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157화 (157/192)
  • #157

    “감사합니다.”

    멤버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무대에서 등을 돌렸다. 심사 위원들의 칭찬 일색의 호평과 현재까지 순위를 뒤엎은 높은 점수 모두 솔에게 와닿지 않았다. 아직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한 다른 멤버들은 무척이나 기뻐하며 방방 뛰었지만, 솔과 태오는 그럴 수가 없었다.

    지호와 가람, 득용이 솔을 와락 끌어안으며 번쩍 들어 올렸지만, 솔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저 멍할 뿐이었다. 기뻐해야 하는데, 모두의 고생이 만들어 낸 결과에 박수를 보내야 하는데 입을 여는 즉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는 태오의 이름을 부를까 봐 겁이 났다. 그냥 그의 이름을 불러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면 감정적으로 무너질 것만 같은 기분.

    백스테이지로 내려가는 계단. 반갑게 웃으며 동네 형처럼 푸근히 반겨 줄 영호를 기대했던 멤버들은 엄숙한 그의 얼굴을 보고 그제야 상황을 짐작했다. 일순간 모두의 눈동자가 태오를 향했다. 영호가 두 손을 꽉 움켜쥐고 나지막이 태오의 이름을 불렀다.

    “태오야.”

    “……. 이제 갈게요. 영호 형. 부탁드립니다.”

    태오는 영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영호와 함께 태오가 멀어질 때까지 멤버들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들 말문이 막힌 듯 그 자리에 먹먹히 서 있다가 이내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누구도 함부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침묵이 가져오는 무게에 짓눌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어서 이동하라는 스태프의 지시에 정신을 차린 지호가 먹먹한 얼굴로 멤버들의 등을 토닥여 떠밀었다.

    “우리 지금 생방송 중이야. 태오가 걱정하지 않게 끝까지 잘 마무리해야지.”

    “…태오 형, 괜찮겠죠…? 별일 아니겠죠?”

    “…….”

    모두를 일깨우며 타이르는 지호의 목소리에 득용이 더듬더듬 걸음을 옮기며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든든한 맏형도, 늘 여유 넘치던 가람도, 모진 말이라곤 못 하는 솔도, 그 누구도 득용이 원하는 답을 돌려주지 못했다.

    “어떻게 해요? 태오 형… 어떡해요?”

    모두의 침묵에 득용은 그제야 덜컥, 감정이 올라오는지 울먹거리는 얼굴로 어떡하냐는 말만 반복했다. 지호가 말없이 그의 듬직한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었다. 다들 안내에 따라 걸음은 연신 옮기고 있었지만, 목적지가 어딘지 모른 채 방황하는 기분이었다.

    새카맣게 페인트칠한 문 하나만 열고 나가면 참가자들 모두가 앉아 있는 장소였다. 이제 이 문을 열면 태오를 제외한 네 남자는 그 사람들 사이에 제 자리를 찾아 앉아 다른 참여자들에게 수고했다며 인사하고 서로의 무대를 웃으며 칭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지호는 문을 열기에 앞서 잠시 크게 심호흡하고 울상이 된 득용을 보며 말했다.

    “우리 리더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

    “…정신 차리자. 우리 표정, 말하는 거 다 그대로 나가는 거야. 우리가 망치면 태오는 오히려 자기 탓을 할 거야.”

    가람의 말에 지호와 득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했다. 애초에 그럴까 봐 영호에게 무대 위에선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까지 했던 그였다. 솔은 영호가 언제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는지가 궁금해졌다. 혹시나 그가 무대를 하는 내내 그 자리에 서 있었다면, 무대 위에서 정신이 없었던 자신과 달리 태오는 진작부터 저를 바라보는 영호를 발견했었다면? 너무도 끔찍했다.

    솔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세게 눈을 감자 캄캄한 시야에 어지러움이 느껴져 살짝 비틀거렸다. 그러자 솔의 뒤에 서 있던 가람이 그의 어깨를 잡아 부축했다.

    “솔!”

    솔은 고개를 내저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가람과 지호의 말대로였다. 가뜩이나 사람들의 입에 안 좋은 이야기로 오르내리는 자신이 오늘, 이 자리에서 또 감정을 이겨 내지 못해 조금만 허투루 굴었다간 바로 커뮤니티에 관련된 글이 올라올 것이 분명했다.

    “솔아, 괜찮겠어?”

    지호가 시선을 맞춰 오며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 뒤로 서 있는 득용도, 저를 부축하고 있는 가람의 표정도 매한가지였다. 멤버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솔의 눈에 훤히 보였다. 제 우울하기 짝이 없는 진단서와 가정사를 알게 된 사람으로서 당연한 걱정이었다. 솔은 지호의 물음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신 차리자. 태오가 누구 때문에 참고 버틴 건데.’

    영호에게는 멤버 모두를 신경 쓰는 듯 말했지만, 태오도 멤버들과 같은 걱정을 했을 것이다. 자신과 비슷한 경험이 있고 한창 치료를 받고 있는 성솔이란 가장 큰 불안 요소 말이었다. 이미 시간이 충분히 지체되었다. 솔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어서 들어가자며 손짓을 했다.

    문손잡이를 잡은 채로 쉬이 돌리지 않던 지호가 솔이 한 번 더 손짓하자 근심이 가득한 얼굴을 털어 버리고 문을 활짝 열었다. 이 시간, 가장 슬플 사람은 윤태오인데 어쩐지 눈물은 솔이 날 것 같았다. 솔은 머릿속으로 그저 침묵하던 태오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처럼 의연해질 수 있도록 심호흡을 크게 했다.

