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 솔아, 언제나 그랬듯이 다시 하루가 시작될 거고 친구들을 만나고 여러 일을 하다 보면 또 그렇게 다 괜찮아질 거야.”
토닥토닥. 비록 꿈일지언정 그리웠던 그 손길에 솔은 한참을 안겨 그렇게 설움을 토해 냈다. 더는 눈이 떠지지 않을 정도로 울음을 쏟아 내었다. 더 토해 낼 케케묵은 감정이 남지 않았는지. 아니면 이제 울 기력도 소진했는지. 솔의 울음이 멎자 그녀는 분위기를 바꿔 장난스럽고 친구 같은 엄마로 돌아와 소곤소곤 솔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만 울고 우리 아들이 좋아하는 사람 얘기 좀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야?"
그녀가 꺼낸 화제에 솔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태오를 떠올렸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손길을 느끼며 솔은 태오와 가람, 지호와 득용이 그리고 주환과 닮은 은겸에 대한 이야기와 자신에게 있었던 변화에 대해 쏙닥거렸다. 부모님과 사이가 좋은 편이긴 했지만, 온종일 무용 학원에서 살다시피 했던 솔은 사실 이렇게 함께할 시간은 별로 없었다. 그리 말수가 많고 애교가 있는 아들도 아니었고. 진작 이랬다면, 이런 기회가 좀 더 많았다면 덜 슬프고 덜 아쉬웠을까.
솔은 그녀의 품에 안겨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자신이 마음에 둔 사람이 어떻게 생겼고 어떤 사람인지. 새롭게 사귄 친구들이 얼마나 좋은 사람들인지. 언제 눈물 바람을 했냐는 듯이, 이야기가 길어지자 솔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올랐다.
“다들 좋은 친구들이네.”
“응.”
“다행이야. 우리 솔이 옆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엄마가 이제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 주던 그녀는 솔이 무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며 활짝 웃자 이내 작별을 고했다.
“안녕, 솔아. 우리 아들.”
작별 인사보다는 길에서 마주친 친구와 나누는 인사 같았다. 느닷없는 인사에 솔은 몸을 벌떡 일으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니 정확히는 잡으려 했지만, 애초에 그 자리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는 듯이. 솔이 조금 전까지 무릎을 베고 누워 있던 그 자리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뱃속이 텅 빈 것 같은 공허함이 찾아왔다.
결국 꿈이고 끝내 깰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일까. 많이, 너무 많이 슬프지는 않았다. 진작 떠날 수 있었음에도 솔이 스스로 추스르고 일어설 수 있도록 마치 일부러 멤버들의 이야기를 꺼내고 마침내 웃자 안심하고 떠나간 것만 같았다.
솔은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 내며 눈을 깜빡였다. 깜빡, 깜빡. 세 번쯤 깜빡였을까 갑자기 전등이 켜진 것처럼 세상이 환해졌다.
“안녕, 솔아. 일어났어?”
여상했던 엄마의 목소리처럼, 누군가가 솔의 손을 잡고 여상한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마침내 뜨인 솔의 눈동자에서 소리 없이 눈물방울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왜 울어?”
솔의 손을 잡고 있던 인물은 솔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 내 주며 안타까움과 위로가 아닌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솔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건 의외의 인물, 태은겸이었다.
***
영호가 상황 보고차 전화 통화를 끝내고 병실 앞으로 돌아오니 문 앞에 은겸이 서 있었다. 나름 대스타의 등장에 병원이 소란스러웠다. 간호사들도 흘깃흘깃 쳐다보고 병실에 누워만 있던 젊은 환자들도 핸드폰을 들고 복도를 기웃거렸다. 환자복을 입은 여성과 사진 한 장을 찍어 주고 돌려보낸 그는 영호를 발견하자 인사를 해 보였다. 생각지 못한 인물의 등장에 당황한 영호가 두리번거리며 은겸에게 다가갔다.
“여긴 어떻게….”
“저희 로드 형이 그쪽에 가 있거든요. 소식 들었어요.”
“아. 그런데 여긴 왜?”
“왜긴요. 친구가 쓰러졌다는데 걱정돼서 왔죠.”
은겸이 데뷔하기 전만 해도 태오와 함께 영호의 손을 탔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냥 전처럼 편할 수 없는 사이가 되어 영호는 어색하게 물었다. 은겸은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여유 있게 대답했지만 속은 갈증이 일 듯 조급했다. 영호가 솔과 병원으로 이동하며 회사에 연락했을 때, 은겸은 때마침 회사에 있었다.
영호가 솔과 함께 이동했기에 촬영장에 남겨진 다른 멤버들을 케어할 사람이 필요했고 때마침 회사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은겸의 로드 매니저가 백업을 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당연하게도 솔이 쓰러졌다는 소식이 은겸에게까지 전달되었다.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은겸은 다리를 떨었다. 그런 버릇 따윈 없었는데 그를 오래 봐 온 직원들이 어디 불안하냐 물을 정도로 은겸은 다리를 떨었다.
“솔이랑 그렇게 친했어?”
“네. 친해요. 우리. 제가 왜 뮤직비디오에도 출연시켰겠어요.”
영호의 물음에 은겸은 커다랗고 복슬복슬한 강아지 같은 웃음을 싹 지웠다. 영호의 지적에 사실 은겸은 ‘그러게 말이에요.’라고 대답이 튀어나올 뻔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은겸은 바득바득 우겨 로드 매니저를 거쳐 확인한 이곳, 솔이 누워 있는 병실 앞까지 조금의 지체도 없이 바로 찾아왔다.
“들어가 봐도 되죠?”
