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뭐야, 뭐지?”
당황한 득용의 입에서 대뜸 반말이 튀어나왔다. 뒤따라 들어온 가람과 지호가 ‘뭐가?’ 하며 커다란 덩치의 득용을 슬쩍 옆으로 밀어냈다. 그제야 두 사람에게도 솔의 옆에 서 있는 은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움찔하며 서로 거리를 벌렸다 하나 여전히 제삼자가 보기엔 턱없이 가까운 거리였다. 가람의 표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와락 구겨졌다.
촬영을 끝내자마자 숨도 고르지 않고 솔에게로 왔는지, 헤어며 메이크업이며 무대에 올랐던 그대로라 전등불을 받아 다들 반짝거렸다. 병실까지 오는 길에 제법 시선이 몰렸을 듯했다. 그런 멤버들의 등장에도 솔은 침상 옆에 서 있는 은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입까지 멍하니 벌리고 그를 올려다보니 은겸이 살짝 눈을 찡긋해 보였다.
흠잡을 곳 없는 멋진 모습이었다. 영화에서 첫사랑으로 나올 법한 그런 모습. 솔은 떨리는 손가락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이내 마지막 태오까지 병실 안으로 들어오자 은겸은 기다렸다는 듯이 솔의 부어오른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톡 건드리며 말했다.
“작은 거라도, 사소한 거도 괜찮으니까. 알았지?”
충격적인 말을 들은 터라 그가 앞서 무슨 말을 했었는지를 잊어버렸다. 은겸이 자길 좋아한다니.
“연락할게.”
솔이 얼빠진 얼굴로 그저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만 보자 은겸은 씩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아주 여유 있게 연락한다는 말을 남기고 솔에게서 돌아섰다. 무표정을 넘어서서 땅굴이라도 파고 들어갈 정도로 어둑해진 얼굴의 태오와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가람. 웃고 있지만 적의가 가득한 지호와 여전히 ‘엥?’ 해 대고 있는 득용의 얼굴이 은겸의 눈에 들어왔다.
“후배들, 고생하는 건 알겠는데, 솔이한테 더 신경 쓰는 게 어떨까.”
“…….”
솔을 등지고 선 은겸은 영 좋지 않은 표정의 멤버들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솔에게 보여 주었던 다정하고 멋진 미소와 달리 비릿하게 비틀린 웃음이었다. 매사 느긋하던 가람의 얼굴에 모처럼 여유가 사라졌다. 느른한 눈가에도 힘이 바짝 들어갔다. 연습하는 태오처럼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가람은 아무 말 없이 은겸을 빤히 노려보았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은겸이 그런 가람을 마주 응시하자 일행의 맨 뒤에 서 있던 태오가 가람의 앞으로 나오며 먼저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자 다른 멤버들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설렁설렁 고개만 까딱거렸다. 하기 싫은데 마지못해 하는 티가 역력했다. 하지만 은겸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시선이 그를 즐겁게 했다. 놀란 듯 벙찐 솔의 얼굴이 계속 머릿속에 어른거려 눈엣가시 같은 것들이 앞에서 뭔 짓거리를 하든 아무렇지 않았다.
“어쩐 일이긴.”
태오의 인사를 대충 손을 휘저어 받은 은겸은 고개를 살짝 까딱거리며 대답을 흘려보냈다. 그러고는 언제 얄밉게 웃었냐는 듯,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환히 웃으며 솔을 돌아보았다.
“갈게. 쉬어.”
“네…. 네에.”
아주 개운하다는 듯이 활짝 웃은 그는 천진난만하게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그 모습에 여전히 넋이 나간 솔은 고개를 설렁설렁 흔들었다. 은겸이 태연하게 병실을 떠나자 일순 정적이 찾아왔다.
“혀어어엉!”
역시나 정적을 깬 건 득용이었다. 불청객이 사라지자 득용은 두 팔을 벌리고 솔에게로 안겼다. 정확히는 안기려 했지만, 솔에 닿기 전에 지호가 덥석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지호에게 잡혀 솔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득용은 커다란 덩치에 맞지 않게 두 손을 모으고 울상을 지었다.
“형, 괜찮아요?”
“응. 괜찮아. 다들 놀랐지. 미안.”
솔이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그제야 지호가 움켜잡은 득용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손이 떨어지기 무섭게 쪼르르 솔의 옆으로 다가온 득용은 어리광을 부렸다. 퍽 과장된 행동이었지만 실제로 득용은 꽤 놀랐고 솔이 영호와 함께 구급차를 타고 빠져나간 뒤에도 쉬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잠시 촬영이 중지되고 대기실에 있는 동안 득용은 내내 ‘어떡해요?’라는 말만 되풀이해서 지호가 한참을 달래 주어야 했다.
괜찮다는 말과 달리 솔이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누가 봐도 컨디션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앉아 이야기하고 슬프게나마 웃는 것을 보니 멤버들 모두 마음이 한시름 놓였다.
“참, 형 우리 1등 했어요. 완전 칭찬 많이 받았어요. 솔이 형이 있었어야 했는데….”
활기차게 말을 시작했던 득용이 솔이 쓰러졌던 때를 되새김하는지 급격하게 텐션이 축 처졌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솔은 아직 은겸이 던진 말에 대한 여파가 미처 가시기 전임에도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끌어 올렸다. 조금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솔은 득용에게 웃으며 물었다.
“다행이다. 우리 그러면 이제 생방송 나가는 거야?”
“당연하죠. 우리가 예선 1위로 진출하는 거라고요.”
“나 때문에 분위기 이상해지진 않았고?”
“이상해지긴요. 심사 위원 선생님들도 다 걱정하시죠. 괜찮냐고, 걱정되겠다고.”
