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솔은 다음 날 이른 오전부터 찾아온 멤버들과 영호에게 제 상태에 대해 이실직고했다. 태오에게 도와 달라 한 부탁이 무색하게 가람이 대뜸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모두가 덩달아 눈물을 훔쳐야 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고 설마 그런 거 때문에 회사가 계약 파기할까 그랬냐며 타박하던 영호도 줄줄 눈물을 흘리던 가람을 보고선 눈물을 훔쳤다. 아마도 가람 또한 자신의 힘들었던 때가 떠올라 가슴이 쓰렸던 모양이었다.
제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정작 당사자인 솔이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태오가 거들 것도 없었다. 다들 그간 솔이 혼자 거쳐 온 길에, 늦었지만 박수를 보내 주었다. 더불어 미처 알아채지 못해 미안해하기도 했다.
솔의 퇴원은 결국 그렇게 하루 더 미뤄지게 되었다. 회사와 이야기를 끝마친 영호가 솔의 보호자로 진료와 상담을 받게 해 주었고 그간 솔이 덮어 두었던 의료 기록도 그의 허락을 받아 모두 확인했다. 솔에게서 진단서를 받아 든 영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사고 당시 10대였던 솔이었다. 솔은 그날 사고에서 구조되어 치료받은 게 아니라 그냥 그대로, 차에 치여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채로 살아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흐르면 바뀌는 것이 생기기 마련이겠지만 적어도 당장에는 모두 따뜻한 눈길로 솔이 내민 손을 잡아 주었다.
솔의 퇴원이 늦어지며 하루의 휴가를 더 가지게 된 멤버들은 잠깐이나마 저마다 가족에게로 돌아갔다. 혼자 오도카니 병실에 남아 있다 생각하기 무섭게 태오가 병실에 드나들었다. 태오의 가족은 이곳에 있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솔의 병실에 들어오며 태오는 잠시 숨을 돌리러 왔다고 말했다. 솔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태오에게 도움이 된 것 같았고 태오의 피난처가 된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이 벽에 등을 기대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환자들이나 간호사가 복도를 지나가는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조용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조금 지루해질 무렵, 슬슬 저녁 식사 시간쯤이 되었을까 지호가 밀수꾼처럼 무언가를 감추며 병실로 찾아왔다. 지호는 의미심장하게 웃더니 곧바로 멤버들에게 연락을 돌려 깡그리 솔의 병실로 불러 모았다.
집에 다녀왔다던 지호는 집에서 싸 가지고 온 정갈한 음식들을 솔의 앞에 차려 놓았다. 필시 오랜만에 아들이 왔다고 했을 게 분명한 갈비찜, 잡채. 하나같이 잔치 음식들이었다. 병실에 홀로 누워 밋밋한 병원 밥 먹을 솔이 생각나서 모조리 챙겨 왔다며 지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평소 지호가 챙겨 주던 식사와 간이며 맛이 비슷했다. 그런 것 있지 않은가, 그 집의 맛. 그 가족의 맛 같은 것. 썩 먹는 걸 즐기는 솔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느껴 보는 따뜻한 맛에 조금 과식을 했다. 두둑이 배를 채우고 나니 득용이 곧 <아이돌 스타즈>의 방영 시간이라며 호들갑을 떨어 댔다.
그러고는 은근슬쩍 솔의 침상으로 올라오더니 그 커다란 덩치를 아득바득 욱여넣어 솔과 함께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덩치는 저보다 컸지만 득용이는 한참 어린 동생 같을 때가 있었다.
솔은 득용을 꼭 안아 주었다. 이제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적당히 전해지는 온기가 사람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TV가 따로 없는 병실에 가람이 노트북을 펼쳤다. 조금 전까지도 곡 작업에 열중이었는지 화면 가득 솔을 흐린 눈 뜨게 만드는 작곡 프로그램이 펼쳐져 있었다. 얼핏 흘려 본 파일명이 ‘SOL’인 게 조금 신경이 쓰였지만 이내 그가 <아이돌 스타즈>를 틀자 금세 잊혔다. 촬영장에서 익숙하게 듣던 MC의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다.
“오…오와! 오우…!”
쏙, 솔에게 안긴 득용이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뮤직비디오 때도 1화 때도 그랬지만 늘 TV 화면으로 보는 모습은 낯설었다. 정말 그럴듯한 연예인처럼 보이기도 했고 내가 저렇게 생겼던가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만들었다. 득용이 연신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지만 사실 별 내용은 없었다. 그저 다른 팀 순서에 쓰인 지호나 태오의 인터뷰가 나올 때마다 탄성을 내뱉은 것이었다. 그저 형들이 화면에 잡힌다는 걸로도 득용은 좋은 듯했다.
지난번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는데, 솔은 순서가 엉망인 것을 느꼈다. 대면식 촬영할 당시의 인터뷰 내용이 1차 미션에서 쓰이기도 하고 어딘지 뒤죽박죽이었다.
태오나 지호를 비롯한 다른 멤버들처럼 말을 조리 있게, 능숙하게 잘하는 편이 아닌 것도 한몫하지만, 할 말을 찾느라 다소 느릿하게 답하는 솔의 발언들은 제멋대로 잘라 여기저기에 덧붙이기 쉬웠다. 지금 나오는 장면처럼 말이었다.
5조가 7조를 라이벌로 뽑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던 질문에 솔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오죽하면 PD님이 아무 말이나 해 보라고 재촉했었다.
[음….]
