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솔아.”
다정한 목소리의 부름에 솔은 고개를 돌렸다. 복도 끝에는 모자를 푹 눌러쓴, 편한 차림의 은겸이 서 있었다. 솔은 재빨리 우울한 얼굴을 지우고 그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지만 은겸의 눈썰미가 더 빨랐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눈시울이 빨간 게 저 멀리서도 보이는 걸까. 은겸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성큼성큼 솔에게로 다가왔다. 솔은 태오와 영호가 있는 연습실을 곁눈질하고는 혹 자신이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걸 알게 될까, 제게로 다가오는 은겸을 만류하며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솔이 손을 휘저으며 제게로 다가오자 은겸은 자리에 멈춰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두 팔을 활짝 펼치더니 환히 웃어 보였다. 팔을 흔들며 그에게로 달려가던 솔은 은겸과 가까워질수록 머뭇거리더니 이내 그에게서 한 발짝을 남겨 두고 멈춰 섰다. 그러고는 의문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너무 반가워서, 달려와 안기려던 거 아니었어?”
“네?”
은겸의 말에 솔은 팔을 뻗으면 닿을 위치에서 서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반문했다. 은겸의 표정을 보아 하니 솔이 그런 의도가 없었음을 알면서 괜한 장난을 친 듯했다. 능청스레 웃는 얼굴을 보니 솔은 힘이 빠져 어깨를 늘어뜨리며 비실비실 웃었다.
조금 전까지 울컥했던 눈물이 쏙 들어가 버린 느낌이었다. 솔이 팔을 축 늘어뜨리자 은겸은 여전히 팔을 활짝 펼친 채로 솔에게로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러자 그의 품에 솔이 딱 알맞게 들어왔다. 솔이 움찔 몸을 물리기 전에 은겸이 조심스레 팔을 굽혔다.
은겸의 품에 안긴 솔은 뒤늦게 그를 밀어내려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등 뒤에 닿는 은겸의 손바닥이 너무도 조심스럽게, 떨리고 있었다. 문득 머릿속에 병실에서 들었던 그의 고백이 떠올랐지만, 솔은 다시금 팔에 힘을 풀었다.
은겸이 지금 하려는 것이 위로라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솔은 가만히 몸에 힘을 풀고 그의 어깨에 이마를 살짝 기대었다. 가끔 하루쯤은 아무 생각도 없이 즐겁기만 하면 안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 솔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얕게 떨리던 은겸의 손바닥이 천천히 솔의 등을 쓰다듬었다.
“혼났어?”
“아뇨.”
“그런데 왜 여기서 혼자 울고 있어?”
“안 울었어요.”
솔은 은겸의 위로를 받으며 눈동자를 데굴 굴려 보았다. 눈가를 뻑뻑하게 만들었던 열기는 가라앉은 지 오래였지만 혹여 아직 붉은 기가 남아 있진 않나 눈동자를 요리조리 움직였다.
눈가의 열기는 점차 가라앉는데 이제는 두 뺨이 발그레하게 열이 올랐다. 새삼 이제 와 지금, 이 자세가 얼마나 낯뜨거운지, 솔의 얼굴이 점점 붉게 익어 가고 있었다. 이내 얼굴에 퍼진 열기는 점차 아래로 내려가 어깨와 어깨가 맞닿은 부분이, 그의 손이 닿은 등이 홧홧해지기 시작했다. 솔이 꼼지락거리자 은겸은 그가 더 민망함을 느끼기 전에 분위기를 바꿨다.
오히려 더 와락 세게 끌어안고 좌우로 몸을 흔들었다. 장난감처럼 꽉 끌어 안겨 좌우로 뒤뚱거리게 된 솔은 당황해 바보처럼 ‘어어?’ 하는 소리를 내었다. 은겸은 목울대를 울리며 시원스레 웃으며 그를 끌어안고 빙글빙글 제자리를 한 바퀴 돌았다. 그의 장난 때문에 솔은 조금 전 느꼈던 간질간질했던 감각도 잊고 펭귄처럼 뒤뚱거렸다.
