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154화 (154/192)

#154

퇴원하고, 신인 개발 팀을 비롯한 회사 관계자들과 솔은 짧은 만남을 가졌다. 다들 왜 진작 솔에게 솔직히 사정을 말하지 않았느냐 한마디 하긴 했지만, 별일 없이 무난하게 넘어갔다. 솔이 각오했던 것보단 유순한 반응이었다.

다시금 모든 일들이 본래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생방송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회의를 하고, 곡을 고르고 어떤 방향으로 무대를 구성할 것인지 의견을 낸다. 이젠 이런 것들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멤버들의 걱정도 사그라들고 무대 준비도 착착 잘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촬영 팀이 찾아와 연습하는 모습과 인터뷰, 회사에서 생활하는 모습 일부를 찍어 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작은 마찰도 있었다.

잠깐 ‘<마아스> 참가자 녹화 중 결국 쓰러져’ 이런 제목의 기사가 뜨며 응급실에 실려 간 당사자가 솔임이 밝혀졌는데 반응은 정확히 반반이었다. 인터넷 기사 맨 아래에는 마음고생, 육체적 고생 여러모로 힘들었나 보다 하며 솔을 걱정하고 안쓰러워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어그로나 불쌍한 척한다는 모진 말들도 더러 있었다. 솔의 건강 문제에 대해서 인지한 탓도 있지만 회사는 대중의 반응에 이전과 달리 꽤 신경을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촬영하러 회사에 방문한 제작진과 작은 마찰이 있기도 했다.

방송에서 비쳐지는 솔과 멤버들의 이미지에 관한 논의를 한 듯싶었지만 잘 풀리지 않았는지 영호가 연신 고개를 내저으며 역시 나가는 게 아니었다는 말만 중얼거렸다. 한숨을 푹 내쉬던 영호는 솔과 눈이 마주치자 ‘형이 미안하다.’라는 말을 하며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득용이 SNS로 해명하자 했던 아이디어는 회사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해명되기보단 오히려 SNS 활동으로 솔과 멤버들이 악의적인 반응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더 우려된다는 말이 돌아왔다.

후에 은겸을 통해 들어 보니 제작진 측에게선 도리어 솔을 비롯한 멤버들에게 화제성을 몰아주려 하는 거라며 싫은 기색을 비쳤다고 했다. 솔은 여전히 은겸에게 그 무엇도 부탁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은겸은 회사를 통해 꾸준히 솔과 솔의 주변을 살피고 있는 듯했다.

모든 것이 정상의 궤도를 찾아가는 것만 같았다. 딱 한 가지만 빼고 말이었다. 병원에서 나온 날을 기점으로 다시는 떠오르지 않는 로그인 보상 창. 솔이 이 세계에 휩쓸려 온 그 시작을 알렸던 민트색의 반짝이던 창이 다시 나타나질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태 창이나 다른 창을 열어 보았지만 로그인 보상 창을 제외하고는 모두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이제 이것들에 익숙해지던 참인데 갑자기 생긴 변화에 솔은 불안감을 느꼈다. 당장 매일같이 로그인 보상으로 받던 아이템들이 제일로 걱정이었다.

앞으로 있을 생방송에선 얼마나 많은 포션이 필요할지 가늠도 되지 않고 하나가 아쉬운 때인데, 매일 받던 로그인 보상이 없으니 솔이 불안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두 번째로는 이 변화가 무얼 의미하는 건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어느 날 이렇게 갑자기 상태 창도 뜨지 않는다면? 나아가 모든 게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면? 생각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다행인 점은 그 불안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제대로 된 진료를 거쳐 처방된 약물을 복용하고 나면 불안증이 가라앉고 상태 창과 아이템 같은 것이 없어도 잘 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망각할 수 있었다. 알약 몇 개를 삼키는 걸로 오랫동안 끙끙 앓았던 많은 것들이 한결 쉬워졌다.

덕분에 연습이나 촬영하다 보면 떠오르던 트라우마 알림과 경고 창도 서서히 솔에게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불안했던 마음도 잠시, 솔은 민트색 창이 떠오르지 않는 삶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그런 창이 없는 삶이 지극히 정상적인 삶이었다.

병원에서 나온 이후로 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갔다. 생방송 무대에서부터는 백댄서를 세울 수 있었고 무대 위에 거창한 소품도 들일 수 있었다. 짤막하지만 스토리를 부여해 영상까지도 제작할 수 있다 보니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아졌다. 이제부턴 단순히 연습생들 간의 경쟁이 아니라 어느 정도 회사의 지원이 들어가야 했다.

그러다 보니 이번엔 컨셉 뽑기를 우선으로 해야 했다. 컨셉이 정해져야 도와주실 분들이 그 컨셉에 맞춰 움직일 테니 말이었다. 지난 미션 성공의 보상을 받은 상자를 열어 모든 티켓을 쏟아부었다. 가지고 있는 골든 티켓을 모두 소모해 셔츠가 없이 재킷만 있는 와인색 정장에 온갖 금장 장식과 휘장이 주렁주렁 달린 의상을 골랐다.

생방송 무대의 주제는 팀을 가장 잘 나타내는 곡이었다. 선곡 과정에서 꽤 여러 의견이 나왔는데 지호는 TEAM ONE이 보컬에 강한 팀이라 생각했고 태오는 춤에 강하다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조율 끝에 멤버들은 다소 기계음이 강한 남자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고르게 되었는데, 후렴구의 음이 굉장히 높아 지호와 가람을 제외하고는 다들 어려워했다.

