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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를 뽑고 싶어-143화 (143/192)

#143

이상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솔은 자신이 어떻게 변하든 항상 멤버들이 저를 놓지 않았으면 싶었다. 아니, 오히려 변할수록 더 단단히 붙잡아 주었으면 싶었다.

머릿속을 헤집는 생각을 솔은 고개를 크게 돌리며 털어 내었다. 이런 생각에 정신을 빼앗길 여유 따윈 없었다. 처음엔 솔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오던 손들이 움직임이 계속될수록 어느 순간부터 솔을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솔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점점 제 마음대로 저를 휘두르는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솔은 그것을 뿌리치다 뒤로 물러서며 쓰러지듯 몸을 기울였다. 솔의 뒤에 서 있던 태오가 무릎을 살짝 굽히며 가뿐하게 그의 몸을 받쳐 주었다. 모든 동작이 섬세하고 물 흐르듯 아름다웠지만 관절이 아플 정도로 동작 하나하나에 들이는 힘은 무척이나 강했다.

태오에게 기대어 거의 안겨 있다 싶었던 솔은 그의 손이 점점 몸을 옥죄여 오자 거칠게 움직였다. 태오가 밟기 쉽게 굽힌 그의 허벅지를 발 받침 삼아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상공에서 유유히 체공하듯, 하지만 화려하고 힘 있게 공중에서 회전했다. 매끄럽게 진행되는 안무에 안도하던 찰나, 무사히 착지만을 남겨 두고 솔에게 문제가 발생했다.

허벅지에 묶은 가죽끈이 문제였다. 솔이 회전하면서 양다리에 묶인 스트랩의 고정쇠가 서로 엉켜 버린 것이었다. 단단히 엉켜 버렸는지, 다리가 잘 벌려지지 않았다. 억지로 힘을 써서 벌렸다간 의상이 망가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착지가 문제였다.

안정적인 자세를 잡지 못한 솔이 자칫 그대로 무대 바닥에 처박힐 예정이었다. 찰나 같은 순간에 솔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최악의 상황이 스쳐 지나갔다.

다리에 힘을 주자 뒤늦게 엉킨 게 풀어지며 문제가 해결되었지만, 이미 솔은 지면과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이대로 착지한다면 어찌 되었든 안무에 영향이 갈 수밖에 없었다. 주춤거리거나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거나. 최악의 경우엔 넘어질 수도 있었다.

본래 1회의 점프만을 한 뒤 안전을 위해 그대로 착지하기로 상의가 되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솔은 돌발 행동을 택했다. 공중에서 턴을 하는 모습부터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고 순간적으로 판단한 태오는 본래의 제 위치보다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갔다. 태오가 앞으로 나와 자리를 잡자 멤버들 모두 자연스럽게 그와 엇비슷한 간격으로 조금씩 앞쪽에 자리했다.

늘 언제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태오가 평소와 다르게 위치를 잡자 가람은 그를 곁눈질했다. 눈 깜빡하는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태오의 눈길을 따라가는 데엔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제야 가람도 연습한 것과 다른 솔의 모습을 확인했다. 솔이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앉는 모습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 ‘넘어진다.’라는 생각이 강렬하게 떠올랐다. 반사적으로 솔을 붙잡으러 튀어 나갈 뻔했던 가람은 몸을 작게 들썩였다.

어젯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정확히 이 댄스 브레이크 구간을 걱정하던 멤버들에게 ‘잘 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고 말하며 제법 단호한 표정을 짓던 솔의 모습이 떠올랐다. 스치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멤버들과 솔에게는 하염없이 느리게만 느껴졌다.

솔은 계획된 착지 대신 낙법을 하듯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안정적인 착지를 할 만큼 충분히 다리를 벌리거나 자세를 잡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넘어져 마구 구른 것이 아니라 아주 멋들어진 동작이었다. 덕분에 볼썽사납게 넘어지거나 바지가 찢어지는 사고를 면한 솔은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으며 관객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를 향해 팔을 뻗었다.

무사히 멤버들의 손길에서 벗어난 솔은 아주 찰나 같은 자유를 맞이했다. 갑작스러운 사고와 임기응변으로 그의 심장이 막 결승선을 넘은 육상 선수처럼 미친 듯이 뛰어 댔다. 하지만 숨을 돌릴 시간도 없이 이내 그에게로 다시금 억압하는 손길들이 내뻗쳤다. 멤버들의 심장도 솔처럼 터질 듯했지만 겨우 쓸어내릴 수 있었다. 안도의 감정을 표현할 틈도 없이 솔의 착지 자리가 변경됨에 맞춰 멤버들 모두 길어진 동선대로 바삐 움직였다.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아 있던 솔은 제 등에 닿는 지호의 등을 느꼈다. 변수가 있었지만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지호의 등에 몸을 의지해 일으켜 세워 그를 돌아보았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하기도 전에 가람이 솔의 팔을 잡으며 휘감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당겨진 솔이 불가항력인 그 힘을 표현하고자 과장되게 몸을 기울이자 드러난 몸의 선을 타고, 커다란 태오의 손이 길고 흰 솔의 목덜미에 드리웠다. 단순히 경연만을 위해 며칠 사이에 만들어 낸 무대와 안무라 치부하기엔 지나치게 아름다웠고 우아하면서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노골적이었다.

조명이 빠르게 깜빡이고 음악 또한 박차를 가했다. 멜로디 뒤에 깔린 거친 숨소리가 금방이라도 큰일이 날 듯 빠르게 반복되었고 멤버들의 안무에도 더욱 힘이 들어갔다. 솔은 태오와 몸을 밀착시킨 채 우아한 탱고를 추는 듯 보였지만 그 안무 안에 담긴 감정은 스스로를 다치게 할 만큼 강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에 맞게 솔을 다잡는 손길과 동작 하나하나에 강한 힘이 들어가 너덜너덜해진 솔의 몸을 아프게 만들었다.

