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준비된 죽음은 조금 덜 슬플까? 느린 이별은 그래도 갑작스러운 이별보다 조금은 덜 슬플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슬픔은 무게도 크기도 없다. 그저 슬픔이지, 하지만 그래도 태오가 혼자인 시간 동안 조금 덜 슬펐으면 했다.
촬영이 끝나는 대로 태오에게 가자던 지호의 말과는 달리 태오에게로 향하는 시간은 지체되기만 했다. 생방송을 알리는 ‘LIVE’ 등에 불이 꺼지고도 멤버들뿐만 아니라 다른 참가자들도 그날의 메이크업과 의상을 유지한 채 인터뷰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계속 촬영해야 했다. 더군다나 최고 득점으로 첫 생방송 무대를 1위로 마무리한 승자로서 소감도 말해야 했다.
다행히도 지호가 어른스럽게 스타트를 끊었지만, 솔은 제게 돌아온 마이크에 ‘정말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같은 형식적인 말을 내뱉고 득용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애초에 솔이 들떠 말을 많이 하는 타입도 아니었지만, 대중의 반응을 신경 쓰고 있어서 더했다. 길게 말을 하면 할수록, 어수선해지는 것도 있었지만 잘 견뎌 내고 있는 감정들이 올라올 것 같아서 조금만 더 참아 주기를 스스로 기도했다.
슬픈 일이었다. 오늘 누구보다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고 성과에 기뻐하며 서로를 얼싸안아야 하는, 여기 모인 소년 중에 가장 행복하고 빛이 나야 하는 사람들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슬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 같은 날엔 그냥 눈물을 펑펑 쏟고 울어 버리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솔은 오히려 그런 감정적인 모습이 마이너스 영향을 끼칠 거로 생각해 최대한 겸손하고 진중하게 말을 내뱉었다.
탈락하여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 다른 참여자들에게도 인사와 위로, 응원을 건네야 했고 생방송 무대까지 저희들을 보러 찾아와 준 관객 여러분께도 인사를 잊지 않았다. 그나마 이 순간에는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웃음 지을 수 있었다. 이따금 가람이 확인하는 커뮤니티를 보다 보면 솔도 사람이기에 날이 선 말들이 더 크게 눈에 들어오곤 하는데, 솔과 멤버들을 향해 손을 흔드는 관객의 모습은 그런 날 선 말을 잠시 잊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다들 하나같이 눈동자에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멤버들의 작은 인사 하나에도 아이처럼 기뻐해 주었다. 1위를 차지한 덕이라고 해야 할지, 탓이라고 해야 할지 인터뷰가 길어지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새벽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화장까지 지울 시간은 없었다. 병원으로 향하기엔 지나치게 튀는 무대 의상을 벗고 대충 무거운 자리에 갈 만한 모습을 갖추니 시간이 한참 흘러가고 말았다. 영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인솔을 맡아 준 직원의 안내를 받아 낯이 익은 그 병원에 도착하자 일분일초라도 빠르게 가고 싶었던 마음과 달리 태오를 지척에 두고 발걸음이 안 떨어졌다.
장례식장은 고요했다. 솔은 병원에서 눈을 뜨고 자신이 누워 있는 사이에 친척들의 논의로 진행되어 버렸던 제 부모의 장례식장 풍경을 아직 기억했다. 부모님이 떠난 것에 대해 슬퍼하기보단 조문객 모두가 홀로 남은 솔을 불쌍히 여기기 바빴던 기억이었다.
기억에 잠긴 솔은 선뜻 빈소에 발을 딛지 못했지만, 다른 멤버들은 나지막이 태오의 이름을 부르며 태오를 똑 닮은 젊은 소녀의 사진 앞에 국화를 올렸다. 태오는 눈물짓지 않았다. 오히려 덤덤한 얼굴로 멤버들을 맞이했다.
아무도 없는 빈소에 혼자 서 있는 태오는 커다란 방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처럼 보였다. 가구도 창문도 사람이 산다는 흔적이라곤 조금도 없는 감옥의 독방 같은 방에 홀로 말이었다. 그곳에 있어야 할 물건이 아닌 것이 어느 날 덩그러니 누군가가 떨어뜨린 것처럼.
가장 친한 친구라 할 수 있고 그들 중 가장 태오를 오래 지켜봐 온 가람이 먼저 태오를 조심스레 위로했다.
“뭐 하러. 쉬다가 아침에 오지.”
“어떻게 그래, 오히려 더 빨리 왔어야지. 우리가 너무 늦었다.”
“미안하다. 영호 형한테 결과 전달받았어. 너희가 축하받아야 하는데…. 나 때문에 다들.”
“태오야, 네가 왜 사과를 해….”
솔은 세세하게 풀어 채 소리 내 말하지 못하는, 만감이 남은 대화를 주고받는 멤버들과 국화에 둘러싸인 사진을 바라보았다. 한 차례 본 적이 있는 얼굴. 태오를 똑 닮은 소녀의 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서 있는데, 누군가 솔의 어깨에 손을 짚었다.
돌아보니 손의 주인은 태오였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솔은 지금, 이 순간 딱 10분만 은겸처럼 듣고 싶은 말만 해 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태오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솔의 고민과 달리 태오는 말 그대로 그저 솔이 와 준 거로 족한 듯했다. 멤버들과 인사를 끝내고 솔과도 시선을 섞은 태오는 모든 일을 끝마친 사람처럼 조금 후련해 보이기도 했다. 그의 올곧은 얼굴이 솔을 철렁하게 했다. 태오가 저런 표정을 지어선 안 된다는 느낌이 솔을 휘감았다.