악보를 받아 가사를 외우던 솔은 고개를 몇 번이고 갸웃거렸다. 중간중간 중이병인가 싶을 만한 단어들이 박혀 있었는데 솔이 물으니 지호가 웃으며 자고로 남자 아이돌이라면 한 번쯤 이런 세상에 반항적인 노래를 해 봐야 한다는 이상한 말을 했다.

살짝 생각을 내려놓고 중독적인 멜로디를 따라 노래를 부르다 보면 만화 속 주인공처럼 어둠을 물리치고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는 했다. 반항적인 가사라기보다는 저항적인 가사라 보는 게 맞을 듯싶었다.

솔은 후렴구의 ‘넌 보이는 그대로를 믿으면 돼. 무엇을 보든 넌 날 좋아하게 될 거야.’라는 가사가 좋았다. 네가 보고 싶어 하는 그 모습으로 빛날 사람이 바로 나라는 자신감이 넘치는 노래였다. 솔은 노래를 연습하며 흘깃 태오를 곁눈질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다 순항한다 생각되었다. 모두가 함께 고른 이 노래처럼 그 어떤 난관에도 무너지지 않을 마음을 가지고 빛나는 길을 따라가고 있다고 느껴졌다.

늦은 밤, 영호가 숙소로 들이닥쳐 태오를 불러 데리고 나갈 때까지 말이었다. 새벽 3시쯤, 연습을 끝내고 간신히 침대에 몸을 뉘자마자 영호가 태오를 데리고 나가 다음 날 늦은 시간이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멤버들 모두 가타부타 무슨 일이냐 묻지는 않고 침묵을 지켰다.

대충 짐작되는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조금은 소홀해져 버린 여동생 말이었다. 그렇게 리더인 태오가 빠진 연습이 며칠이고 반복되었다.

단언컨대 멤버 모두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태오를 걱정했다. 새벽녘, 커다란 그가 마치 물먹은 솜처럼 축 처져 들어와 소파에 앉아 잠 한숨을 들지 못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멤버들은 설령 이번 무대에 태오가 아예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혹은 탈락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처진 어깨가 너무도 무거워 보여 솔을 포함한 그 누구도 함부로 성급한 위로도 건네지 못했다. 그저 그에게 가족과 함께할 시간이 조금 더 남아 있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해 줄 뿐이었다. 맏형인 지호가 태오의 빈자리를 메워 연습은 계속되었다.

생방송 무대까지 며칠이나 남았을까, 코러스 녹음차 녹음실에 올라갔다 내려온 솔과 멤버들은 연습실에 앉아 몸을 풀고 있는 태오를 마주했다. 며칠 사이에 얼굴이 정말 반쪽이 되어 있었다. 가뜩이나 작은 얼굴이었는데 눈에 띄게 수척해지며 짙은 인상이 한결 더 선이 굵고 깊어져 보였다.

무슨 말이든 해 주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누구도 선뜻 말을 건네지 못했다. 가장 오랜 친구인 가람이 그의 등을 손으로 살짝 툭, 치는 것이 전부였다. 태오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굴었다.

아니, 오히려 영호와 함께 그 새벽 숙소를 나설 때보다 더 지독한 연습 벌레가 되었다. 모두가 녹초가 되어 숙소로 돌아갈 때도 태오는 그간 연습에 참여하지 못한 공백을 메워야 한다며 날이 밝을 때까지 연습실의 불을 밝혔다. 지호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조심스레 말했지만, 태오는 단호했다.

태오에게 아무 말도 해 줄 수 없지만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솔도 태오와 함께 밤샘을 자청했다. 졸음을 쫓으려 화장실에 다녀온 솔은 우연히 연습실에서 태오와 영호가 나누는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다.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태오야.”

“혹시라도 무대에 있을 때 그런 연락이 오면…. 알려 주지 마세요. 다, 무대가 다 끝나고 나면. 제가 무대에서 내려오고 나면 그때 알려 주세요.”

“태오야. 너 그러다 후회해.”

“아니요. 형. 충분히 오래 생각하고 고민한 일이에요.”

무엇을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는 것인지, 주어는 없었지만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태오는 지금 촬영 중에 제 동생이 떠나는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솔은 말문이 턱 막혀 숨을 죽이고 복도에 등을 기댔다.

“태오야... 나는…. 하, 형은 그렇게 못하겠다.”

말문이 막힌 건 영호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고는 태오의 부탁에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태오는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수척해진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과 달리 태오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다른 멤버들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 주셔야 해요. 저뿐만 아니라 솔이도, 가람이도 다들 알게 되면 제대로 방송 못 할 거예요.”

태오의 답변에 솔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애꿎은 바닥을 발로 찼다. 이런 상황에서도 윤태오는 지독하게도 저와 다른 멤버들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의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영호는 이마를 부여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갓 스물이 된 주제에 태오는 세상 무거운 짐은 다 짊어지고 있었다.

“저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다 끝냈어요. 갑작스럽다곤 할 수 없는 시간이었으니까요.”

문 틈새로 새어 나오는 태오의 목소리는 지독하리만치 덤덤했지만, 그 목소리에 솔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의 말처럼 마음의 준비를 끝내서, 각오한 일이 닥쳐와 덤덤한 목소리라기엔 너무도 슬펐다. 침착하고 낮은 저음. 무거운 그의 목소리는 오히려 하얗게 타버린 재같이 자그마한 바람에도 홀연히 흩날려 사라질 것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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