안정의 포션은 정신적 트라우마로 인한 상태 이상에서 솔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었지만, 육체적인 부분은 아니었다. 이미 멍으로 빼곡한 솔의 몸에 가람이 움켜잡은 손목, 방금 태오가 밀쳐 낸 어깨처럼 옷 아래로 몇 가지 흔적이 더 남았지만, 고도로 집중한 탓에 솔은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댄스 브레이크 구간이 거의 끝나가자 솔과 태오는 대열의 뒤로 물러섰다.

득용과 지호가 가람을 가운데에 두고 바통을 이어받았다. 파워풀한 군무로 카메라를 잡아끄는 사이 뒤에 몸을 숨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본 채로 숨을 골랐다. 깊은 물에 가라앉았다가 방금 물가로 올라온 것처럼 온몸이 공기를 갈구했다. 숨을 고르며 두 사람은 시선을 마주쳤다.

강한 조명과 격한 움직임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가 눈에 들어왔다. 길게 내린 앞머리가 솔의 젖은 이마를 덮어 그가 어깨를 헐떡일 때마다 눈꺼풀 위를 툭툭 건드렸다.

무대가 한창이었고 웃으면 안 되는 자리였다. 심지어 사고도 쳤다. 볼썽사납게 넘어지거나 크게 다치는 꼴은 면했지만 아무런 언질도 없이 돌발 행동을 했다. 제멋대로 안무도 바꿔야 했다. 연습하는 내내 솔이 과욕을 부려 비슷한 연계 동작을 연습했던 것이 신의 한 수였다. 한 번 해 본 적이 있었기에 다들 놀라지 않고 잘 대응해 줄 수 있었다.

절대로 웃음이 나올 상황이 아니었는데, 순간 태오의 까만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어쩐지 후련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난 며칠간 태오와 가람을 보며 끙끙거리기 바빴다. 웃고는 있지만 어색함이 티가 나는 웃음을 짓기 일쑤였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근래 들어 가장 아무 생각 없이, 후련하게 웃음을 지은 것 같았다.

지난 방송분에서 윙크랍시고 얼굴을 찡그리는 게 화면에 열댓 번은 나온 것 같았다. 지금 무대 위에서 웃어 버리면 그 장면 또한 분명 카메라에 다 잡힐 것이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오물거리는 솔을 보며 태오도 자꾸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자신이 통제하고 있어야 마음이 편안한 태오에게 솔은 정말 느닷없이 찾아온 통제 불가의 재난 같은 존재였다. 첫인사를 한 순간부터 그는 태오의 계획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었다. 하물며 태오가 솔을 좋아하게 된 것도 정말이지…. 그와 연관된 모든 일들이 돌발 행동이었다.

그 변수에, 돌발 행동에 짜증이 나고 화가 나야 하는데 이젠 그렇지 않았다. 조금의 감정도 상하지 않았다. 단단해진 마음에 스크래치조차 내지 못했다. 오히려 느닷없이 찾아온 성솔이란 변수가 가슴 벅차게 대견하기까지 했다. 솔을 통제하고 제 계획안에 넣는 것이 아니라 태오가 솔에 맞춰 변하고 있었다. 잘잘못을 떠나서, 제 계획에서 무엇이든 어그러지면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던 태오였다. 그런데 지금은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웃는 자신이라니.

태오는 솔을 보며 ‘이렇게 된 거 좀 더 다른 사람처럼 조금쯤 변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기적이더라도 같이 힘들어하고 슬퍼해 달라고 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말이었다. 그리 최악은 아닐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음악이 끝을 향해 치닫자 다시금 무대에 암흑이 내렸다. 붉은 레이저가 가운데를 향해 몰려들고 솔은 무대 중앙에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스포트라이트가 그의 머리 위에 떨어지자 어둠 속에서 멤버들의 손이 뱀처럼 슬그머니 기어 나와 솔의 몸에 휘감겼다.

태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HUSH’를 속삭이는 걸 마무리로 드디어 무대가 끝이 났다. 솔은 제 몸에 팔을 두르고 서 있는 태오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긴 한숨을 뱉었다. 후련함에 뱉은 안도의 한숨이기도 했지만, 눈앞에 떠오른 경고 창에 현실로 돌아오며 뱉은 탄식의 한숨이기도 했다. 마무리 동작 탓에 솔이 꼭 태오의 품에 안긴 꼴이 되었지만, 태오는 솔의 이런 행동에 의미를 두지 않으려 덤덤한 얼굴로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태오가 애써 평정을 유지하는 사이 솔은 그의 어깨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마침내 끝냈다는 뿌듯함과 약간의 허탈함. 탈력감이 밀려왔다. 그 여운을 즐기는 것도 잠시, 태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꾹 감았는데도 솔의 눈앞에 떠오른 민트색 창이 사라지지 않았다. 솔은 아주 짧은 고민을 했지만, 이번에는 감내하기로 선택했다.

[안정의 포션 효과 종료. ‘트라우마 저항’ 상태가 해제됩니다.]

어둠이 내렸던 무대에 다시금 환한 빛이 들어왔다. 멤버들 모두 돌아서서 무대를 지켜보고 있던 모든 참여자와 관계자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솔도 힘겹게 태오를 밀어내며 허리를 숙였다. 그제야 온몸이 아파 오기 시작했고 관객석에 앉은 참가자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종아리가 저릿저릿했고 숙인 허리를 다시 펴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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