    순위대로 층을 나눠 배치한 화려한 의자에는 그 의자보다 더 화려한 차림새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솔을 비롯한 멤버들이 들어서자, 가장 윗줄. 조금 전 7조가 점수를 받기 전까지 1위를 차지했던 5조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 칸으로 내려왔다.

    멤버들이 사방으로 고개를 숙이며 걸음을 옮기자 관객석과 참여자들 사이에서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지호는 언제나 그랬듯, 미소 지으며 감사하단 인사를 반복했다.

    마치 무슨 왕좌라도 되는 것처럼 비어져 있는 맨 윗줄 자리에 앉으니 밀려난 명하가 허리를 돌려 솔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퍽 친한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솔의 무릎에 손을 얹더니 인사를 건넸다.

    “완전 멋있었어요.”

    그러곤 활짝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기까지 했다. 갑작스러운 그의 접촉도 접촉이었지만, 지난번 화장실 앞에서 있었던 모종의 일 이후로 절대 가깝다고 말할 수 없는 사이가 된 두 사람이었다.

    더불어 커뮤니티에서 솔에 대한 날이 선 말이 나올 때마다 종종 함께 거론되는 명하였다. 의도적으로 제작진이 편집하여 짜깁기한 것이지만, 화장실 사건 이후로 명하의 앞에 서면 얼굴이 굳어 버리는 솔은 그와 이상한 라이벌 구도로 끌어들여져 괜한 욕을 더 먹고 있는 것이었다.

    명하는 이번에도 무척 선하고 화사하게 웃었다. 솔은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입가에 힘을 주었다. 자연스럽게, 얼굴을 찌푸리지 않고, 기분 나쁘거나 슬픈 내색 없이. 평소처럼 웃으며 ‘감사합니다’ 그 한마디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솔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감사…. 합니다.”

    솔의 노력이 무색하게,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급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명하는 잘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네?’ 하고 반문하며 귀염성 있게 손바닥을 귀에 가져다 붙였다.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어필이었다. 카메라가 가까워지는 것이 피부 위로 느껴지지만, 솔은 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애써 웃음 짓기는 했으나 그의 목소리는 거의 울먹임에 가까웠다. 그냥 입을 여니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엄청나게 소심한 아이가 느닷없이 발표자가 되어 긴장한 목소리 같기도 했다. 볼품없이 떨리는 목소리에 솔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입꼬리만 한껏 끌어 올렸다.

    솔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앉았던 지호가 여전히 그의 무릎에 올라와 있는 명하의 손을 살짝 밀어내며 마음에도 없는 덕담을 주고받았다.

    “5조 무대도 너무 멋있었어요. 엄청나게 잘해서 뒤에서 지켜보고 긴장했잖아요.”

    솔은 고개를 돌려 지호를 바라보았다. 지호는 강아지처럼 해맑게 웃으며 말했지만, 눈빛을 사람을 꾀는 여우같이 빛났다. 분명 카랑카랑하고 명랑한 말투였지만 솔은 그의 덕담이 ‘닥치고 앞에 봐.’로 들렸다.

    명하와 지호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바라보며 사람 좋게 웃고 있었지만, 칼바람이 불었다. 톡톡 튀는 지호의 목소리엔 뾰족한 날이 서 있었고 사람 좋고 순수한 척 몇 마디를 더 내뱉는 명하의 말엔 기분 나쁜 털 같은 것이 달린 듯했다.

    그러면 안 되지만, 솔은 지금 누군가의 세상이 무너진 순간에 화려한 조명을 받고 웃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를 들고 서로를 찌르고 있는 이 상황에 괴리감을 느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저는 못 하겠어요.’ 하고 뛰쳐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솔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의 양손에 따뜻한 온기가 와 닿았다. 좌우를 돌아보니 양옆에 앉아 있던 가람과 지호가 나란히 솔의 손을 꼭 잡아 준 것이었다.

    어느새 바통을 넘겨받았는지, 득용이 특유의 소란을 몰고 명하에게 질문 폭탄을 투하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속 빈 강정 같은 말이었다.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형 진짜 멋있더라고요.’ 같은 정말 진심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말을 마구 퍼붓자 몇 번 받아 주던 명하가 질려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괜찮아. 조금만 더 버티자.”

    “…….”

    “잘하고 있어. 조금만…. 조금만 더.”

    나지막이 속삭이듯 어르는 말에 솔은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웃으며 명하와 태연히 말을 주고받던 지호였다. 솔을 위로하고 달래듯이 속삭였지만 어쩐지 스스로를 타이르는 것처럼 들렸다. 그의 부드러운 속삭임이 마치 어느 슬픈 발라드 노래의 도입부 같았다.

    “촬영이 끝나는 대로 태오한테 가자.”

    뒤를 이어 들리는 그의 다짐 같은 말에 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람도 득용도 지호의 말을 들었는지 함께 고개를 주억거렸다.

    “우리가 같이 있어 줘야지.”

    가람은 그렇게 지호의 말에 동의를 표하며 솔과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주먹이 아릿하게 아파져 왔지만, 오히려 그 통증이 솔에게 힘을 주었다.

    “응….”

    멋지고 거창한 위로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위로가 지금 태오에게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적어도 솔은 그랬다. 그래도 꼭 윤태오처럼 묵묵히 조용히, 하지만 든든하게 그의 옆에 버티고 서 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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