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142화 (142/192)

#142

캄캄한 무대를 가로질러 리허설 때 미리 서 보았던 위치를 찾아갔다. 스크래치가 가득해 투명성을 잃어버린 아크릴판 위에 봐 두었던 테이프 자국이 살짝 남은 자리. 솔이 무대를 시작해야 하는 위치였다.

어깨를 살짝 들어 올렸다가 숨을 깊게 내쉬면서 힘을 풀어 팔을 축 늘어뜨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양 무릎을 바닥에 대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한껏 젖어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이 눈가를 완전히 가렸다. 솔은 무릎 꿇은 다리 사이에 두 팔을 교차해 축 늘어트렸다.

솔이 제대로 자리를 잡자 득용과 가람이 각각 그의 왼편과 오른편에 두 손을 모으고 섰다. 기럭지가 워낙 긴 두 사람이 손을 모으고 다리를 벌린 채 서자 묘한 압박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다음으로 태오가 대열의 정중앙에 섰다. 가람과 득용의 어깨 사이로 태오의 얼굴이 보였다. 정면을 강렬한 눈빛으로 응시하며 감정을 잡는 태오의 뒤로 지호가 섰다. 멤버 중 제일 장신에 체격 조건이 좋은 태오의 뒤에 지호가 서자 얼추 그 모습이 가려졌다.

준비가 끝나자 가람이 슬쩍 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곧 시작될 무대에 응원을 보내는 단순한 행동이었다. 이번 무대의 주인공은 솔이었다. 가람의 손이 솔의 어깨에서 떨어지자마자 무대에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불길하고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심장 박동처럼 일정하지만 낮고 작게 공기를 뱉어 내던 소리는 이윽고 박자를 만들어 냈다.

순간 불길한 느낌을 주는 붉은 레이저 조명이 무대 위로 펼쳐졌다. 여러 갈래로 뻗어 나온 붉은 선이 서로 교차하며 무대 중앙에 서 있는 멤버들에게로 옮겨 갔다. 이내 붉은 선의 끝이 가운데에 있는 태오에게로 모여들자 그의 머리 위에서 팟 하며 푸른색 조명이 쏟아져 내렸다.

재킷을 뚝 잘라먹은 것처럼 짧은 상의 아래로 탄탄한 복근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일종의 코르셋처럼 가죽 스트랩을 여러 개 겹쳐 채워 압박한 태오의 복장은 넓은 어깨와 모델처럼 잘빠진 태오의 몸매를 한껏 강조시켰다. 달리 골드 카드 의상이 아니었다.

가쁜 숨소리가 배경음으로 일정하게 깔리는 그 위에 태오는 정면을 맹렬하게 노려보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가람과 득용을 가르고 솔에게로 다가오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별거 아닌 행동이었지만 절도 있게 움직이는 태오의 모습은 카리스마 있었고 순식간에 무대에 몰입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무대를 지켜보고 있는 모든 이들이 태오의 그 동작 하나에 휘어잡혔다.

“Shh- HUSH.”

태오의 낮은 목소리가 작게 베이스처럼 깔리는 가쁜 숨소리와 어우러졌다. 태오가 ‘HUSH’를 나지막이 속삭이는 순간 무대를 지켜보던 몇몇은 정말 크게 숨을 들이켰다. 붉은 조명과 푸른 조명이 한데 뒤섞이며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HUSH, HUSH. What do you want me to do.”

태오의 다리가 솔의 등에 닿을 정도로 바짝 다가서자 솔은 천천히 허리를 펴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태오가 손을 뻗어 솔의 목 언저리에 손바닥을 올렸다. 실제로 접촉은 없었지만, 솔은 태오가 휘두르는 인형처럼 그의 손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줄로 연결된 꼭두각시를 조종하듯 솔의 몸이 이리저리 휘둘렸다. 태오와 짝을 이룬 안무가 마무리될 때쯤, 어느새 솔은 온전히 몸을 일으켜 세워 무대 중앙에 서 있었다. 파트가 끝난 듯 대열에서 이탈하려 옆으로 빠지는 솔을 태오의 손이 거칠게 잡아 와 다시금 중앙에 세웠다.

솔의 뒤에서 미끄러져 들어온 태오의 손이 그의 입을 가렸다. 그러고는 뺨에 입술이 닿을락 말락 몸을 밀착하고는 천천히 웨이브를 하며 속삭이는 듯한 시늉을 했다. 모두 안무의 한 동작이었다.

“쉿. 대답은 들은 걸로 할게.”

쿵쿵 무대 바닥을 울릴 정도로 커다란 음악, 쉼 없이 번쩍이는 조명과 계속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멤버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 가죽 의상과 그 위에 걸쳐진 온갖 장식물들이 내는 소리,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태오의 목소리. 한 공간에 너무 많은 소리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 모든 소리를 뚫고 태오의 노랫소리만이 솔의 귓가에 꽂혔다.

