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150화 (150/192)

#150

한편, 솔과 멤버들을 한 방에 두고 병실을 빠져나온 은겸은 쉽사리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문이 굳게 닫혔지만, 병실 안쪽의 소란스러운 목소리는 벽을 타고 은겸에게까지 닿았다. 벽에 가로막혀 윙윙거리듯 먹먹한 소리가 그의 마음처럼 퍽 답답했다.

은겸은 벽에 등을 기대고 한숨을 푹 쉬었다. 조금 전 병실 안에서 태오나 가람을 비롯한 인물들과 신경전을 여유 넘치게 넘겼던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었다. 제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어 짜증이 확 치솟았다. 그런 식으로 고백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오늘을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솔이 바로 옆에 있는 자신보다도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그리고 그들을 만날 생각에 반짝이며 웃는다는 것이 그의 심사를 뒤틀리게 했다. 다분히 충동적인 고백이었다. 어른스럽지 못했고 유치한 짓거리였다. 그런 질투로 가볍게 입에 담기에는 무거운 감정이었다.

은겸은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며 벽에 기대었던 등을 바로 세웠다. 때마침 복도를 가로질러 다가오는 제 로드 매니저와 영호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제 행동에 후회를 하면서도, 적어도 지금 저 병실 안에서 저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 제 생각하길. 적어도 오늘 하루 정도는 폭탄을 떠안긴 자신을 어떤 식으로든 생각하겠지. 그것을 위안 삼아 은겸은 제 로드 매니저와 함께 병원을 떠났다.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은겸에 대한 주제는 생각보다 쉽게 마무리되었다. 영호가 병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숙소로 돌아가라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솔이도 쉬고 너희도 쉬고 나도 쉬자.’ 그 한마디에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은겸에 대한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가람의 표정이 썩 밝지 않았지만, 솔은 그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몸 상태가 여전히 피곤한 것도 사실이었고 가람보다는 지금 제 심장의 기능을 자꾸만 폭주시키는 두 남자에 대해 생각하기도 벅찼다. 가기 싫다고 병실에서 자면 안 되냐 묻는 득용을 억지로 끌어내는 영호의 모습에 아쉽다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정신없이 만들던 사람들이 사라지니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잠이 다시 몰려오기 시작했다.

영호와 태오의 말대로 몸은 여전히 피로를 호소하고 있었고 잠이 필요한 듯했다. 솔은 가람이 덮어 준 이불을 더욱 끌어당겨 몸을 웅크리며 그간 봐 왔던 은겸의 모습을 곱씹어 보았다. 은겸이나 태오나, 자신은 아무래도 제게 다정하고 살뜰하게 챙겨 주는 이에게 끌리는 걸까? 가람이 알면 서운할 일이었다. 단순히 그렇게 치부하기엔 가람도 그 두 사람 못지않게 솔에게 열심이었다.

무슨 차이일까. 정말 단순하게 외모인가? 싶다가도 오히려 그 부분에 관해선 태오와 은겸이 서로 정반대의 생김새를 가져 그마저도 아니었다. 그간 은겸이 제게 해 주었던 말과 행동들을 되새김하다 보니 까무룩 잠이 찾아왔다. 편할 리가 없는 병원 침상의 베개가 포근한 거위 털 베개처럼 느껴질 정도로 솔은 다시금 편안한 잠에 빠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도 밖은 여전히 어둑어둑했다. 병실의 불을 간호사 선생님들이 꺼 주셨는지, 문틈 사이로 환한 복도의 불빛이 스며들었다. 태오와 은겸, 가람에 대한 생각을 하다 잠들어서 세 사람이 나오는 꿈을 꾼 것 같은데 눈을 뜨고 나니 기억이 나지 않았다.

흠칫, 솔은 근래 들어 잊고 있었던 제 기억력 문제를 상기시키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태오를 좋아하고 은겸 형과 가람이는 날 좋아하고. 하지만 난 가람이는 거부하고 은겸 형은….’

정리하다 보니 개판 오 분 전인 삼각관계였다. 꼭 무용 학원 쉬는 시간에 흘려듣던 선배들의 연애사 같은 일이었다. 한정된 공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어린 발레리노와 발레리나 사이의 아침 드라마 같은 매운 사랑 이야기가 펼쳐지기도 했었다. 남의 이야기라 멀찍이 떨어져 그저 그런 일도 있구나 하고 넘겼었는데, 이젠 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정리하다 보니 결국 솔 자신은 태오와 은겸에게 마음이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었다. 그렇지 않은가? 가람에겐 철렁했던 마음이 은겸에겐 떨렸다면 결국 자신은 태오와 은겸 모두를 좋아하고 있는 것 아닌가. 새삼 자신이 그리 쉽게 이 사람 저 사람 좋아하는 바람둥이의 기질이 있나 싶었다.

침상에서 일어나 앉아 한숨을 푹 내쉬고 있자니, 테이블 위에 세면도구가 눈에 들어왔다. 영호가 멤버들을 데려다주며 필요한 것이 없냐 묻길래 씻고 싶다고 얘기했더니 세면도구를 챙겨 와 준 모양이었다. 영양제 수액도 진즉 다 맞았는지, 주삿바늘도 제거되어 있었다.

