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145화 (145/192)
  • #145

    “무용 시작할 때, 솔이 네가 하고 싶다고 졸랐었잖아.”

    “내가?”

    “응. 그때는 네가 너무 어려서 이렇게 오래 무용을 할 거라곤 생각 못 했었어. 사실 엄마는 솔이 네가 공부에 재능이 있었으면 했지.”

    웃음기가 가득한 엄마의 말에 솔도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솔에게는 정말이지 공부에 대한 재능이 없었다. 책상 앞에서 한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온전히 책상 위에 펼쳐진 책에 집중하기엔 솔은 잡생각이 너무 많았다.

    책을 펴 놓고 10분 정도가 지나면 다른 생각을 하다 머리가 무거워져 책상에 엎드리기 일쑤였다. 누가 봐도 공부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 아이였다. 사실 부모님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유독 예체능을 접할 기회를 많이 주셨는지도 몰랐다.

    “아빠는 아닌데, 아빠는 솔이가 엄마처럼 그림 그렸으면 했지. 모전자전 멋지잖아.”

    운전대를 잡은 남성의 목소리에 솔은 고개를 돌렸다. 눈에 지독히도 익은 뒷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두 분의 말이 무엇인지 솔은 잘 알고 있었다. 엄마는 솔이 아빠를 닮았으면 했고, 아빠는 솔이 엄마를 닮았으면 했다.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자식에게 투영하고 싶은 것이었다.

    이건 꿈이다.

    솔은 지금, 이 상황이 꿈인 걸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창밖에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터널은 영원히 다가오지 않을 것이었다.

    “사실…. 무용 학원 처음 갔을 때, 엄마 너 무용 학원 데려간 거 아니었거든?”

    “어?”

    “그 위층에 태권도 학원 가려고 했던 건데, 솔이 네가 무용 학원 간판 보고 너무 좋아하는 거야.”

    “내가?”

    처음 듣는 말에 솔은 물음을 표했다. 확실히 무용 학원 위층에 큰 태권도 도장이 있기는 했었다. 흰 도복을 입고 계단을 뛰어내리는 남자아이들이 이따금 솔이나 주환, 의찬을 마주치면 저들끼리 으스대는 일이 있었다. 그야 그렇다 치고 애초에 자신이 졸라서, 무용이 하고 싶어서 처음 학원에 등록했다는 이야기 자체가 제 이야기임에도 금시초문이었다. 솔이 제가 언제 그랬냐는 표정을 짓자 그녀는 ‘얘 봐라?’ 하고 말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럼, 너 아기 때는 노래만 나오면 거실에서 노래 부르고 춤추고 잘했잖아. 찾아보면 비디오도 있을걸?”

    “아빠가 찍었지.”

    “사람만 모이면 자기 춤 보라고 극성이었어.”

    “내가?”

    솔은 이 모든 게 꿈임을 잠시 잊고 황당하다는 말투로 물었다.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워 앞좌석을 붙잡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제 일인데 정말 남 일보다 더하게 까맣게 기억이 없었다.

    정작 솔은 그저, 부모님이 보내 주었던 하고많은 학원 중에 제일 그가 눈에 띄고 재능을 뽐냈기에 무용 학원을 다녔다고 인지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가족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자신이라니. 솔은 어린 시절부터 쭉 조용하고 소심한 편이었다. 황당함도 잠시 ‘이거 꿈이었지.’ 하는 생각에 다시금 지금 자신이 꿈을 꾸는 중이라는 걸 인지한 솔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앞좌석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꿈인 걸 잊게 되었다.

    “학원 간판 보고 네가 엄마한테 춤 배우러 가는 거냐고 묻는데 태권도 학원에 가는 거라고 말할 수가 없더라.”

    그 말을 하며 그녀는 소녀처럼 웃음소리를 내었다. 아직도 그때의 모습이 훤하다는 듯이 말이었다. 어느새 키가 콩나물처럼 쑥 자라 버린 아들이 여전히 귀엽다는 듯이 그녀는 애정을 가득 담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솔의 뺨을 살짝 꼬집듯 매만진 그녀는 이내 몸을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앞 유리를 통해 고속 도로를 달리는 차들이 보였다. 꿈이라서일까, 아무런 경고 창도 떠오르지 않았고 불안하거나 속이 뒤집히지도 않았다. 솔은 그저 아무 말 없이 제 엄마와 아빠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에 공연한다고 보러 갔을 때 얼마나 잘하던지. 내 아들이 천재구나, 왜 진작 몰라봤을까 했지.”

    “누구 아들인데. 천재 맞지.”

    이건 꿈이었다.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명확했지만, 확실히 꿈이었다. 애초에 사고가 나던 당일에도 이런 대화는 나눈 적이 없었다.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면 이 가슴 아픈 행복을 좀 더 만끽할 수 있을까? 이 꿈이 언제고 계속될까? 안온함에 취하고 싶었지만, 솔은 스스로 침묵을 깼다.

    “엄마, 나 이제 스무 살…. 아니 성인이야.”

    솔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다시금 중년의 여인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솔 스스로 안온하고 평화로운 꿈을 깨고 있었다. 이제 이 평화가 산산조각이 나면 꿈에서 깨게 될까? 하지만 솔의 생각과 다르게 그녀는 빙그레 웃음 지었다.

    “그러게, 시간이 빠르게도 흘렀다. 우리 아들 이제 어른이네.”

    솔을 똑 닮았지만, 세월의 흐름이 남은 얼굴에 구김 없는 웃음이 걸리자 정작 그녀의 얼굴 곳곳에 주름이란 구김이 남았다. 너무도 따스하게 웃는 그 미소를 깨고 싶은 것인지 솔은 계속해서 이 꿈과 어긋나는 이야기를 내뱉었다.

