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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를 뽑고 싶어-144화 (144/192)
  • #144

    무대를 지켜보고 있던 참가자들과 심사 위원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경쟁자라거나 방송상에서 그들이 보였던 태도와 상관없이 이번 무대는 단순히 지망생의 무대로 보기엔 퀄리티가 좋아도 너무 좋았다. 모두 박수를 보낼 만한 무대였다.

    심사 위원석을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끼리도 이미 활동 중인 몇몇 그룹보다 낫다며 저마다 한마디씩을 내뱉었다. 솔은 고개를 숙인 채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옆에 나란히 선 다른 멤버들이 허리를 드는 기척이 느껴졌지만, 솔은 숙인 허리를 드는 그 간단한 동작이 쉽지 않았다. 이대로 허리를 들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페널티가 50% 감소했다 해서 그것이 절대로 편한 것은 아니었다. 솔이 눈꺼풀을 천천히 깜빡일 때마다 눈앞에 새로운 경고 창이 떠올랐다. ‘비운의 천재 무용수’의 효과가 발휘되며 트라우마에 대한 알림 창이 깜빡거렸다. 지금이라도 안정의 포션을 사용해야 할까? 괜한 고집일지도 모르겠지만 솔은 고개를 내저었다.

    남은 촬영은 개별, 팀별 인터뷰와 심사 평, 결과 발표 정도였다. 무대에 서서 공연하는 것도 아니었고, 이미 은겸의 도움으로 촬영장에 대한 경험도 있었다. 쉽진 않겠지만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중간 미팅 촬영 시에도 안정의 포션을 틈틈이 사용했고 여분 수량이 널널한 것도 아니었다. 거듭 촬영을 반복하며 사실 솔은 안정의 포션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언제고 안정의 포션 없이 이런 상황을 이겨 내야 할 때가 다가올 것이 분명했다.

    마음 같아선 이런 고민이 우습다는 듯이 잘 해낼 수 있다고 당당히 말하고 싶었지만, 솔에겐 아직도 ‘안정의 포션’이 필요했다. 지금도 그저 무대에 서서 인사를 했을 뿐인데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솔은 안정의 포션을 사용하겠냐 묻는 알림 창을 보며 한참 망설였다.

    진작 고개를 들었어야 할 솔이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 일어서지를 않자 솔의 옆에 서 있던 가람이 솔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떨리는 손을 더는 떨지 않게 꽉 움켜잡아 주는 가람의 손을 솔은 밀어내지 못했다. 정말 별것 아닌 그 온기가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간 가람을 밀어내려 애쓴 것이 무색하게 솔도 가람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러자 그 반대편에 서 있던 지호도 슬쩍, 솔의 손을 잡아 주었다.

    더 이상 손이 제멋대로 떨 수 없게 되어 버리자 정신이 든 솔은 눈앞을 메우는 알림 창을 치워 버렸다. 그러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상황이 갑자기 들이닥쳤을 때 대비하면 늦었다. 그런 의미에서 솔의 생각에 지금이 꽤 연습해 보기에 적당한 타이밍같이 느껴졌다. 지호와 가람이 맞잡아 준 손 때문에 답지 않게 용기가 샘솟았다. 프로필 촬영장과 은겸의 뮤직비디오 촬영장에서의 일이 떠오르자 잘 견뎌 낼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멤버들이 제 변화를 눈치채기 전에 떨쳐 내고 지금껏 잘해 온 것처럼 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오늘의 무대에서도 사고가 있었지만 잘 해낸 자신이었다. 손이 떨리고 온몸이 시큰거렸지만, 무대를 잘 끝마쳤다는 고양감이 아직 솔에게 남아 있었다. 솔은 제 손안에 들어온 두 사람의 손을 다시 한번 움켜쥐었다. 그간 접촉을 의도적으로 피해 왔던 가람과 어깨가 맞닿았다. 안일하고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먼저 손을 잡아 준 것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는 가람이어서 더 안도가 되었다.

    고개를 드니 멤버들 모두가 솔을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감에 좁아진 솔의 시야에는 오롯이 딱 그 다섯 명의 눈만이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을 바라보는 멤버들과 얼굴을 마주했지만 그런데도 솔의 눈동자는 어느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전과 달리 빠르게 이리저리 움직였다. 정처 없이 방황하는 눈동자 끝에 무대에서 내려가라는 사인을 보내는 스태프가 보였다.

    그제야 시야가 넓어지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 모두가 눈에 들어왔다. 덜컥 숨이 막히는 듯했다. 눈앞이 자꾸만 깜빡거리며 보기 싫은 알림 창을 띄워 댔다. 가람과 지호가 양쪽에서 손을 잡고 잡아끌자 솔은 막대기처럼 빳빳하게 굳은 상태로 걸음을 옮겼다. 전 같았다면 이 자리에서 바로 주저앉았을 텐데 크나큰 발전이었다.

    떨리는 숨소리와 불안정한 눈동자, 본래도 하얀 얼굴이 조금 더 창백해지고 식은땀을 흘린다. 강한 조명과 메이크업을 한 무대 위에선 크게 눈치채기 어려운 반응들이었다. 땀과 숨이야 방금 무대를 끝냈으니 당연한 일이었고 창백한 얼굴은 메이크업에 가려지기 일쑤였다.

