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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를 뽑고 싶어-159화 (159/192)

#159

지금은 아니지만, 이따금 한 번씩 너무 억울해 숨이 막힐 것 같을 때가 있었다. 세상의 모든 불행의 중심이 나인 것 같아서, 왜 내 주변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너무도 불공평하다고 생각해서. 그저 이유 없이 길을 걷다 너무 환히, 행복하게 웃는 또래 아이들을 보면 화가 치밀기도 했었다.

이 모든 것이 억울해서. 나의 잘못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지 지금도 그 답을 모르겠다. 이 모든 일에 인과가 있기는 한 걸까? 어느 날 느닷없이 복권에 당첨되는 사람처럼 그냥 어느 날 이런 불행에도 당첨되었다. 부모님을 잃고 병원을 떠나 나 혼자만의 삶으로 돌아온 날, 얼굴도 잘 모르는 친척 어른들의 말을 솔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다 팔자지 뭐. 명줄이 거기까지인 걸 어쩌겠어.’

억울하고 허망했다. 내가 어떤 사람이건, 어떤 일을 했건 얼마나 행복하고 좋은 사람이었건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이. 한순간에 세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아무것도 바꿀 수도, 막을 수도 없다는 것이. 엄마가 사라진 관객석을 보는 것이,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무대 위에 서는 것이, 있지도 않은 후유증에 겁을 먹는 것이, 그런 이유로만 무용을 그만둔 것이 아니었다.

그냥 허무했다.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무력감, 박탈감, 그 모든 허무한 감정들은 의미를, 목적을 잃어 생긴 상실감이다. 그리고 지금 솔의 앞에 고개를 숙인 태오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기도 했다.

지금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달리고 있던 트랙에서 이탈해 멈춰 서고 싶겠지만, 결국 지금의 솔처럼 다시금 궤도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태오가 솔에게 했던 말처럼. 윤태오의 자리는 무대 위, 그리고 연습실 거울 앞이었다. 솔 못지않게 그곳에서 가장 멋지게 빛나고 생동하는 사람이 윤태오였다.

물론 그에겐 감정을 추스를 시간이 충분히 필요했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포기가 되어선 안 되었다. 솔의 이기심이라고 손가락질해도 할 말이 없지만 솔은 태오를 놓아줄 수 없었다. 다른 듯 닮은 두 사람, 언젠가 태오가 솔의 자리는 이곳이라며 붙잡아 주었던 것처럼 솔도 태오를 붙잡아야 했다.

태오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솔을 비롯한 멤버들이. 지금의 팀이 실시간으로 촉박하게 진행되는 생방송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았더라면, 태오는 어쩌면 시간을 달라고 했을 것이었다. 이 프로그램으로 육체적으로든 어느 방향으로든 힘든 것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기회인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멤버들이 찾아온 기회를 자신 때문에 놓치게 되는 것이 태오로 하여금 이런 결정을 내리게 한 주된 원인일 것이다.

태오를 다시금 팀에 단단히 붙잡아 둘 무언가가 필요했다. 홀연히 떠나 버린 여동생의 빈자리를 온전히 메워 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떠나려는 그의 발목을 무겁게는 해 줄 무언가.

“내가 다 할게.”

“……?”

제 머리 위에서 들리는 절박하기까지 한 솔의 목소리에 태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로등 불빛을 등져 역광이 드리운 얼굴엔 정말이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이 담겨 있었다. 노르스름한 전등불이 그의 가지런한 뺨을 타고 흘렀다. 결연하게도 꽉 움켜쥔 주먹은 새하얗게 세어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힘겨워 보였다.

“그동안 나 많이 달라졌잖아. 태오, 네 덕분에… 그만둔다고 하지 말아 줘.”

“성솔….”

“잘한다고 다들 칭찬해 줬잖아. 내가 안무 다 짜 둘게. 지호 형이랑 가람이랑 다들 도와줄 거야. 네가 신경 쓸 일 없게 우리가 다 준비해 둘게.”

“…솔아.”