“솔이 자는데.”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던 은겸은 영호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늘 선하게 웃는 은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조급증이 일어 표정 관리가 안 됐다. 진짜 큰 사고가 났다면 영호가 여기서 이러고 있지도 않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두 눈으로 솔이 멀쩡하게 있는 꼴을 봐야 이 조바심이 사라질 것 같았다.
인상을 찡그린 것도 아니고 그저 늘 웃는 낯인 그가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을 뿐인데 묘한 불편함이 영호에게 몰려왔다. 떨떠름해진 그는 소름이 오소소 돋는 목덜미를 벅벅 문지르며 은겸에게 손짓을 해 보였다.
“그래. 들어가 봐. 과로랑 스트레스가 겹쳐서 그런 거래. 걱정할 정도는 아니고 그…. 이번에 좀, 반응도 그렇고 연습 때문에 무리하긴 했어. 알지?”
“솔이가 신경 많이 썼어요?”
“신경을 안 쓴다고는 했었는데, 그래도 은근 마음고생했나 봐.”
매일 밤이면 주고받던 연락이 끊어진 것도 첫 방송이 되고 슬슬 반응이 올라올 때쯤이었다. 은겸은 조심스럽게 병실 문을 열었다. 단출한 2인실. 침대 한 자리는 텅 비어 있고 한 자리엔 가림막이 쳐져 있었다. 자신을 뒤따라 영호가 병실로 들어오려 하자 은겸은 매몰차게 그의 앞에서 문을 닫아 버렸다.
병실로 들어오려던 영호는 머쓱해져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때마침 촬영이 끝이 났는지. 영호의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병실 문 너머로 ‘어, 태오야.’ 하는 영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겸은 조심스럽게 가림막을 들추고 솔을 확인했다. 핏줄이 퍼렇게 도드라진 손등에 꽂힌 주삿바늘과 곳곳에 보이는 파스와 멍 자국. 무대 세팅의 흔적이 남아 있는 머리카락 같은 노력의 흔적이 안쓰럽게 다가왔다. 곤히 잠든 얼굴이 무척이나 초췌하고 피곤해 보였다.
은겸은 한참 말없이 그의 얼굴을 고요히 내려다보다 손을 뻗어 눈썹 위에 손을 대보았다. 힘없는 보드라운 털이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이리저리 쓸리는 감촉. 살면서 누구를 이렇게 만져 본 적이 처음이었다. 애초에 살면서 이렇게 누군가를 걱정해 만사를 제쳐 놓고 달려와 보기도 처음이었다.
왜 이렇게 이끌리는지 영문 모를 일이었다. 무엇이 그리 특별해서 이렇게 마음이 기울고 답지 않은 걱정과 배려를 하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도움을 주고 싶어서 안달일까. 멀쩡히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면 타들어 가는 갈증이 가실 거로 생각했는데 막상 마주하니 더 애가 탔다.
부담스러워할까, 오히려 자신 때문에 괜히 곤란한 상황에 부닥칠까 함부로 찾지도 못했지만, 우연을 가장해 회사에서 마주칠 때면 늘 진이 빠지도록 연습하고 있던 그였다. 이번엔 또 무엇이 널 이렇게 몰아붙이도록 만들었을까. 처음 만났던 날. 춤을 추는 게, 무대에 서는 게 무섭다고 말하며 친구가 없다던 솔이 떠올랐다.
자신은 속이 시커먼 사람이었다. 흔히들 말하는 가식적이고 남을 이용해 먹는 사람. 처음으로 순수하게 아무런 대가도 없이 도와주고 싶다 느낀 이가 솔이었는데, 정작 솔은 이젠 제 도움이 필요가 없다는 듯이 거리를 벌렸다. 그 거리는 윤태오 같은 멤버들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벌어졌다.
어떻게 해야 걔네들보다 더 네 옆에 가까이 있을 수 있을까. 곤히 잠든 그를 깨우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러고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다정하고 달콤하게 말해 주고 싶었다.
‘지금 눈을 떠 봐. 솔아. 지금 네 옆에 있는 건 네가 그렇게 웃어 주는 멤버들이 아니라 나야.’
은겸은 화들짝 솔의 얼굴에서 손을 거두어 제 입을 틀어막았다. 누구나 불쾌해할 만한 생각, 하지만 가려진 은겸의 입은 그린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런 자신이 낯설기는 은겸도 마찬가지였다. 제 입맛대로 사람을 휘두르기는 했었지만, 그 사람을 소유하거나 집착하거나 했던 적은 없었다.
자꾸만 비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입을 가리며 잠든 솔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 너머로 영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벽에 가로막혀 조금 뭉개지는 소리였지만, 그 내용을 알아듣기엔 충분했다.
“솔이는 괜찮아. 단순 과로라니까 오늘은 여기서 영양제랑 좀 맞히고 재우려고. 너희가 여길 왜 와. 쉬어야지.”
불쑥. 영호와 통화하고 있을, 솔을 품에 끼고도는 낯짝들을 떠올리니 입가에 걸렸던 웃음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처음부터 그들이 맘에 들었던 녀석들도 아니었지만, 지금은 질투를 넘어서 화까지 일었다. 솔이 이 정도로 버거워할 때까지 손을 놓고 있었다는 점이. 아니 어쩌면 솔을 그들이 밀어붙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윤태오, 그 꽉 막힌 벽창호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마음에 안 드는 놈. 윤태오의 낯짝을 곱씹으며 굳게 닫힌 문가로 은겸은 눈을 흘겼다. 서글서글한 은겸의 얼굴이 팍 일그러진 순간 바스락하는 인기척에 그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눈을 뜬 솔이 굵은 눈물을 조용히 흘리고 있었다. 은겸은 언제 얼굴을 일그러뜨렸냐는 듯,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안녕, 솔아, 일어났어?”
목소리가 꿀에 절인 듯 달콤하고 보드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