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솔과 면담이 끝난 직후, YC 엔터테인먼트는 사실무근인 악의적 루머이며 아티스트 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입장문을 올렸다.
솔이 직접적으로 갑질을 한 것도, 학교 폭력을 행한 것도 아닌데 과한 욕을 듣고 있다며 옹호하는 일부와 꼭 사건이 있어야만 잘못한 것이냐, 저런 인성을 가진 연예인은 꼴 보기 싫다는 일부가 뒤섞였다. 논란은 사그라들긴커녕, 싸움판이 되어 활활 타올랐다.
일단락된 줄 알았던 스토커를 재조사해야겠다는 영호의 연락을 받은 가람은 태오가 제게로 다가오자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솔은 내일 온대.”
“안 와도 된다고 전해 줘.”
가람은 조금 전, 영호와의 통화 중 일부를 태오에게 전달했다. 그가 가장 궁금할 소식일 터였지만, 돌아온 대답은 냉정하다 못해 퉁명스럽기까지 했다. 냉랭한 태오의 반응에 가람은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윤태오.”
“…….”
하필이면 이 모든 것이 지금이었다. 태오에게 이런 일이 닥친 것도, 솔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도. 하필이면 지금이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서로가 필요한 때에 서로를 의지할 수 없도록.
“너, 솔한테 했던 말들… 진심이야?”
“…어.”
가람의 질문에 태오는 잠시 아주 짧은 고민을 했다. 답변을 고민한 것이 아니라, 솔에게 자신이 했던 말을 고르느라 한 고민이었다. TEAM ONE을 그만두겠다던 말? 제발 남아 달라며 네 자리는 여기라던 애원에 대한 거절? 그도 아니면 아직도 선명한 입맞춤에 대해? 어느 쪽이든 답은 같았다.
“너도 힘들고, 솔도 힘들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 모든 상황이 가람에겐 어려웠고 절친한 친구에게도 짝사랑하는 상대에게도 무엇 하나 또렷하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도움을 원치 않았다. 가람의 말에 태오는 벽에 등을 기대고는 한숨처럼 말을 내뱉었다.
“알아. 나한테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너도, 지호 형도 다들 돌아가. 여기 있을 필요 없어. 솔이한테 가.”
가람이나 지호도 옆에 있는 게 맘이 편치 않았지만, 더더욱 솔이 옆에 있으면 태오는 무너질 수가 없었다. 태오는 그런 사람이었다. 절대로 타인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마음 편히, 속 시원히 울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망가지고 싶은데 그게 쉽지 않았다. 당장에 솔을 떠올리면 그에게로 돌아가 지난 일을 사과하고 힘들어 할 그의 손을 잡아 주며 별일 아닌 척 굴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람도 피차 비슷한 기분이었지만 태오와는 차이점이 있었다. 태오가 그렇게 손을 내민다면 솔은 마주 잡겠지만, 가람이 내민다면 밀어낼 거라는 것.
“……태오.”
“이젠, 내가 오히려 짐이야. 내가 솔이를 더 힘들게 만들 거야. 그러니까 너랑 지호 형이 많이 도와줘.”
“꼭…. 꼭 그렇게 될 거란 보장은 없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솔이 원하는 건 내 도움이 아니야….”
전에도 이번에도, 솔은 가람을 밀어냈다. 어젯밤 장례식장 뒤편에서도 솔은 가람을 받아들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가람의 눈에 비친 솔은 언제고 항상 태오를 향해 있었다. 가람이 말끝을 흐리자 태오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가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젠 태오도 모르지 않았다.
제 키스에 놀라 도망가거나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한 발짝 제 품으로 파고들어 오는 움직임.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첫 키스의 상대가 자신과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걸. 하지만 기뻐할 수 없었다.
첫 생방송 무대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한 걸 자축하며 꿈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음에 기뻐해야 하는 멤버들이었다. 지금 새로 안무를 짜고 무대를 어떻게 꾸릴지 고민하고 연습해야 하는 멤버들은 제 옆에 와 있었다. 결국 그런 멤버들을 단호히 그들의 현장으로 돌려보내지 못하는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가람은 솔에게 태오의 도움이 필요하다 말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건 태오 자신이었다. 솔이 필요했다. 솔에게 경연 프로그램이건 데뷔건 뭐든 그런 것 따위 걱정하지 말고 그냥 내 옆에서 나를 위로해 주고 함께 있어 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솔을 위하는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겨우 예전의 아픔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솔을 자신 때문에 다시 끌어들일 수도 없었다.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촉박하게 돌아가는 프로그램에 제가 온전히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시간을 달라 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제가 목적을 잃었다고, 자신이 할 수 없다면 멤버들이라도 빛날 수 있도록 보내 줘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확고했다.
하지만 태오도 사람이었기에 하루에도 수천 번 영정 사진을 보다가도, 그냥 빈소에 놓인 국화 한 송이를 보다가도, 바로 지금 가람의 얼굴을 보다가도 솔에게 뛰어가고 싶은 기분이 되곤 했다.