    종아리를 타고 올라오는 저릿한 통증에 솔은 다리를 절뚝이며 멤버들과 무대에서 내려갔다. 전선이 뒤엉킨 좁은 철제 계단을 내려오자 영호가 제일 먼저 멤버들을 반겼다. 고생했다며 등을 토닥여 주는 영호에게 대답할 여유도 없이 솔은 가람과 지호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먼저 잡아 준 것은 두 사람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솔이 둘의 손을 절실하게 붙잡고 있었다. 허리를 숙여 두 손으로 무릎을 짚었다.

    남들한테는 별거 아닌, 그저 고개를 들고 똑바로 서는 것이 이리도 어려울 일인지. 힘이 들었다. 무대를 내려서자 긴장이 풀리며 그간 연습으로 혹사했던 온몸이 다 아파 왔다. 마치 조금 전에 구타라도 당한 것 같은 말이었다.

    무릎을 짚은 손목도 시큰거렸다. 몸이 무거워 조금만 중심이 기울면 그 자리에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특성 때문이 아니라 그간 무리한 것에 대한 반작용이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자 긴장감에 느끼지 못했던 온갖 통증들이 몰려왔다. 피부가 따가웠고 역시나 갑작스레 바닥을 구르며 삐끗했는지 발목도 욱신거리고 어깨도 아파져 왔다.

    무엇보다 제대로 느끼지 못할 만큼 뜨거웠던 몸이 싸늘하게 식으며 손에서부터 한기가 몰려왔다.

    [현재 피로도 78/100]

    [경고! 피로도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상태 이상에 유의하세요.]

    [상태 이상 : 근육통]

    [상태 이상 : 현기증]

    [경고! 체력이 낮습니다.]

    눈앞에 ‘상태 이상’이란 글자가 손에 잡힐 것처럼 가까이에 보였다. 언제 피로도가 이렇게 올라갔었지? 솔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피로도는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아 있었다. 체력도 반토막이 나 있었다.

    뒤늦게 상황을 인지하고 솔은 안정의 포션을 사용하려 했다. 머릿속으로 ‘안정의 포션’을 떠올리려 했는데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고 자꾸만 생각이 다른 길로 샜다. 어느새 안정의 포션은 까맣게 잊고 어지럽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다. 신기하게도 조금 전까지 어지러움을 느끼지 못했는데. ‘현기증’이라는 글자를 인지하고 나자 솔은 세상이 일렁임을 느꼈다.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숙이고 있던 솔이 앞으로 고꾸라질 듯 중심을 잃자 솔의 양어깨를 누군가가 감싸 안았다.

    솔이 눈을 흐리게 뜨고 돌아보니 가람이었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괜찮다고 잠깐 긴장이 풀려서 그런 거라고 말해 주어야 저 잔뜩 찌푸려진 얼굴이 풀릴 텐데. 저를 부축하는 가람의 얼굴 뒤로 다른 멤버들의 얼굴도 보였다. 피차 마찬가지로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지호도 가람도 심지어는 영호도. 태오는 말할 것도 없었다.

    “괜찮아?”

    태오가 다가와 솔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저 말을 듣기 전에 이 불안증을 떨쳐 낼 생각이었는데 기어이 듣고야 말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태오의 목소리가 늘어진 테이프처럼 들렸다. 그의 목소리를 더 오래 듣고 싶어서 그런 걸까. 좀 더 자신을 걱정해 달라는 투정의 반영인 걸까. 괜찮냐는 그 세 음절이 한없이 길게 늘어졌다.

    “솔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지호도 솔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성솔!”

    지호와 태오가 번갈아 가며 솔의 이름을 불렀지만, 솔은 계속해서 늘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머릿속으로 ‘어라, 왜 이렇게 소리가 늘어지지…?’ 하는 헛된 생각만 할 뿐이었다. 솔의 몸에서 점점 힘이 빠지자 그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가람이 힘으로 그의 몸을 추슬러 보았다.

    “형, 왜 이래요? 영호 형! 영호 형, 솔이 형 이상해요!”

    다리가 완전히 풀려 버린 솔은 축 늘어진 고양이처럼 가람이 아무리 일으키려 해도 제대로 서지 못했다. 천천히 무너지는 솔의 모습에 득용이 덜컥 겁을 먹고 영호를 불렀다. 거의 울 듯한 득용의 얼굴이 솔의 눈에 들어왔다. 덩치만 커다랗지 울먹이는 얼굴이 영락없는 애였다.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득용의 얼굴 위로 알림 창이 무수히 깜빡였다.

    상황을 인지한 영호가 ‘119’를 외치며 늘어지는 솔을 가람과 함께 붙잡았다. 멤버들 모두가 솔의 몸을 붙잡고 천천히 바닥에 눕혔다. 그때까지만 해도 솔은 모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백스테이지에 있던 스태프들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오늘은 정말 누구보다 잘할 수 있었는데, 결국 마지막에 가서 자신이 또 망쳐 버렸다. 무대 위에서 태오를 보며 웃던 그 순간에 멈출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저 얌전히 안정의 포션 따위 아끼지 말고 미련 없이 사용해 버릴걸. 왜 자신은 늘 바보 같은 선택을 하고 후회하는지. 자신을 내려다보는 익숙지 않은 얼굴이 하나둘, 늘어나자 솔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잘했어, 우리 아들.”

    뜬금없는 칭찬에 솔은 눈을 떴다. 잊어 본 적 없는 차량용 방향제 냄새. 예전엔 아무렇지 않았지만, 지금은 차에 타면 늘 솔의 속을 뒤집는 역한 냄새였다. 하지만 솔은 코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엄마.”

    창밖으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고속 도로의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다정한 목소리로 칭찬을 내뱉는 여인을 솔은 엄마라고 부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솔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는 고개를 돌려 뒷좌석의 솔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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