“태오 너는 그냥… 조금 더 슬퍼하다가 우리한테 돌아와 주면 돼. 내가 다 해 둘게…. 그래 주면 안 될까?”

안무도 파트 분배도 모든 걸 다 준비해 두면 태오는 그저 늦게라도 함께해 주면 되었다. 다른 멤버들에겐 미안한 일이었지만 솔에겐 <마아스>의 결과도 아무 상관 없었다. 태오만 계속 멤버로 있어만 준다면 당장 탈락해도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태오가 없는 지금의 자신도, TEAM ONE도 이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태오 네가 필요해. 네가 없으면 안 돼…. 내 자리는 무대 위라고 했잖아. 그런데 난 무대에 혼자 설 수 없어. 내가 내 자리에 있으려면 태오 네가 필요해. 그러니까 태오 네 자리도 여기야.”

자신이 그러했듯이 태오가 저를 믿고 기댈 수 있게 멋있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내 솔의 설득은 감정의 젖어 떼를 쓰는 꼴이 되어 버렸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태오가 없는 팀은 솔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솔이 지금까지 이 모든 것을 견뎌 내고 단단한 우울이란 껍질을 까고 세상으로 나올 수 있게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사람이 태오였다. 그런 태오가 존재하지 않으면 지금의 성솔도 없었다. 구태여 이야기를 들어 보지 않아도 다른 멤버들도 분명, 한마음 한뜻일 것이었다. 솔의 목소리에 울음이 뒤섞였다. 솔을 부르는 태오의 목소리가 점점 더 다정해졌지만, 솔은 그럴수록 더 힘겹게 말을 이어 나갔다.

“태오 네가… 내 자리는 여기라고 했잖아. 태오 네 자리도 여기야. 우리 옆이고, 내 옆이야. 그러니까.”

지금 가장 슬프고 힘든 사람은 태오이지만, 솔은 제 감정을 호소했다. 그렇게라도 떠나려는 태오를 잡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못되어질 수 있었다. 그가 멤버들과 함께 같은 트랙에만 설 수 있다면 지금 바로 무릎이라도 꿇고 추하게 바짓단을 붙잡고 애원할 수도 있었다. 태오가 고개를 들자 반대로 솔의 고개가 아래를 향했다.

눈에 가득 맺힌 눈물이 너무 무거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자신도 지금 태오에게 생떼를,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도 힘들고 고통스러워 모든 것에서 도망쳤으면서 태오에겐 도망치지 말고 참고 버텨 달라 말하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알면서. 얼마나 이기적인 말인지, 솔은 차마 태오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염치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그만두지 말아 줘.”

솔의 외침에 가까운 말들은 고백보다는 고해 성사 같았다. 고해 성사를 끝낸 솔은 자신의 죄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더욱이 깊이 숙였다.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가 무거운 머리의 무게를 견뎌 내지 못하고 바닥으로 뚝 떨어질 것처럼 깊이 숙어졌다. 태오는 고개 숙인 솔을 가만히 바라보다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정작 솔은 태오가 내민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아니 그 손을 잡을 염치가 없었다. 무색하게 홀로 허공에 멈춰 선 태오의 손 위로 결국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체온을 담은 액체가 쏟아졌다. 똑, 똑. 솔의 온도를 그대로 담은 투명한 물방울이 태오의 엄지 위에 떨어져 이내 손등을 타고 흘렀다.

잠시 제 손에 흐른 물길을 바라본 태오는 조용히, 더욱 손을 뻗어 새하얗게 세 버린 손 위에 제 손을 포개었다. 큼직한 손이 새하얗게 도드라질 정도로 움켜쥔 작은 주먹을 완전히 감싸 안자 솔은 그제야 천천히 손에 힘을 풀었다. 힘껏 움켜쥐었던 손가락이 느슨해지며 그 사이로 태오의 기다란 손가락이 침범했다.