솔은 괜찮겠지, 싶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누워 있거나 앉아 있을 때와 달리 두 다리를 딛고 일어서니 몸이 바람에 부대끼는 얇은 나뭇가지처럼 휘적거렸다. 천천히 벽을 짚으며 병실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가니 어설프게 메이크업을 지워 여기저기 얼룩덜룩하게 번진 구석이 가득한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대충이나마 세수하고, 딱딱하게 굳어 버린 머리도 임시로나마 설렁설렁 씻어 냈다. 대충이었지만 그래도 한층 상쾌한 기분이었다. 딱, 지금 이대로 바람 한번 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쾌한 바람이 필요했다.

솔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냥 생각이 이끄는 대로 발을 끌어 병실을 나섰다. 시계를 보고 나올 걸, 늦은 시간이지만 데스크가 놓인 복도는 불이 환했다. 야간이건 주간이건 가릴 것 없이 바쁜 간호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솔은 설렁설렁 걸어 병동을 빠져나갔다. 밖에 나갈 엄두는 나지 않아 어슬렁어슬렁 대기실로 보이는 공간을 천천히 산책하듯 돌았다. 같은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찬 기운이 돌아서일까, 제법 상쾌한 기분이 났다.

대기실에 틀어져 있는 TV에서 은겸이 나왔다. 음소거가 되어 있어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익숙한 의상을 걸친 은겸은 예능으로 보이는 프로그램에서 멋지게 웃고 있었다. 퇴근 후에 그가 지방으로 가는 중이라며 보냈던 셀카 중에 저런 의상을 입은 사진이 있었다. 아마도 1~2주 정도 지났을 것이었다. 멍하니, 화면 속의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음소거임에도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왜 나와 있어?”

조용한 대기실을 울리는 저음의 목소리에 솔은 화들짝 시선을 옮겼다. 엘리베이터 앞에 태오가 서 있었다.

“어? 안 갔어?”

분명 영호와 멤버들과 함께 제 병실을 나섰던 태오였다. 복장도 편한 차림이고 메이크업의 흔적도 말끔히 지워 낸 것이 숙소에 들렀다가 다시 온 모양이었다. 솔이 의문을 표하자 태오는 대기실의 많은 빈 의자 중 한 자리에 앉았다.

“동생이 여기 있어.”

태오의 나지막한 그 한마디에 솔은 그와 눈을 맞추곤 옆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어째 과로로 쓰러졌다는 저보다 태오가 더 지쳐 보였다. 솔이 옆에 앉자 태오는 사고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한 어머니가 전적으로 여동생을 간호하고 있다 보니 잠시나마 숨이라도 돌릴 수 있게 쉬게 해 드리려 다시 왔다 말했다.

오늘도 그의 어깨가 무거워 보였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으니 솔의 팔과 그의 팔꿈치가 살짝 맞닿았다. 이대로 몸에 힘을 풀고 태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무거워 보이는 그의 어깨에 저라는 짐을 더 얹는 기분이라 솔은 말없이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MC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화면 속 은겸이 환하게 웃었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화면 속에서 환하게 웃는 은겸과 달리 둘만 남은 대기실의 분위기는 그리 밝지 못했다. 태오가 워낙 말수가 적은 편이기도 했지만, 서로가 조심스러워서 며칠간 태오와 제대로 대화 같은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솔은 아무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동생은 좀 어때?”

병원에 둘이 앉아 있기도 했고 때마침 그가 병원에 다시 온 목적이기에 솔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급 자체가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스럽긴 했지만 사실 궁금하기도 했다. 이토록 지쳐 있는 태오이지만, 따지고 보자면 동생이 그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태오에 대해, 그리고 그가 다정하게 바라보고 아끼는,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었다.

“…볼래?”

“어?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서 직접 보여 주진 못하고….”

조심스러웠던 솔의 목소리와 달리 태오는 덤덤한 눈으로 솔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솔이 어리둥절해하자 태오가 설명을 덧붙였다. 태오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곤 갤러리를 하염없이 스크롤했다.

연습하며 대열과 동작 확인용으로 찍은 수많은 사진들을 지나치고 지나쳐 갤러리 앨범의 맨 끝에 다다라서야 그를 똑 닮은 소녀의 사진이 보였다. 사진 속의 소녀는 교복을 입고 자신과 똑 닮은 태오와 함께 서 있었다. 무언가가 불만인지 둘 다 뚱한 표정이었다. 짙은 눈썹에 늘씬한 체형. 누가 봐도 가족인 걸 숨길 수 없을 만큼 닮아 있었다.

태오가 넘긴 수많은 사진만큼의 시간이 흐른 것이다. 마지막으로 동생과 저리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은 후로. 얼마나 길고 어두운 시간이었을지, 그가 넘긴 무수히 많은 사진과 동영상으로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자신은 모든 것을 지워 버려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남은 것이 없는데, 태오는 매일을 기록했다. 그가 노력해 온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솔은 어쩐지 가슴이 콱 막힌 듯 먹먹해져 왔다.

“태오 너랑 정말 닮았다.”

“전에는 그 말 싫어했어.”

솔의 감상에 태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싫진 않았는데. 동생이 싫다고 그러니까 나도 같이 질색했어.”

서로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억지로 찍은 사진처럼 뚱한 표정과 태오의 그 말이 맞물려 여느 남매와 다름없는 평범한 여동생과 오빠 같아 보였다. 그런 태오의 모습이 신기했고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자신이 태오에 대해 알고 싶어 하고 그에 대해 공유하고 공감하고 싶은 것처럼 태오도 저에게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은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살짝 적셨다. 붉어진 입술이 여전히 불편한 감각이었다. 그러곤 천천히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말을 끄집어냈다.

“나는 겨울 바다를 좋아해. 바다에 들어가는 건 싫고 보는 것만 좋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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