    “엄마, 나 이제 무용도 안 해. 내가 그만뒀어.”

    이번에야말로 꿈에서 깰까? 하지만 돌아온 것은 조금 전보다 더 따뜻한 목소리였다.

    “잘 안됐어?”

    “응. 좀 잘 안됐어.”

    “속상했겠다. 우리 솔이 춤추는 거 그렇게 좋아했는데.”

    “엄마, 나는….”

    ‘속상했겠다’라는 그 한마디에 갑자기 감정이 울컥했다. 더 이상 단순한 꿈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솔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한없이 애정과 안타까움, 온갖 따스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새 공간은 고속 도로를 달리던 차 안을 떠나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는 무대 같은 공간으로 뒤바뀌었다. 조명이 내리는 자리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암흑이 깔려있었다. 두리번거리는 솔의 얼굴을 저를 닮아 손끝이 뾰족하고 조금 서늘한 손이 감싸 안았다.

    “그래도 지금 행복하지? 우리 솔이, 웃으면서 지내고 있지?”

    “……엄마.”

    솔은 제 얼굴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을 잡아 끌어 내렸다. 이건 꿈이다. 한때 그 달콤한 꿈에 기대어 본 적이 있던 솔이기에 꿈에 기대어 봤자 꿈에서 깨면 힘들어지는 건 자기 자신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 다정한 손길의 주인은 현실에 없다는 걸 인정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솔이었다. 이제 겨우 그 그림자를 떨쳐 냈는데 다시 반복할 수는 없었다.

    “응. 엄마, 나 새로운 친구도 생겼고 좋아하는 사람도 생겼어. 날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나 이제 노래도 제법 잘 불러.”

    “정말? 잘했어, 우리 아들.”

    솔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애써 꾹 누르며 꿋꿋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울먹이는 솔의 목소리에 여인의 손이 그의 핏기 없는 손을 꼭 감싸 잡았다. 둘 다 손끝이 서늘하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맞잡으니 제법 열기가 돌았다.

    솔의 말을 얼핏 들으면 엄마에게 제가 잘 지내고 있다,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아이의 고백 같았지만 사실 솔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런 꿈에 기대지 않아도 자신은 잘 지내고 있고 괜찮다고 스스로를 일깨우려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솔의 마음을 잘 안다는 듯이, 여인도 대견하다는 듯이 솔을 바라보았다.

    “다 컸네. 예전엔 엄마보고 꼭 공연에 와야 한다고 칭얼거렸는데. 이젠 알아서 척척하네.”

    “응. 엄마.”

    그녀의 말에 솔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솔은 아직도 무대에 서면 엄마가 있을 리도 없는데, 관객석에서 당신의 얼굴을 찾는다는 말을 삼켰다. 그래도 이젠 그가 관객석에서 익숙한 얼굴을 찾기 전에 먼저 손을 잡아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그녀가 솔의 손을 잡아 주었듯이 말이었다.

    “이제 엄마 없어도 잘하겠다.”

    “엄마, 그런데…. 그래도…! 엄마가 계속 도와주면 안 돼?”

    아주 담백하게, 딱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다잡은 솔의 손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며 솔은 멀어지는 그녀의 손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공연도 보러 오고…. 나 이제 TV에도 나와. 새로 사귄 친구들도 보여 줄게. 엄마.”

    놓치지 않으려 솔은 두 손으로 꼭 작은 손을 붙잡았다. 불쑥 커 버린 키만큼 커다래진 솔의 손이 여인의 손을 폭 감싸 쥐었다.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솔은 간절히 그녀의 손을 잡고 거의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잘하면 잘한 대로, 못하면 못 한 대로 상관없이 엄마가 필요했다. 아마 다 늙어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도 엄마가 필요할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하려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솔이었는데, 어느새 상황이 역전이 되었다. 영영 헤어질 것 같은 두려움에 바들바들 떠는 솔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내며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어리광은. 이제 성인이라며. 어른이 되어서 말이야.”

    “그래도 엄마가 필요해. 그냥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어.”

    “솔아, 괜찮아. 엄마가 없어도 우리 솔이는 이쁘고 착하고 좋은 사람이니까. 엄마가 주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랑과 도움을 받게 될 거야.”

    “아니, 엄마. 모두 다 날 싫어할 거야.”

    한껏 괜찮은 척 어른인 척 해 보았지만 결국 아이가 되었다. 솔은 놓치지 않으려 두 손을 꽉 붙잡은 채 목을 놓아 울었다.

    “얘 좀 봐라. 아깐 너를 좋아해 주는 사람도 있다며.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결국엔 미워하게 될 거야.”

    솔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솔도 지금 자신의 말이 그저 감정 어린 말도 안 되는 어리광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붙잡을 수 있다면 붙잡고 싶었다. 사고에 대한 자책은 이미 지난번에 씻어 버렸다. 이건 그냥 당연한 감정이었다. 모든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바라듯이. 무엇을 해 달라고, 정말 도움이 필요해서 붙잡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그냥, 엄마가 필요해.”

    “언제부터 마마보이가 되셨을까.”

    얕게 웃으며 그녀는 솔에게 꽉 붙잡힌 손을 조심스레 빼내었다. 그러고는 울음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손바닥으로 닦아 내 보듬어 주었다.

    “솔아, 너를 싫어할 사람은 없어. 누가 낳은 아들인데.”

    다정하게 꼭 끌어안아 울먹이는 등을 토닥여 주자 솔은 저보다 작은 그녀의 품에 안겼다. 천천히, 나지막한 목소리로 갓난쟁이를 어르듯 그를 달래자 울음이 점차 잦아들기는커녕 더 서럽게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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