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성솔!”
로비에서 은겸과 헤어진 솔은 연습실로 내려가자마자 황급히 저를 부르는 태오의 목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니 여전히 얼굴이 거칠하긴 했지만 아무런 일도 없는 사람처럼 고요했다.
“혼자 돌아간 줄 알고 걱정했잖아.”
“아. 잠깐 바람 좀 쐤어. 답답한 거 같아서.”
<마아스>가 본격적으로 방송된 뒤로 태도니 뭐니 여러 가지 말이 오고 갔지만 그래도 나름의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회사 앞에서 사진을 찍거나 서 있는 몇몇 외국인 팬, 국내 팬들이 멤버들을 알아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솔은 요즘 하드코어한 연습량을 소화하고 새벽에 들어갔다. 그에 비해 조금 이른 저녁 시간에 숙소로 돌아가는 지호와 득용이는 제 이름을 또렷하게 부르며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신기해하기도 했다. 다만, 이미 악성 팬으로 인해 사건을 겪었던 멤버들과 영호는 그런 현상을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가람의 스토커 사건이 명확하게 해결이 되지 않았고, 과거와 같이 미비한 대처로 다시 한번 속앓이를 해야 했기에 지금도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앞섰다.
태오가 저를 걱정했다는 말에 좋아해야 할까, 솔은 그에게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였다. 활짝 웃어 주고 싶었지만 영호와 그가 나누었던 대화가 다시금 떠올라 마냥 해맑게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은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틀린 건 없다던 말, 지금 태오가 하는 대처가 은겸의 말대로 그 스스로의 가치관과 마음에서 결정을 내린 것이라지만 그렇다고 훗날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은 되지 않았다. 하기야 소중한 가족을 잃는 일인데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늘 후회가 남을 것이다.
“이제 그만 들어갈까?”
태오는 조금 지친 듯하면서도 아주 태연히, 덤덤히 솔에게 물었다. 그의 차분한 목소리에 솔은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췄다.
“응. 그러자.”
***
솔은 떨리는 손을 뒤로 감췄다. 리허설을 하긴 했지만 생방송이었다. 제 일거수일투족이 그대로 송출되어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는 일이었다. 오늘 솔은 아직까지 아무런 포션도 사용하지 않은 채였다. 생방송도 처음이었지만 영호가 운전하는 밴을 타고 촬영장까지 오는 내내 아무런 경고 창도 뜨지 않은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모든 것이 나아지고 있다는 희망과 용기에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강심장이라고 불리는 베테랑도 긴장해 덜덜 떨고 실수를 연발하는 것이 생방송이었다. 지금 대기실에서 이리 초조해하며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발전이었지만 솔은 애써 떨리는 손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미리 뽑아 두었던 아주 화려한 와인색 정장, 피부가 하얗다 못해 백지장 같은 솔에게 더없이 잘 어울렸다. 창백한 피부 위에 붉은색의 천이 올라가니 색조가 더 살았다. 거기에 마치 훈장처럼 꾸며진 브로치들과 금줄 휘장이 덧대어져 그간 무대에서 입었던 옷 중 가장 화려했다.
컨셉 뽑기를 했던 솔의 의도가 무엇이든 처음으로 선보이는 생방송 무대에 걸맞게 힘을 가득 준 의상이었다. 솔은 대기실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았다. 너무 긴장해 질린 티가 나진 않나, 거울에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지만 보송하면서도 발그레하게 잘 먹은 메이크업에 티가 나지도 않았다. 침을 크게 꼴깍 삼키고 심호흡을 해 보았지만 손은 여전히 떨렸고 이제는 심장까지 떨려 왔다.
거울을 보던 솔은 제 뒤로 분주하게 왔다 갔다를 반복하는 득용을 발견했다. 지금 이 대기실에서 긴장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비단 솔뿐만이 아니었다. 수다스러운 지호는 오늘따라 유독 조용했고 득용은 벌써 몇 분째 같은 자리를 맴도는 중이었다. 가람은 제 귀에 치렁치렁하게 달린 체인 귀걸이를 손가락으로 계속 매만지며 다리를 떨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건 태오뿐이었다.
모든 것에 능숙하고 맏형답게 거뜬하게 해 보이던 지호도 생방송은 생방송인가 보다. 대기실 안에 설치된 모니터로 방송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솔은 관객석을 비추는 화면을 보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만큼 떨릴 것 같아 의도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갑자기 사라진 로그인 보상처럼 미션 보상도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생겼다. 앞으로 얼마나 더 얻을 수 있을지 미지수인 안정의 포션 개수를 확인한 솔은 이걸 사용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득용의 괴성에, 고민에 잠겨 있던 솔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으아아아. 저 실수하면 어쩌죠?”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손가락에 금색 체인이 둘둘 말린 가람이 득용의 말에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조용히 앉아 있던 지호도 도끼눈을 하고 ‘그 주둥이를 다물라!’라고 소리치며 득용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잠깐의 장난으로 대기실에 웃음소리가 퍼졌지만 그도 잠시였다. 솔은 흐트러진 머리를 만져 주는 스타일리스트의 손길을 받으며 태오를 바라보았다. 지극히도 평온한 태오의 표정이 오히려 솔의 마음을 건드렸다.
“7조 준비해 주세요.”