그렇게 두 바퀴를 돌았을까, 은겸이 솔을 끌어안았던 두 팔을 거두고 눈을 마주쳤다. 솔이 숨기려 했지만 붉어진 눈시울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두 뺨까지 같이 달아올라 안 울었다는 말과 달리 코끝까지 불그스름해 은겸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바람 좀 쐬고 올까?”
“그럴래요.”
은겸의 제안에 솔은 연습실 방향을 흘긋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태오를 마주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보단 아이처럼 엉엉 울어 버릴 것 같았다. 솔은 은겸을 따라 지하층을 벗어났다.
아무리 인적이 드문 야심한 시간이라지만 얼굴을 드러내 놓고 거리를 거닐 정도는 아니었다. 은겸은 회사 복도에 놓여 있는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솔과 함께 옥상 정원에서 바람을 쐬었다. 아직 쌀쌀한 바람이 불긴 하지만 그래도 한겨울처럼 살을 에는 바람은 아니었다.
솔은 낭만적으로 별이 빛나지는 않지만 반쯤 찌그러진 달이 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찬 기운이 남은 바람이 코와 폐 속에 가득 들어차며 조금 후련한 기분이 되었다.
“기분 좀 나아졌어?”
“네. 여기 처음 와 봐요.”
“여기, 나랑 대표님 욕하러 오는 곳이잖아.”
“형을요?”
“아니다, 나보다 루카 욕을 더 많이 하려나.”
은겸이 피식 웃으며 하는 말에 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자 그는 정말 빈말이 아니라 익히 들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루카 걔는 DM 막으면 안 돼?’ 같은, 직원의 푸념을 흉내 냈다.
“그래서 뭐가 잘 안 풀려서 그렇게 속상한 얼굴이었어?”
“…….”
“어허, 나 좀 이용해 먹으라니까.”
솔이 대답 대신 모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으니 은겸이 엄하기는커녕 평소보다도 더 다정하고 부드러운 얼굴로 으름장을 놓았다.
“나름 이 바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선배님이라고.”
솔과 눈이 마주치자 은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여유 있어 보이는 그의 행동에 솔은 어물쩍 웃으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방송은…. 그러니까, 일이잖아요. 그럴 상황이 아닌데, 내 상황이 여의찮은데 일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때가 있겠죠?”
“그렇지.”
“그럴 땐 어떻게 해야 맞는 걸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솔의 말을 듣던 은겸은 그의 질문에 무슨 명탐정처럼 턱을 짚고 ‘음….’ 하는 소리를 내었다. 심각하게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눈웃음을 치며 시원하면서도 허탈한 답을 내놓았다.
“뭐, 어떤 상황이냐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다르겠지. 책임감으로 모든 걸 꾹 인내하고 하는 사람도 있고…. 무얼 더 중요하게 여기느냐에 차이지 맞고 틀리고는 없어.”
그의 고민이 길어지자 얼굴을 굳혔던 솔은 돌아온 대답에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솔이 웃으며 그를 흘깃 올려다보자 은겸은 팔을 슬쩍 빼 팔꿈치로 솔의 옆구리를 툭 쳤다.
“뭐든 알려 줄 것처럼 말하고선 결국 너 알아서 하라는 소리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은겸은 더 멋진 답을 내놓지 못한 자신에게 속으로 한숨을 내뱉으며 슬쩍 솔을 떠보았다. 하지만 솔은 그런 은겸이 무색하게 활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밝게 탈색된 은발의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살랑거렸다.
“아니요. 그냥, 형은 늘 제가 듣고 싶었던, 듣기 좋은 말을 항상 해 주는 거 같아서요.”
“내가?”
“네. 엄하게 ‘해야 해, 해!’ 이런 게 아니라 어떤 쪽이든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선택하라고 하니까요.”