솔이 조금이나마 밝은 모습을 보여 주자 그제야 득용은 으쓱거리며 의기양양하게 굴었다. 밝아지는 분위기에 지호도 가람도, 태오도 하나둘씩 솔의 침상 옆으로 모여들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아니고 병상을 하나 두고 키가 멀끔하니 큰 남성들이 삼삼오오 빙 둘러섰다.
“김득용 울었어.”
“울었어?”
“아, 안 울었어요.”
“울먹거리면서 솔이 형이…. 이러던데.”
지호가 장난스레 어깨를 들썩이며 훌쩍이는 시늉을 하자 득용이 아이처럼 생떼를 부렸다. 솔은 심통을 내는 득용의 팔을 잡고 얼러 주면서 은겸이 사라진 병실 문 쪽을 흘깃거렸다. 은겸이 저를 좋아한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오히려 피곤해하고 한심해하지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그에게 듣고 나니 그간 은겸의 행동들이 이해가 갔다.
간식거리를 들고 연습실에 찾아온다거나, 선뜻 단순한 호의라고 보기엔 더 큰 도움을 내밀었던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지나치게 다정했던 은겸이었다. 조금 전에 그가 귓가에 속삭였을 땐 정말 심장이 터져 나가는 줄만 알았다. 다시금 그 상황을 떠올리자 솔은 입이 바싹 타들어 침을 크게 꼴깍 삼켰다.
왜 이리 목이 타는 걸까. 솔은 저도 모르게 혀를 빼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그가 부었다며 건드렸던 그 자리를 붉은 혀가 스치고 지나갔다. 정확히 이것과 같은 느낌을 태오에게서 받았었다. 혼란스러웠다.
은겸의 고백은 놀라운 일이었지만 더 놀라운 건 가람의 마음을 확인했을 때처럼 두려움과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의 고백을 듣고 나선, 마치 태오를 향했던 감정처럼 심장이 뛰고 열이 오른다는 것이 솔을 혼란스럽게 했다. 분명 자신이 좋아하는 건 윤태오인데, 왜 은겸의 고백에 심장이 뛴단 말인가.
혹 아직도 주환의 그림자를 그에게 보고 있어서? 은겸은 은겸이었다. 그리고 이젠 더 이상 주환을 그리워하지도 떠올리지도 않았다. 제 감정인데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어렵다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솔이 형! 듣고 있어요?”
득용이 솔의 손을 조심스레 흔들었다. 은겸에 대한 생각에 빠져 있던 솔은 득용이 저를 일깨우자 ‘어어?’ 하고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잠시 밝아졌던 득용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빙 둘러 저를 바라보고 있는 멤버들의 얼굴에도 그를 살피는 기색이 역력했다. 솔은 고개를 크게 휘젓곤 웃으며 화제를 바꾸려 물었다.
“그러면 우리 다음 미션은 언제야?”
“천천히. 지금은 일단 쉬어. 생방송 무대부턴 준비 기간이 조금 길어져서. 하루 이틀 정도는 마음 편히 쉬고 얘기하자.”
솔의 물음에 침대 끄트머리에 서 있던 태오가 고개를 저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약간 힘이 빠진 그의 목소리가 피곤하거나 지쳤다기보단 부드럽게 들렸다. 은겸을 떠올리느라 멍해진 솔의 모습이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고 오해한 듯싶었다.
“맞아. 내일은 2화 방영하는 날이니까, 같이 모여서 방송 보고…. 그러고 나서 생각하자.”
“그래. 과로라니. 보양식이라도 먹여야 하는 거 아니야?”
태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늘따라 검은 눈동자를 연신 빛내던 가람이 앉아 있던 솔을 다시금 침대에 눕혔다. 가람은 솔의 머리를 받치고 그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마지못해 솔이 베개에 다시 머리를 대자 지호도 옳다구나 하며 한술 더 떠 맞장구를 쳤다. 표정만은 당장이라도 몸에 좋다는 건 다 쓸어 올 기세였다.
“엄마한테 소고기 보내 달라고 할까요?”
“그럴까? 염치없지만 사골 같은 것도….”
솔이 다시 은겸을 떠올릴 새도 없이 여러 대화가 휙휙 지나갔다. 득용의 부모님이 한우 농가를 운영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옆에서 거드는 지호는 또 쓸데없이 생활감이 넘쳤다.
솔을 재우려는 듯, 가람이 이불을 덮어 주자 지호가 솔의 배를 토닥거렸다. 포대기에 싸인 아기처럼 곱게 눕혀진 솔은 눈만 데굴 굴렸다. 사실 은겸 덕에 잠이 확 달아나기도 했지만, 지금은 잠보다 샤워가 하고 싶었다. 그도 아니면 핸드폰을 확인하고 싶었다. 은겸이 병실을 나선 지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그에게 연락이 온 것은 없는지. 확인하고 당장 조금 전 그 말은 대체 뭐였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솔아, 은겸…. 선배랑은 무슨 얘기 했어?”
“맞아! 그 형은 왜 온 거예요?”
은겸을 떠올린 것을 눈치채기라고 한 것처럼 가람이 솔에게 은겸의 이름을 꺼내며 물었다. 득용도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길게 빼고 솔을 바라보았다. 솔은 두 사람의 시선을 피해 발치의 태오를 바라보았다. 침대의 발판을 잡은 태오의 손에 힘줄이 툭 불거지도록 힘이 들어갔다.
“걱정돼서 왔대. 별…. 얘기 안 했어.”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솔은 또 말을 빙 둘러야 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걱정되어서 온 것도 은겸이 일방적으로 말한 것이지 솔은 별 대단한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