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솔은 당분간 뭐든 자제하라는 말을 들었다. 자제할 건더기도 없이 연습실과 숙소만 오고 가는 그라 특별히 불편할 것도 없었지만 태오와 멤버들이 가 있는 장례식장에 방문하는 것도 제한되었다. 울적한 얼굴로 등교하는 득용을 보내고 연습실로 온 솔은 마룻바닥에 덩그러니 앉아 핸드폰만 바라보았다.
가람과 지호, 은겸이 연신 솔을 걱정하며 메시지를 보냈지만, 솔은 읽는 둥 마는 둥 흘려 넘겼다. 그럴 정신도 아니겠지만, 태오는 여전히 단호하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아침에 회사에 얼굴도장을 찍자마자 신인 개발 팀 팀장은 새로운 소식을 전해 왔다.
지속적으로 모니터링을 한 덕에 빨리 발견할 수 있었으나 딱히 회사 측에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익명으로 돌아가는 사이트이기에 게시글을 올린 사람에게 따로 연락할 수 없었고 댓글을 남기는 건 오히려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었다. 커뮤니티 운영자 측으로 메일을 보내 놓기는 했으나 그간의 전례를 보건대 정말 고소나 민형사 사건으로 발달하지 않는 이상 그다지 협조적이지도 않은 것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거기에 오전 일찍부터 연락이 온 프로그램 제작사 측은 확실한 해명과 해결책을 내놓든가, 아니면 빠르게 하차하기를 종용했다. 애초에 해명을 그다지 듣고 싶은 것 같지도 않았다. 괜히 <마아스>가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은 사양이니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 프로그램이 깨끗할 수 있도록 사라져 달라는 뜻이 한 마디 한 마디에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팀장은 이를 빠득 갈았다. 애초부터 저들이 솔에 대한 이미지 메이킹을 그렇게 한 영향이 없지 않았다.
마음이 다급해진 팀장은 솔에게 새로운 스크린 샷 이미지를 보여 주며 누가 올렸을지 가늠이 되냐 다시 물었지만, 솔은 여전히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회사 내에서 핸드폰 사용이 임시로 허용되었지만, 솔은 그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못했다.
연습실 거울에 유난히도 축 처진 솔의 등과 어깨가 사방으로 비쳤다. 솔은 짐짓 심각한 얼굴로 정신을 가다듬고는 팀장이 보내 준 새로운 스크린 샷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확인했다. 본 적이 있는 사진이 게시글 상단에 올려져 있었다. 잃어버렸던 핸드폰에 들어 있었던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던 그 사진.
다시 한번 동창이라며 올라온 새 글에는 그 사진이 솔을 중심으로 잘려 첨부되어 있었다. 옆자리에 부모님으로 특정될 만한 요소는 검게 칠하고 솔의 얼굴만 남겨 둔. 솔의 얼굴에만 중점을 두게 잘린 사진은 오히려 양옆에 다른 인물이 앉아 있는 흔적이 남아 꼭 여럿과 어울려 찍은 사진 같아 보였다.
인증하라고 해서 인증함
ㅇㅇ | 22:21:48
조회 21,423
졸업앨범 같은 건 돈 주고 살 수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같이 찍은 사진 올림 다른 친구들 얼굴은 잘랐음
(솔만 확대해 자른 사진.jpg)
지금 지난 방송관련해서 멤버랑 싸웠다 뭐 이런이야기 나오는데 무용하고 학교 다닐 때도 같이 다니는 애들 무시하는 게 그냥 얘 일상이었음
핸드폰에 애들 이름 이상하게 저장해두고 되게 음습하게 메모장 같은 곳에 애들 약점이나 자기 맘에 안드는거 막 적어둠
진짜 소름끼치는게 걔 핸드폰에 강가람 [발목 약함[< 이런거 적혀있음 이런거 대체 왜 적어둬?
내가 그런거 왜 적어두냐고 물어봤는데 나중에 협박?? 이용하려고 이러면서 존나 정색빨고 무표정하게 빤히 쳐다봄
대놓고 무안주고 무시하고 일부러 큰소리로 웃는데 그럴 때마다 싸이코패스같음ㅜㅜ
방송 나와서 정색할 때마다 그 때 생각나서 소름끼쳐
└ 얘 마아스 나오기 전까지 활동사진 외엔 아무것도 없는데 저 사진 좀 어려 보이고 진짜 같기두...
└ 사진까지 같이 찍을 정도면 쓰니도 결국 같이 어울린 거 아님? 글구 멤버들 얘기까지 알고 있으면 결국 최근에도 만난거고
└ (쓰니) 졸업식 때문에 학교에서 만났어
└ 진짜인 거 같은뎈ㅋㅋㅋㅋ
└ ㄹㅇ 얘 화면에 잡힐 때마다 정색하고 있음
└ 멤버랑 싸운 건 또 뭐야?
└ (트위터발 태오와 솔이 무대 아래에서 다퉜다는 검증되지 않은 글의 스크린 샷.jpg)
└ 나만 좀 이때다 싶어서 물어뜯는 거 같나...
솔에 대해 풀린 정보가 너무 없다 보니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이 일파만파로 퍼졌다. 적당히 앳되어 보이는 공개된 적 없는 사진의 등장에 동창이라는 사람의 말에 신빙성을 부여해 주었다.