바로 앞 순서 팀이 무대 백스테이지에 서자 멤버들에게도 스태프의 지시가 내려왔다. 하필이면 커뮤니티에서도 자꾸만 저희랑 불이 붙는 5조가 솔의 바로 앞 순서였다. 그들이 무대를 끝내고 내려올 즈음엔 보고 싶지 않은 명하의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이동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태오와 영호가 모두를 둥글게 불러 모았다. 비단 멤버들뿐만 아니라 그간 도와준 스타일리스트들과 신인 기획 팀까지 모두 불러 모아 거창한 파이팅 의식을 했다.
생방송 무대부터는 매번 탈락하는 팀이 생긴다. 그럴 리 없겠지만 오늘 무대에서 꼴지를 기록한다면 그대로 방송과는 안녕인 것이다. 준비는 철저하게 했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이란 것은 모를 일 아니었던가. 솔은 저에 대한 대중의 평가가 떠올라 고개를 내저었다. 혹 자신에 대한 비평이 멤버들에게 영향을 주진 않을까 불안한 생각이 스며들자 그는 세차게 고개를 내젓고 안정의 포션을 사용했다. 그런 음울한 생각에 잠겨 일을 망칠 수는 없었다.
안정의 포션 효과가 적용된다는 알림이 반갑게 떠올랐다. 여전히 생방송이라는 부담감과 떨림이 있었지만 불온한 생각이 사라지고 자신을 위해서라도, 태오와 멤버들을 위해서라도 잘 해내야겠다는 굳은 다짐만 샘솟아 났다. 어쩌면, 태오에겐 오늘이 의미 깊은 무대가 될지도 몰랐다. 부디 오늘 하루도 내일도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지만 솔이 겪은바 세상은 그렇게 쉬이 뜻대로 해 주지 않았다. 늘 언제나 만일이란 것이 있었고 설마라는 것이 있었다.
부디 진심으로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태오와 태오의 동생에게 중요한 무대가 될지도 모르니 그 어느 팀보다 밝게 빛나고 싶었고 그 어느 팀보다 멋진 무대로 끝마치고 싶었다. 솔은 제법 강단 있는, 단호한 눈동자로 멤버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쳤다. 굳세어진 솔의 달라진 눈동자에 모두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같은 마음인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됐다.
인 이어가 불편했다. 제 숨소리가 너무 거칠어 음악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과장을 조금도 보태지 않고, 숨을 마구 내뱉지 않으려 다문 입술을 열면 못나게 헉헉거리며 그대로 자리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무대에 오르고 조명이 어두워지면 늘 관객석에 누군가가 앉아 있기를 찾았었는데, 오늘 솔은 그 누구도 찾지 않았다. 마주 쏘아지는 붉은 빛 조명이 너무 강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는데. 마침내 무대를 끝내고 나니 맨 앞줄부터 중간 열까지 어두컴컴한 그 공간에 앉아 저마다 손에 든 물건을 흔드는 관객들의 모습이 생동하며 눈에 들어왔다.
말 그대로 불태웠다는 말이 걸맞은 무대였다. 정말 모든 걸 내려놓고 미친 사람처럼 움직였다. 똑바로 정면을 응시하고 거칠게 들썩거리는 어깨와 가슴을 억누르며 정면을 응시하자 커다란 카메라가 다가왔다가 뒤로 빠졌다. 이내 환호성이 들리자 솔은 그제야 내내 불편해 거슬렸던 인 이어를 빼내었다.
MC가 박수를 치며 마이크를 잡자 솔을 비롯한 멤버들은 그제야 서로를 바라보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단 한 마디도 내뱉을 수가 없어 그저 조용히 서로의 등만을 토닥였다.
녹화 방송이었다면 이대로 무대를 내려가 숨을 돌릴 시간을 가졌겠지만, 지금은 생방송이었다. 바로 관객 점수와 심사 위원의 평가가 이어졌다. 이내 조명의 색이 바뀌며 무대 위를 환히 밝혔다. 솔은 다시 켜진 조명을 바라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고작 몇 분도 안 되는 사이에 얼마나 몸을 움직였는지, 이마에 송골송골하게 맺힌 땀이 조명을 반사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빛을 받아 일렁이는 솔의 눈동자가 흘긋, 무대 옆으로 향했다. 백스테이지로 내려가는 길목에 헤드셋을 쓴 채 서 있는 스태프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영호의 얼굴이 보였다.
늘 항상 뒤에서 응원해 주는 영호의 얼굴이 허탈한 듯 맥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솔은 본능적으로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솔은 고개를 돌려 영호와 태오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태오는 마치 일부러 영호를 보지 않으려는 듯, 외면하는 사람처럼 꼿꼿하게 정면만을 응시하고 입가에 미소를 걸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런 태오를 프로페셔널하다고 칭찬할지도 냉정하다 욕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걸 다 떠나서 솔은 그런 그를 보며 가슴이 아팠다. 그냥 이건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다. 오롯이 견뎌 낼 수밖에 없는. 고개를 숙이면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아 솔은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MC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전광판에 숫자가 요란하게 쿵쿵 소리를 내며 올라갔지만 솔에겐 유리막이 하나 가로막은 듯 먹먹하게 들렸다. 고운 얼굴이 조명을 가득 담아 그의 슬픔과 걱정과는 상관없이 아름답게 윤이 났다.
무언가를 느꼈는지, 가람이 슬쩍 솔의 어깨에 팔을 둘러왔다. 가람의 손이 따뜻하게 어깨를 감싸 주자 솔은 가람에게 머리를 기대며 시선을 태오에게로 옮겼다.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든든한 리더답게.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조명 아래 미소를 그리고 있는 태오였지만 오늘따라 그의 새카만 눈동자가 짙게 일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