화면 속의 솔이 ‘음’만 계속 반복하며 한참 뜸을 들이더니 ‘글쎄요.’라고 말을 끝맺었다. 솔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인터뷰 당시만 해도 명하와 트러블이 있기 전이라 한참 속으로 말을 골랐다. ‘글쎄요.’ 다음이 분명 더 존재했다. ‘저희 멤버들은 정말 잘하는데 저는 아직 부족해서….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두서없고 자신감 없이 맥 빠진 말이었지만 분명 그렇게 솔은 인사를 했었다. 그러고 나서 나름 바른 답변을 했다고 내심 곱씹기도 했다. 심지어 저 질문 자체가 1차 미션이 아니라 대면식 무대 시작 전에 했던 인터뷰였다.
하지만 방송분에선 솔의 뒷말은 뚝 잘리고 ‘글쎄요.’ 하며 어색하게 웃는 모습만이 방영되었다. 솔이 보기에도 제 모습이 아주 미묘했다. 그러고는 바로 뒤이어 관객석에 들어서며 명하와 마주치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저 때는 이미 5조와 화장실에서 사건이 있고 난 뒤라 솔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미묘한 인터뷰와 표정 관리를 못 한 점은 솔의 잘못이긴 했지만 시간의 순서가 다른 두 가지 상황을 뚝 잘라 붙여 놓으니, 마치 솔이 7조를 라이벌이라 발언한 5조를 냉랭하게 비웃고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솔이 당황한 사이 화면은 빠르게 전환되어 무대로 이어졌다. 한복을 입고 춤을 추는 모습은 제법 멋있었다. 자신이 짠 안무를 보고 있자니 묘한 뿌듯함도 느꼈다. 물론 모든 부분에서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제법 잘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화면으로 보니 득용이 삐끗하는 모습이 너무도 또렷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걸로 득용을 나무랄 생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오히려 저 정도로 크게 다치지 않고 넘긴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득용은 제 모습에 안타까운 탄성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커다란 덩치가 노트북 화면을 반쯤 가려 솔도 덩달아 몸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서승훈의 서슬이 퍼런 비평. 막상 무대를 할 때엔 그리 집중해서 잡아 주지 않더니, 비평을 듣는 솔의 모습은 유달리 클로즈업해 보여 주었다.
당시엔 평가에 놀라서 눈과 입을 동그랗게 떴었는데, 솔 특유의 냉랭한 분위기와 맞물려 심사평에 불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금세 기가 죽어 고개를 푹 숙이기는 했으나 이미 멤버들 모두의 표정이 한껏 침울해진 뒤였다.
“이게 다야?”
득용이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불쑥 튀어나온 우렁찬 목소리에 솔이 득용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뒤를 이어 지호도 의문을 제기했다.
“우리 인터뷰는?”
“인터뷰? 어떤 거…?”
조금 전까지 솔도 제 인터뷰 촬영분에 대해 의문을 느낀 터라 두 사람도 같은 부분에서 성을 내는 것 같아 반문했다. 솔이 묻자 득용은 무언가 억울하고 답답하다는 듯이 손짓하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니, 솔이 형 대면식 때 인상 쓴 거 윙크한 거라고 인터뷰했단 말이에요. 작가님이 먼저 물어보셨거든요. 형 어디 다치거나 불편한 거 있냐고, 왜 인상 썼냐고….”
“어. 나도 했는데. 윙크한 거라고 우리 솔이 귀엽죠? 라고 했었는데. 오늘 방영될 줄 알았어.”
“같이 웃고 너무 귀엽다고 꼭 넣어 주겠다고 그러셨었는데….”
득용의 말에 지호도 인상을 쓰며 맞장구를 쳤다. 득용이 풀이 죽어 태오와 가람을 바라보니 이내 가람도 태오도 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나도 그렇게 인터뷰했는데.”
“…나도.”
멤버들 모두가 해당 인터뷰 내용이 오늘 회차에서 방영되고 지난번 1화에서 쌓인 솔에 대한 오해가 풀리기를 기대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지호도 가족과의 식사를 마다하고 멤버들을 모두 불러 모아 같이 방송을 시청한 것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오해를 풀기는커녕 오히려 더 쌓기만 했다.
“나도…. 저렇게 인터뷰 안 했어. 분명 더 노력하겠다고 감사하다고 말했는데.”
“와, 이거 뭐야. 저 지금 열받아요.”
득용이 손바닥으로 연신 부채질했다. 그는 정말 열이 받아 땀이 난다는 듯이 이마를 손등으로 훔쳐 냈다.
“반응은 어때?”
“…….”
가람이 핸드폰을 쥐고 말이 없자 지호가 물었다. 하지만 가람은 지호의 물음에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진 솔이 가람의 핸드폰을 슬쩍 들여다보자 그가 몸을 돌려 피했다.
“나도 볼래.”
“…신경 쓰지 말자. 솔아.”
“보여 줘. 나에 대한 말이잖아.”
가람이 한번 만류했지만, 솔은 단호했다. 모두가 자신을 위해 애쓰고 있는데 제대로 상황을 인지하고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모른 척 밀어 둘 수 없었다. 자신이 개의치 않고 밀어 둔 사이 뒤에선 이렇게 멤버들이 저 대신 해명하려 고군분투하고 있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결과로 시무룩해하고 있고. 이번에는 솔 스스로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고 해결 방안을 찾아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에게 비롯된 일이니.
솔의 단호한 시선에 가람은 멤버들을 빙 둘러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친 태오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가람은 솔에게 제 핸드폰을 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