댓글에는 특정 방송이나 솔과 함께 일한 적 있다는 스태프라는 사람들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다른 아이돌들과 달리 솔은 인사도 하지 않고, 스태프들에게 정색하며 무시하는 태도를 일삼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 은겸 뮤비 스태프였는데. YC에서 갑자기 얘를 무조건 넣어야 한다고 우겨서 갑자기 캐스팅 바뀌고. 분량 억지로 만들어줌 그런데 진짜 촬영장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정색하고 앉아있거나 지시 1도 안 들어서 일정 딜레이되고 장난 아니었음 듣기로는 낙하산이라더라
거기에 더불어 마아스에서 종종 내비친 솔 특유의 어색한 미소 사진 같은 것들을 캡처해 올리고 억지로 웃는다는 조롱이 이어졌다. 방송 내용 중 그저 열심히 연습하기 바빴던 장면도 한번 의심이 생기니 다들 곱씹으며 찜찜한 부분을 찾아내는 데에 혈안이 되었다.
└ (명하에게 정색하는 짤.jpg)
(심사평에 급히 얼굴이 굳는 움짤.gif)
팀장이 보내 준 스크린 샷을 쭉 훑어보던 솔은 게시글 상단에 첨부되어 있는 사진을 가만히 보며 고운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이상하리만치 꺼림직했던 가족사진. 정말로 이 글이 자신도 모르는 자신으로 인해 상처받았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 싶었던 생각이 걷히고 길이 보였다.
솔의 기억에 없는 사진이니 혹시라도 이 사진을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들기는 했었다. 하지만 멤버들과 처음 만나고, 기억력 문제로 인해 메모했던 내용들이 글에 고스란히 들어 있자 팀장과 영호가 그토록 알고 싶어 하던 글쓴이에 대한 가닥이 잡혔다. 솔의 핸드폰을 가로채 갔던 가람의 스토커. 그녀가 분명했다.
범인이 누구인지 좁혀지자 솔은 핸드폰을 들고 허겁지겁 영호를 불렀다. 솔의 말을 전해 들은 영호는 제 이마를 퍽 소리 나게 두들겼다. 팀장이 모르는 일이라는 듯, ‘스토커?’라고 되묻자 영호가 ‘처음부터 강경하게 대응했으면 이런 문제도 없었잖아요! 괜히 애들만 고생하고!’ 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동창이란 사람의 정체는 특정되었지만, 그 아래로 달린 다른 증언들도 문제였다. 특히나 현장 스태프들의 목격담 말이었다.
“스태프분들 증언 같은 건…. 제가 그때.”
몇몇 특정이 가능한 상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은겸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할 때는 지금 와 생각해도 엉망이었다. 프로필 사진 촬영 때는 말할 것도 없었고. 댄서로 음악 방송 사녹에 갔을 때도. 안정의 포션을 사용하긴 했으나 그래도 긴장감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없었기에 지시 사항을 들으면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 버렸었다. 이젠 솔의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영호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무대 공포증이랑 그런 거 때문에 그랬던 거잖아.”
“네…. 그분들한테 민폐 끼치거나 갑질 같은 거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당연하지. 네가 갑질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태오도 태오지만, 솔아. 네가 마음고생이 많다. 이 악질은 진짜 이번엔 꼭 잡아야 해.”
영호가 솔의 어깨를 두들기며 솔을 위로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솔은 고개를 푹 숙이고 큰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풀이 죽어 있었지만 더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팀장의 눈치를 살피는 행동과 달리 솔의 목소리엔 단호함이 묻어 나왔다.
“그리고…. 학교에 친구가 없어서요. 딱히 연락할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저한테 문제가 있긴 했지만. 정말 나쁜 짓은 안 했어요. 그랬을 거예요.”
자신이 여기서 어물쩍거리면 단순히 솔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멤버들에게도 피해가 갈 것이었다. 정말로 <마아스>에서 하차해야 할 수도 있었고 나아가 그룹 자체에 인성 논란이란 딱지가 붙어 다닐 수 있었다.
“영호 매니저님, 솔이랑 따로 대화 좀 할게요.”
팀장은 새끼 새를 품은 어미 새처럼 구는 영호를 회의실 밖으로 내보냈다. 그녀가 보기에 솔은 영호의 보호가 더는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솔아, 너도 글 봤다시피 완벽하게 해명하려면 네 사정을 아예 말하지 않을 순 없어. 되도록 공개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네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공개해야 할 수도 있어.”
영호를 따라 이 회의실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결심한 내용이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고 나아졌다 하지만 어디 가서 떠벌리고 싶지 않은 사정이었다. 아마도 공개되고 난다면 한동안, 아니 어쩌면 늘 그에게 불행하고 불쌍한 타이틀이 따라다닐지도 몰랐다. 솔은 언제 풀이 죽었었냐는 듯, 반짝이는 단호한 눈동자로 팀장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그러면 태오에 관해선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거죠?”
“그럴 거야.”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솔의 과거사와 진단서를 버무려 공개하고 스토커가 올린 글에 대해 강경 대응과 조사가 들어간다면 한동안은 솔에 대해서만 떠들어 댈 것이다. 구태여 거기에 리더의 이탈 사유와 가정에 닥친 슬픈 일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멤버 둘씩이나 데뷔도 전에 불행 타이틀을 다는 것은 오히려 회사 측에서 사양이었다. 훗날 시간이 흘러 이런 일이 있었지만 프로답게 임했다는 미담으로 흘리는 것이라면 모를까.
“……그럴게요. 멤버들한테 피해만 안 가게 해 주세요.”
“잘 생각했어. 솔아. 걱정하지 말렴. 스토커는 반드시 처벌받게 할게.”
팀장은 그제야 솔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었다.
“꼭이요. 다시는 우리 누구도 괴롭히지 못하게 해 주세요.”
고개를 끄덕이는 솔은 마치 태오를 닮은 듯 무척이나 단호했다. 그간 늘 멤버들에게 보호받고 도움받아온 솔이었다. 특히나 태오. 이번에는 태오가 솔의 뒤에 숨어 잠시 슬픔을 달랠 수 있게. 든든한 버팀목까지는 아니어도 그림자 정도는 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