서로의 손이 얽히고 이내 꽉 맞물려 단단히 겹쳤다. 늘 끄트머리가 서늘한 손이 오늘은 얼마나 억세게 움켜쥐었으면 따스하다 못해 화끈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태오는 솔의 손을 잡은 채 그를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병원에 도착해 편안한 얼굴로 누워 있는 동생을 마주하고 나니 잔혹하게도 처음으로 든 생각은 ‘이제 다 끝났구나.’였다. 안도였을까? 아니면 눈을 감은 동생의 표정이 그저 평소처럼, 잠이 든 듯 고요해 실감이 나지 않아서일까.

몸에서 힘이 턱 빠지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눈물도 나지 않았고, 그저 오로지 머릿속에 지난 일들에 대한 후회로 가득했다. 결국 너는 그 자리에 늘 같은 모습으로 잠들어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데 나는 무얼 보여 주려 기나긴 질주를 해 왔는지 허탈감만 들었다. 분명 처음 시작은 스스로의 꿈이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누구도 강요한 적 없었다. 그저 기수가 채찍질하는 대로 달리는 경주마처럼 달리고 있었다. 우스운 건 매서운 채찍질을 하는 기수도 자신이었고 그 채찍을 맞으며 달리고 있는 경주마도 태오 자신이었다.

왜 그리 가수가 되고 싶었는지, 왜 이 그룹으로 데뷔하고 싶었는지, 왜 무대에 서고 싶었는지 그 모든 이유가 흐릿했다. 동생에게 보여 주고 싶어서? 정말 온전히 그 이유 때문이었는지 이제는 흐릿했다. 임종도 못 지킨 상주가 되어 오도카니 앉아 국화 속에 둘러싸인 동생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슬픔보다 멤버들 생각이 났다. 태오는 특히나 저를 닮은 듯 안 닮은 솔이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네 마음이 이러했을까?

언제나 가장 맨 앞 열에 앉아 어떤 무대든 진심을 담은 박수갈채를 보내 줄 관객을 잃은 네 감정이 이러했을까. 태오는 솔이 느꼈을 감정을 가늠해 보았다. 그러자 그제야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아직 조문객이 당도하지 못한 빈소에서 태오는 소리 없이 울음을 터뜨렸었다. 하지만 이내 그 울음도 충격에 잠시 몸져누웠던 그의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금세 멎었다.

가람이, 지호가, 득용이가. 무엇보다 솔이 보고 싶었다. 우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 자신을 대신해서 솔이라면 너무도 슬프고 서럽게 펑펑 울어 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 꼭 저가 운 것처럼 가슴을 가득 메운 응어리가 풀어질 것만 같았다. 너무 힘이 들어 그가 보고 싶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솔이 눈앞에 나타났다. 서글프게 눈물을 가득 머금고는, 트랙을 벗어나 목적을 잃어버린 태오에게 제 자리로 돌아오라며 지금 제 앞에서 호소하며 간절히 붙잡고 있었다. 태오는 솔의 손은 놓고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시선의 높이가 달라지자 그의 가느다란 목덜미가 더욱 훤히 보였다.

얇은 피부 위로 톡톡 도드라진 뼈마디가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태오는 두 손으로 뻗어 조심스레 솔의 두 뺨을 감싸 잡았다.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손바닥에 닿는 보드라운 두 뺨이 물기로 흠뻑 적셔졌다. 그의 얼굴을 감싸 쥐고 천천히 들어 올리니 늘 하염없이 이쁘기만 하던 얼굴이 오늘은 여러모로 퍽도 못났다. 흠뻑 울어 눈시울은 붉게 부어올랐고 흘러내린 눈물 자국과 깨끗이 지워 내지 못한 메이크업 자국도 역력했다.

태오는 속으로 읊조렸다. ‘윤태오는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눈물짓는 솔의 얼굴이 미치도록 아름다워 보였다. 동생이 세상을 떠났음에도 눈앞의 사람이 자신을 필요로 하고 붙잡아 주었다는 것에 위안을 얻으면서 지금, 이 순간 그 감정을 핑계로 입을 맞추려 하니 미친 것이 분명했다. 태오는 연신 서럽게 울음을 토하는 솔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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