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병실 안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갑자기 들어온 영호 덕에 흐름이 깨져 은겸이 저에게 왜 이토록 다정하고 도움을 주는지 재차 물어보기도 난감했다.
“촬영 잘 끝났겠죠…?”
“그럼.”
“저 이렇게 된 것도 방송에 나갈까요?”
“나가겠지. 네 생각보다 더 자극적이고 큰일이 난 것처럼 나올걸.”
어색한 침묵을 깨고 싶고 앞서 나온 화제를 잊게 하고도 싶어 꺼낸 솔의 말에 은겸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돌아온 은겸의 대답에 솔은 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자신에 대한 반응이 영 좋지 않은데 오늘 일이 괜히 더 악영향을 끼치는 건 아닐까 싶었다.
“대충 뭐, 쓰러지는 부분에서 자르고 사람들 놀라는 거 보여 주고 광고 내보낼걸.”
안 봐도 훤하다는 듯 가늠해 보던 은겸은 솔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뒤늦게 아차 싶었다. 은겸이 솔과 같은 상황에 부닥쳤다면 오히려 영악하게 이 상황을 이용했을 것이다. 안 좋은 반응들 때문에 심적으로 여려 상처받았고 스트레스가 컸다며 세상 순하고 억울한, 가련한 주인공인 척 동정 여론을 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은겸이 보기에 솔이나 솔 주변 사람들이나 그렇게 상황을 이용해 먹을 만한 사람은 없어 보였다. 기껏 해 봐야 ‘과로였다.’ 정도가 다일 것이었다. 성실한 이미지는 얻을 수 있겠지만 그뿐이다.
은겸은 급격히 어두워지는 솔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귀엽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심각해진 그의 표정을 웃으며 관찰하고 있던 은겸은 문득 화젯거리가 된 그 표정에 대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이미 한 차례 물어본 적이 있지만 솔은 별달리 답을 주지 않았었다.
“그래서 대체 왜 그렇게 인상을 썼던 거야?”
은겸이 고개를 기울여 솔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솔은 잠시 생각하는 듯싶더니 눈을 슬쩍 흘리며 머뭇거렸다. 뭐 대단한 이유이길래 이리 뜸을 들이는지 은겸이 답답해질 즘 솔이 입을 열었다.
“…인상 쓴 거 아니에요.”
“그럼?”
“……윙크.”
피곤함에 붉어진 입술이 달싹거렸다. 너무도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 제대로 듣지 못한 은겸이 귀를 기울이며 가까이 다가오자 솔이 얼굴을 붉혔다. 재차 말해 달라는 그의 몸짓에 솔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세상 부끄러운 치부라도 들킨 듯 몸을 비비 꼬며 말을 했다.
“윙크한 거예요.”
생각지 못한 대답에 잠시 할 말을 잃은 은겸은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그를 한참 쳐다보았다. 솔의 앞에서 너무도 표정 관리를 못 했다는 생각에 화들짝 입을 다물고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인 은겸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솔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윙크해 볼래?”
“지금요?”
“응.”
솔이 되묻자 은겸은 머쓱하게 웃었다. 너무 속 보이는 요구였을까. 솔은 커다란 눈동자를 도르르 한 바퀴 굴리더니 이내 화면에 계속해서 비쳤던 그 논란의 장면을 재연해 내었다. 누가 봐도 찡그리는 표정.
“이렇게 한쪽 눈만 감으려면 이렇게….”
솔은 일그러진 제 얼굴을 가리켜 보이며 제가 지은 것이 어떻게 ‘윙크’인지를 설명했다. 요점은 그가 한쪽 눈만 살포시 감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별 시답잖은 원인에 허탈하기도 해 은겸이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솔이 입술을 슬쩍 삐죽거렸다.
“웃지 마요.”
정말 그때는 무슨 자신감이었던 건지, 민망함에 솔은 손등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점점 커지려는 웃음을 은겸은 헛기침으로 눌러 보았다. 그러고는 큼큼, 웃음으로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애써 진지한 척 물었다.
“이거 제작진한테 이야기했어?”
“네. 인터뷰도 따 갔어요.”
“아, 적당히 풀어야지…. 이번 주에 풀려나?”
솔의 대답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솔이 이해하지 못한 듯 부끄러움에 붉게 타오른 뺨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눈동자를 데굴 굴렸다. 은겸은 그런 솔을 보며 위로와 설명을 보태었다.
“제작진이 일부러 그러는 거야. 사실 윙크였다 하고 인터뷰 내용 풀리고 나면 안 좋은 반응들 사그라질 거야. 그런 말들 너무 신경 쓰지 마.”
“그건 괜찮아요. 별로 그렇게 신경 쓰이지 않아요.”
은겸의 말에 솔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속사와 영호도 그렇게 말했었고 이미 솔도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솔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든 건 가람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었고 더불어 자신이 아니라 팀 전체를 향한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솔이 고개를 크게 휘저으며 부정했다. 머리를 가로저은 탓에 엉망이던 머리카락이 더욱 흐트러졌다. 은겸은 다정히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넘겨 주었다. 스프레이며 각종 왁스를 바른 머리카락이 단단했다.
“그런 사람이 무슨 스트레스가 그렇게 많아서 여기 누워 있어.”