‘해야 해.’, ‘해.’라는 말을 하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 은겸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왜인지 솔이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태오가 솔에게 강압적으로 굴었던 적은 없지만 은겸에게 태오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찌 되었든 제 칭찬을 해 주는 솔의 말에 은겸은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이내 참지 못하고 그는 활짝,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소리 없이 한껏 웃음 지었다. 숨기지 못할 만큼 웃음이 나와 은겸은 솔에게서 시선을 돌려 괜히 애꿎은 달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윤태오 못지않게 엄한 사람인데, 역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어쩔 수가 없나.”
은겸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로 능청을 떨었다. 그의 말에 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겸을 바라보았다. 은겸도 솔과 눈을 마주치곤 장난스레 눈을 찡긋거려 보였다. 장난이 가득한 다정한 얼굴에 솔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뭐예요.”
“뭐긴. 내 고백이 조금도 안 먹는 거 같아서, 잠깐 어필한 거지.”
“그런 말 안 해도 기억하고 있어요.”
다시 정면을 바라본 은겸이 슬쩍 몸을 기울여 솔의 어깨와 제 어깨를 맞닿게 했다. 어깨에 닿는 단단한 감촉이 나쁘지 않았지만 조금 멋쩍어져 솔은 샐쭉하며 그를 흘끔 곁눈질했다. 퇴원한 이후로 솔의 표정이 한결 좋아졌다. 다채로워졌다고 해야 할까, 특유의 서늘한 분위기는 남아 있었지만, 전에는 인형 같은 느낌이 강했다면 요즘엔 그런 뚝딱이는 느낌이 한결 줄어들었다.
매일같이 만날 수 없는 은겸은 이렇게 한 번씩 솔을 마주칠 때마다 달라지는 그의 모습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새삼 자신이 밝고 화사한 미인을 좋아했었나 취향을 재확인하고 있는 중이었다.
은겸은 고개를 돌려 솔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솔은 목을 길게 빼고 모호하게 찌그러진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얗게 드러난 긴 목이 추워 보여 얼굴을 파묻어 보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은겸은 천천히 솔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고작 어깨만 맞닿았던, 자그마한 면적이 점점 넓어졌다. 어깨에서 팔꿈치까지, 팔꿈치에서 이내 허벅지와 무릎까지. 몸을 눌러 오는 무게감에 뒤늦게 솔이 은겸을 바라보았다.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는지. 숨결이 닿을 만큼 서로 가까워져 있었다. 가까이서 본 은겸의 눈동자는 놀랍도록 갈색이었다. 어두운 밤임에도 그 다정한 눈동자만큼은 왜 이리도 선명하게 보이는지.
솔은 다시금 눈치 없는 제 심장이 펑펑 뛰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입이 말라 그는 크게 꼴깍 소리가 나도록 마른침을 삼켰다. 입을 열면 심장이 떨어질 것 같아 솔은 그저 마른침만 삼키며 눈을 끔뻑이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대로 더 가까워지면 그대로 입술과 입술이 맞닿을 것 같았다. 솔은 용기를 내어 은겸을 불렀다.
“은겸 형…?”
그러자 은겸의 다정한 눈가가 활짝 휘었다. 애매하게 찌그러진 달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고운 반달을 그렸다.
“추워 보인다. 이제 들어갈까?”
아무렇지 않게 다정한 웃음을 머금은 은겸은 그렇게 말하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은겸이 멀어지자 바람막이가 사라진 탓일까. 그의 말처럼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솔은 몸을 살짝 움츠렸다.
솔은 주춤주춤 벤치에서 일어나며 은겸 몰래 뒤돌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전히 심장이 진정하지 못하고 방방 날뛰고 있었다. 은겸에겐 아무렇지 않은 장난이었을지 모르지만, 한동안 사람과 애정에서 멀어져 있었던 솔에겐 고민을 싹 날려 버릴 정도로 너무도 큰 자극이었다. 솔은 ‘분명 자신이 좋아하는 건 태오인데….’ 하며 괜히 가슴을 주먹으로 두들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