뜸 몇 시냐는 질문부터 던졌다. 가람은 솔의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걱정을 늘어놓았다.
“안 들어와서 깜짝 놀랐잖아. 전화도 안 받고.”
가람의 말에 그제야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부재중 통화가 잔뜩이었다. 해나 떴을까? 아직 해도 뜨지 않을 이른 시간이었다. 가람의 표정을 보아 하니 밤을 꼬박 새운 듯싶었다. 득용에게 솔이 혼자 있고 싶어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가 귀가하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었던 가람이었다.
기다림에 지쳐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소파에서 잠이 살짝 들었다 깨어났는데, 여전히 숙소 어디에도 솔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황급히 전화해 보니 전화도 응답 없음. 혹 홀로 남은 솔이 다른 생각이라도 할까 덜컥 겁이 난 가람은 허겁지겁 숙소를 뛰쳐나왔다.
연습실 스피커는 백색 소음을 연신 흘리고 있었고, 연습실의 불은 환하게 켜져 있었다. 연습실 찬 바닥에 웅크리고 잠이 든 솔의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가람은 다리에 힘이 풀려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허탈하고 화가 나기보다는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저 못지않게 하얗게 질린 가람의 얼굴을 보니 솔은 그제야 미안한 마음에 사과를 건넸다.
“미안.”
“밤새 혼자 뭐 했어.”
“…이거.”
솔은 가람에게 연습할 때 쓰는 녹화용 핸드폰을 내밀었다. 핸드폰엔 텅 빈 연습실에 홀로 서 있는 솔의 모습이 촬영되어 있었다. 어설프게 거치대에 핸드폰을 걸치고 녹화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 카메라 앞으로 급히 뛰어 다가왔다가 녹화가 제대로 되고 있자 다시 황급히 뛰어가는 모습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윽고 전주가 흘러나오자 솔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자세를 잡았다. 그러고는 박자를 세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 이번 방송에서 이 노래 하면 어떨까?”
솔의 물음에 영상을 확인하던 가람은 이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꽤 오래된 노래였다. 최정상의 인기 가도를 달렸던 그룹의 팬들을 위한 헌정곡. 가람이 의문이 가득 담긴 눈으로 솔을 바라보자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밤사이 혼자 두 번째 생방송 미션을 준비해야겠다는 결단이 서자마자 이것저것 찾아보다 발견한 노래였다.
“태오랑 너랑 이 곡 하는 거 봤어. 가사도 좋고… 어때?”
솔이 그의 반응을 확인하며 물었지만, 가람은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직 동영상 플랫폼에 태오나 가람의 이름을 검색하면 공개 오디션 당시의 모습이 나온다. 둘이 처음 오디션을 통해 만나 팀이 되어서 처음으로 치렀던 평가 곡이 이 곡이었다.
10대 초반의 앳된 모습의 두 사람이 어설프기 짝이 없는 노래를 하며 애를 쓰는 모습이 아직도 영상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지금에 비하면 둘 다 엉망이긴 피차 마찬가지였지만, 자신과 달리 어려운 동작도 금방금방 제 것처럼 소화하는 태오가 얼마나 부러웠었던지.
“내가 혼자 안무는 가닥을 어느 정도 잡아 놨거든…. 다들 허락한다면 이번 미션 이 노래로 하고 싶어.”
봄날의 햇살 같은 멜로디였지만 가사는 마냥 밝고 이쁘지만은 않은 노래였다. 정상까지 달려오느라 시간이 많이 흐르고 퇴색해 늘 항상 자신들을 아껴 주던 팬들의 마음에서 멀어져 그들이 그립다는 가사. 모호한 사랑 고백처럼 들리기도, 함께해 온 사람들에게 하는 인사 같기도 했고 스스로에게 보내는 위로 같기도 한 노래였다.
“그러자. 이 곡 하자.”
솔이 찍어 둔 연습 영상이 끝나자 가람은 나지막이 대답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어린 날, 태오와 이 곡을 공개 오디션에 올렸을 땐 떨리고 어떤 평가를 받을지 두려웠었다. 평가의 결과에 따라 꿈에서 멀어질지 가까워질지가 결론 나는 것이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그 공개 오디션으로 짧지만, 분에 넘치는 인기를 얻었었다. 하지만 그 인기가 오히려 화살로 돌아오자 이리저리 치이며 살게 되었다. 계속 좌절되는 데뷔와 함께 박탈되는 기회에 지치기도 했다. 지금 길을 잃은 태오뿐 아니라 자신도 잠시 목적 없이 떠도는 부표가 되어 살았던 것 같았다. 매일 연습실에 오고, 영 쉽지 않은 안무를 여러 번 반복해 연습하고 노래를 만드는 게 그저 일과가 되어 버렸다.
꿈이라는 설렘보다는 마치 ‘일’처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듣는 순간 떠올랐다. 데뷔도 아니고 고작 소속사에 소속되는 연습생이 되는 걸로도 기뻐하고 걱정했던 때가 있었구나. 그 정도로 이 일을 하고 싶었고 되고 싶었었구나.
솔이 구태여 이 노래를 고르고 이 노래에 담은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모두의 자리가 여기라고 말해 주고 싶은 것이었다. 태오도 가람도, 지호도, 득용도, 그리고 솔 자신도. 가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솔은 배시시 웃으며 수줍게 인사했다. 며칠 만에 보는 미소인지 모처럼 그의 얼굴에 빛이 피어났다.
“고마워.”
“…내가 고마워해야지.”
엊그제 제 품에서 아이처럼 애처롭게 울던 사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눈앞에 바위 틈새 핀 들꽃 같은 사람이 앉아 있었다. 이제 제법 거센 바람이 불어도 전처럼 쉬이 넘어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제 도움이 없어도 혼자 훨훨 날아갈 것도 같았고 그의 모습에서 미워할 수도 그렇다고 속없이 좋아할 수도 없는 친구의 모습도 얼핏 보이는 것 같았다. 가람은 허탈한 듯 한숨 섞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른 듯 닮아 버린 두 사람의 모습이 겹치자 가람은 새삼 정말 이 사랑에 자신의 자리는 없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무슨 수를 써도 제 친구를 밀어내지 못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수십 번 곱씹고 각오한 일인데 이렇게 선명히 눈에 보이니 사람 좋게 활짝 웃어 줄 수가 없었다. 가람은 최대한 태연히, 늘 평소의 그답게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솔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혼자 있고 싶다고 그랬다더니, 밤새 이거 준비한 거야?”
“응. 이번이 정말 끝일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태오한테도 약속했어. 내가 다 준비해 놓고 기다리겠다고. 태오가 진짜로 올진 모르지만….”
“…….”
가람은 잠시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