“그거보단 YC 몰아주기라면서…. 저 때문에 괜히 다른 멤버들까지 안 좋게 보이는 거 같아서요.”
전자의 고민은 입 밖으로 낼 수 없으니 솔은 후자의 고민을 표면으로 밀어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무대 공포증과 트라우마, 거기에 피로, 과로 그냥 모든 것이 겹쳐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이했을 뿐이었다. 솔의 대답에 은겸은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아…. 그쪽이었나.”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좀처럼 솔의 앞에선 이런 얼굴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조금만 방심하면 고스란히 얼굴에 다 드러나 버렸다. 은겸의 심사가 뒤틀렸다. 은겸은 표면으로 떠오른 감정을 지워 내고 다시금 다정하고 따뜻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방송에선 괜찮아 보였는데, 이제 무대에 서는 거나 춤추는 거에 대한 두려움은 나아진 거야?”
화면에 보이는 솔의 모습은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뮤직비디오 촬영장에서도, 후에 따로 활동을 같이하면서도 나아진 그의 모습을 은겸도 확인하긴 했으나 찜찜함이 남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차 확인했다. 그런 문제들은 생각보다 그리 쉽게 해결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혹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난 것도 그런 점이 원인으로 작용한 것은 아닌지. 은겸의 의심에 마침표를 찍으려는 듯 모처럼 솔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많이 나아졌어요.”
“…정말이지? 언제든 도움 필요하면 편하게 말해.”
솔의 그 대답이 은겸은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다른 멤버들도 알고 있을까? 그토록 눈에 띄는데 모를 수가 없긴 했다. 어쩌면 태오나 지호도 그래서 더 솔을 싸고도는 걸지도 몰랐다. 제가 접근이라도 할까 날을 세우는 모습들이 가소롭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솔의 옆얼굴을 은겸은 그냥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온종일이라도 이렇게 보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솔이 형, 일어났어요? 많이 아프대요?”
불쑥, 병실 문밖에서 숨기려야 숨길 수도 없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힘든데 숙소로 가지 여기까지 뭘 와.”
“솔이 얼굴이라도 보고 가야죠. 그렇게 쓰러졌는데 저희가 어떻게 편하게 쉬어요.”
“아무튼 고생했다. 솔이 정신 들었어. 잠깐 얼굴만 보고 빨리 돌아가서 쉬자.”
영호의 목소리와 지호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그러자 순간 솔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어쨌든 1위를 했다는 사실과 그저 멤버들을 만난다는 사실이 못다 푼 마음의 짐이 있음에도 그를 웃게 했다. 은겸은 활짝 피는 솔의 옆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하필 너는 이제야 나타나서. 조금만 더 일찍 솔이 자신을 찾아왔다면 루카 같은 피곤한 놈이 아니라 솔과 함께 팀을 꾸렸을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지금 태오나 가람, 지호 같은 놈들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제 자리가 되었을 텐데. ‘왜 자길 도와주는 거냐?’는 질문 같은 건 안 들었을 텐데. 불공평했다. 논리도 통하지 않는 억지에 가까운, 유치한 질투가 또 툭 솟아올랐다.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는 불청객들이 찾아왔다. 이 순간부터는 은겸이 오히려 이들 사이의 불청객이었다. 조금 전까지 그리 나쁘다고 평할 수 없었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점점 가까워지는 인기척에 은겸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곤 솔이 묻다 말았던 질문을 저 스스로 끄집어내었다.
“솔아, 내가 너한테 왜 잘해 주는지 궁금해?”
“네?”
멤버들을 만나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속으로 말을 고르던 솔은 갑자기 드리워진 그림자에 고개를 돌렸다. 은겸의 손이 솔의 옆을 짚으며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했다. 지나치게 가까워진 거리에 솔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슬쩍 뺐다. 그러자 은겸은 더욱 솔에게 몸을 가까이하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솔아, 나 너 좋아해.”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닿은 귓가부터 소름이 온몸에 쫙 타고 올랐다. 귀에 심장이 달린 듯 쿵쾅 망치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솔의 뇌는 방금 제 귀를 타고 들어온 정보를 미처 수렴하지 못했는데 몸이 먼저 반응했다. 솔은 지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겸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가까워져 있던 그와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숨이 스쳤다.
“너한테 관심 있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은겸은 부드럽게 처진 눈을 활짝 휘며 눈웃음을 쳤다. 순간 솔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심장이 뛰었다. 그 감각에 솔은 제 두 손을 꼭 움켜쥐어 가슴께에 가져다 대었다. 이상했다. 자신이 좋아하고 있는 사람은 태오인데, 어째서인지 은겸의 느닷없는 고백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솔이 붉어진 입술을 꽉 깨물자, 은겸은 침대를 짚었던 손을 풀어 그의 입술을 툭, 건드렸다.
“뭘 어떻게 한다는 건 아니고, 나 이용해 먹으라고 힌트 주는 거야.”
꽉 깨문 입술처럼 점점 붉어지는 솔의 얼굴을 보며 은겸의 입꼬리가 활짝 비틀렸다. 벌컥, 병실 문이 열리고 발걸음부터 요란한 득용이 들어오자 은겸은 일부러 몸을 과장되게 움직여 솔과 멀어졌다. 마치 황급히, 어떤 행동을 하려다가 멈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