태오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가람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의 표정을 보곤 말문이 막혀 더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영호가 다녀갔다. 혹시나 솔이 우울한 생각을 하진 않을까, 학교에서 돌아온 득용을 막 붙여 놓고 왔다고 했다. 그리고 멤버들에게 자초지종과 앞으로 어떻게 일이 돌아갈지를 설명했다.
솔의 가정사와 그의 병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공개가 될 거라는 영호의 말에 모두가 우려를 표했다. 태오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설명을 끝마친 영호는 태오를 따로 불러내 그의 생각을 다시 확인했다.
“태오야. 아직도 생각엔 변함이 없냐.”
“…네.”
“네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이렇게 포기한다는 게….”
태오는 영호의 말을 그저 듣고만 있었다. 영호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지 않았지만, 태오의 온 신경은 솔에게 쏠려 있었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난 뒤의 솔이 걱정되었다.
태오는 저를 설득하려 부단히도 애를 쓰는 영호를 두고 고개를 돌려 동생의 영정을 바라보았다. 교복을 입고 있는 증명사진. 저 어린 동생이 떠났는데도 자신은 눈물을 흘리기는커녕 다른 사람을 걱정하고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미친 게 아닐까 싶었다.
다음 날 마주한 솔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태오에게 제발 곁에 남아 달라 애원할 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솔의 모습은 꼭 늘 올곧았던 태오를 떠올리게 했다. 발인을 앞두고 서로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지만, 나란히 선 태오와 솔의 모습은 어쩐지, 서로가 뒤바뀐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필요하단 말과 달리 눈물짓지도, 유약하지도 않은 솔의 모습에 안도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마음 한편이 아려 왔다. 태오의 어깨는 무겁도록 가라앉았다. 실상은 솔도 마찬가지였다. 태오가 자신을 걱정하지 않도록 꿋꿋하고 강한 척하기란 쉽지 않았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하룻밤 사이에 초췌해진 그를 보니 솔은 단단히 마음먹을 수 있었다.
이젠 눈물을 참는 방법으로 책이라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 아릿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서로에게서 멀어졌다. 조용히 소리 없이 멀어지는 서로를 엇갈려 돌아보며 두 사람은 세뇌하듯 다행이라 수없이 읊조렸다.
멤버들과 함께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싶었지만, 솔은 일찌감치 회사로 돌아와야 했다. 회사의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일전에 한 번 본 적 있던 경찰을 다시 만났고 팀장에게 인터넷상에 게재될 입장문도 전달받기도 했다.
각오한 바였으나 제 개인사를 써 내려간 글들을 보니 눈앞이 흐릿해졌다. 적나라한 표현 없이 에둘러 쓴 글이었음에도 뭔가 치부가 까발려진 느낌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걸로 솔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게 아니었다. 멤버들과 태오를 보호하려 함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솔은 더한 일도 할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에 내보내겠다던 인터뷰 내용과 빼곡하게 채워진 진단서도 얼마든지 공개할 수 있었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 준 모두에게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장례식도 끝이 나고, 솔의 인성 논란을 잠재울 입장문도 세상에 공개되었다.
“형, 안 들어가요?”
솔은 다시 연습실로 돌아왔다. 평소였다면 연습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풀이 잔뜩 죽어 보이는 득용이 조심스럽게 솔에게 물었지만, 솔은 그에게 시선도 두지 않고 고개를 내저었다.
“응. 너 먼저 들어가.”
“……솔이 형.”
“괜찮아. 아니, 그냥 혼자 있게 해 줘.”
득용이 문 앞에서 갈팡질팡하자 솔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걱정해 주는 득용에겐 미안하고 고마운 일이었지만, 솔에겐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걸 위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저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얼굴도 보여 주지 않는 솔을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득용은 ‘일찍 들어와야 해요.’라는 말을 남기고 연습실 문을 조심스레 닫았다.
비로소 혼자 남은 솔은 연습실 중앙에 덩그러니 앉아 허공을 쳐다보았다. 며칠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있어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일을 지금 확인해 볼 참이었다.
바로 미션이었다. 솔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 이상한 현상을 두고 좋아해야 하는 것인지 걱정해야 하는 것인지. 아무튼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확실했다.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더 이상 로그인 보너스 창이 뜨질 않았던 것이 전조 증상이었던 걸까.
진작 확인했어야 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분명 떠올라야 할 새로운 미션 알림 창도, 성공했다며 늘 뜨던 보상 창도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밝게 빛나던 민트색 알림 창을 처음 마주했을 때만 해도 그것이 신경 쓰여 엉뚱한 곳에 눈길을 주거나 하는 일이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턴 적응이 되었는지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다.
늘 솔을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던 시스템이긴 했으나 동시에 그가 변화하는 데에 도움을 주던 손이기도 했다. 그 미션이 본래 없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