“태오야.”
아무 말이라도 해서 그를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솔은 제 어깨에 올려진 태오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 그를 불렀다. 하지만 솔의 부름은 태오에게 닿지 못했다.
“잠깐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이는 중년 여성이 빈소에 들어서자 태오는 솔의 말을 끊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큰 키의 체격 좋은 태오가 여성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녀는 더 위태로워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중년 여성을 부축한 태오는 낮은 목소리로 그녀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사고 이후 여러 차례의 수술과 고비를 넘겼음에도 아직 온전히 회복해 내지 못한 그녀는 멤버들의 엉덩이도 들썩이게 할 정도로 초췌하고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제 아들의 부축을 밀어내고 허리를 꼿꼿이 펴 버티고 섰다.
“태오야. 잠깐 바람이라도 쐬고 오렴.”
“…….”
“어서.”
태오는 대답이 없었지만, 그녀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조금 전까지 태오가 지켰던 자리를 지키고 섰다. 그러고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 아들에게 물이든 아니면 차라리 술이든 뭐라도 입을 축이고 오라며 한 번 더 밀어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던 여인은 보이는 것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제 아들을 두고 그녀는 빈소를 찾아와 준 멤버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갑작스럽게 차려진 새벽의 빈소는 너무도 조용해 그녀의 감사 인사와 멤버들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반항하는 사춘기 소년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태오는 한참 만에야 말없이 등을 돌렸다. 빈소를 벗어나는 태오를 아무도 붙잡지 못했다. 대신 솔은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형들….”
“득용아, 앉아 있어.”
태오의 뒤를 솔이 따라가자 득용이 저도 따라나서려는 듯 엉덩이를 달싹였다. 그러자 지호가 그의 팔을 잡아 다시금 끌어앉혔다. 득용이 얼굴로 ‘왜요?’라고 물었지만 지호는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맞은편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가람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는 잡지 않았다.
솔은 태오를 따라 장례식장 밖으로 나섰다. 늘 걸음이 느린 솔과 박자를 맞춰 주던 태오였는데, 오늘은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솔을 기다려 주지 않는 태오의 빠른 걸음은 잠깐 사이에 그의 모습을 놓치게 했다.
태오를 놓친 솔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구석진 자리에서 담배를 태우는 아저씨 몇몇이 보였지만 그곳에도 태오는 없었다. 태오의 모습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익숙한 손길이 솔의 손목을 붙잡았다.
태오는 솔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흡연 구역에서 반대로, 주차되어 있는 차들 사이를 지나 솔이 따라가기 버거울 정도로 빠르게 걸음을 옮긴 태오는 장례식장 뒤편, 어둑한 벤치 앞에서야 솔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늘 솔을 조심스럽게 대하던 태오의 손길이 오늘은 감정이 가득 담겨 억셌다. 태오의 손이 닿았던 자리엔 붉게 흔적이 남았다. 솔이 붉은 손자국이 난 제 손목을 쓰다듬자 태오는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다 벤치에 주저앉았다.
“미안.”
오늘따라 그의 사과를 유독 많이 들었다. 하지만 솔은 그의 사과가 단순히 손목에 남은 손자국 때문만이 아님을 알았다.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너한테 끝까지 제대로 할 거 아니면 빨리 그만두라고 말했었지.”
“…….”
“주제넘었어. 정작 그만둬야 했던 건 나였는데.”
“윤태오.”
벼락처럼 내려친 태오의 말에 솔은 그의 이름 석 자를 또렷하게 불렀다. 하지만 태오는 솔을 바라보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푹 숙여 아무것도 없는 맨땅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생각해. 성솔 넌…. 많이 달라졌어. 오늘도 잘 해냈고 앞으로도 잘 해낼 거야.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고.”
“태오야, 그만 말해.”
“내가 없어도 다들 잘 해낼 거야.”
화장기가 남아 있는 솔의 얼굴이 폭우를 가득 머금은 먹구름처럼 일그러졌지만, 태오는 말을 멈추지도, 그와 눈을 마주쳐 주지도 않았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마음에 들진 않더라도 태은겸이 현명하고 똑똑했다. 복잡한 가정사, 언제든 이탈할 불안 요소를 가진 멤버를 진작에 쳐 내는 게 맞았다. 냉정하지만 목표를 위해서라면 그래야 했다.
TEAM ONE은 지금, 멤버 모두의 꿈이자 목표인 데뷔를 두고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다. 시간제한이 있었고 미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 경쟁에 집중할 수 없는 멤버는 사라져 주는 게 맞다고 판단되었다. 더군다나 그 멤버가 없어도 다들 잘 해낼 수 있다면 더더욱.
그게 다른 멤버들을 위하는 일이고 모두의 발목을 잡지 않는 일이라고 태오는 생각했다. 더불어 지금 태오는 방향을 잃고 좌초된 난파선과도 같았다.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물러나야 했다. 걱정은 되지 않았다. 오늘 꿋꿋하게 잘 해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태오는 솔을 비롯한 멤버들을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이젠 늘 듬직한 리더 윤태오가 그들의 걱정덩어리가 되었다.
솔은 고개 숙인 태오를 한참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