인이어를 착용한 솔의 귀엔 태오의 목소리와 숨소리,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모든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 천천히 손을 쓸어내리며 짧은 숨을 뱉는 소리까지 태오의 모든 소리가 마치 귓속에서 울려 퍼지듯 조금의 거리감도 없이 선명하게 들렸다.

솔은 거의 몸에 배 버린 습관처럼 가슴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태오의 손을 붙잡아 턴을 하며 무대 중앙에서 비켜났다. 동시에 태오도 솔과 반대편으로 크게 돌아 다른 멤버들의 뒤로 이동했다. 태오와 솔이 중앙에서 비켜나자 그 뒤에 가려져 있던 지호가 검지를 입술에 대고 비딱하게 걸으며 나타났다.

“다른 것은 필요 없어. 네가 원하는 건 나잖아.”

중앙을 차지한 지호를 두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멤버들은 칼 같은 군무를 춰 보였다. 박자에 맞춰 딱딱 들어맞는 안무엔 지난 며칠간의 고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내 모든 걸 가져도 돼.”

이윽고 다섯 명 모두가 일제히 손목을 교차시켰다. 마치 손목에 수갑이라도 찬 듯, 보이지 않는 투명한 끈에 포박된 듯 손목을 교차한 멤버들이 상체는 고정한 채 하반신만을 끈적하게 움직였다.

HUSH는 자신의 모든 걸 줄 테니 가져도 된다고 말하며 사실상 포로가 되는 것은 상대방인, 벗어날 수 없는 치명적인 유혹에 관한 노래였다. 가사에 큰 변화 없이 그저 성별만을 바꿔 멤버들은 무대를 이어 갔다.

“Let me do it, 이것만 기억해 지금부터 넌 좋은 꿈을 꾸는 거야.”

지호가 빠져나가고 그 빈자리를 득용이 채웠다. 어디 하나 훤히 뚫린 구석이 있는 멤버들의 의상과 달리 득용만이 맨살을 노출하지 않았다. 어디 한 군데 구멍이 뚫려 있는 다른 멤버들의 의상과 달리 오히려 꽁꽁 싸매고 조금의 노출도 없이 스트랩을 가득 묶은 득용의 의상이 어째서인지 한층 더 섹시해 보였다. 정작 본인은 노출에 자신 있다며 제가 나서서 벗겠다고 아우성치었지만 말이다.

득용의 랩이 끝나자 바로 지호와 가람의 후렴이 이어졌다. 그야말로 뼈를 깎는 연습에 무대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매끄럽게 흘러갔다. 매번 1절이 끝나고 댄스 브레이크를 가졌던 지난 무대와 달리 이번에는 바로 2절이 시작되었다. 노래에 대해 아직 부담감과 부끄러움을 안고 있는 솔이 온전히 안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의견을 모은 결과물이었다. 고난도의 동작을 수행해야 하는 솔에게 심리적 부담감을 최대한 덜어 주기 위한 배려였다.

“HUSH, HUSH. Are you really here to cut me off.”

뒤쪽에서 충분히 숨 돌릴 시간을 가진 솔과 태오가 앞으로 나오며 후렴을 끝낸 가람과 지호가 중앙에서 비켜났다. 처음 시작했던 때처럼 태오가 앞으로 걸어 나오며 2절의 시작을 알리자 자연스럽게 다섯 명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산개해 대열을 맞추고 안무를 이어 나갔다.

각이 칼같이 들어맞은 대열을 흐트러뜨리며 솔이 검지를 입술 위에 가져다 댔다. 그저 입 근처에서 가져다 대기만 하면 되는 동작인데 솔은 검지로 제 입술을 정말 꽉 눌러 버렸다. 입술 화장이 살짝 번지며 그의 손가락에 묻어났다.

“정말 나를 떠날 거야? 네가 원하는 건 나잖아.”

강한 조명 아래에 하얀 얼굴, 살짝 번진 립과 내리깐 눈. 유혹하는 가사까지 본인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모든 것이 컨셉과 맞아떨어져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내 모든 걸 가져도 돼.”

흔들림 없는 솔의 고아한 목소리가 무대 위에 울려 퍼졌다. 이윽고 다시 속박을 의미하는 안무가 반복되었다.

솔이 그 손길을 거부하듯 강렬하게 움직이자 하나둘, 휘감겼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뒤에 서 있던 태오는 여전히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벗어날 수 없게 말이었다. 태오는 솔을 뒤에서 끌어안다시피 팔을 두르고 그의 어깨 너머로 얼굴을 드러냈다. 그러곤 카메라를 집어삼킬 듯 노려보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Shh- HUSH.”

이윽고 소리를 내뱉는다는 느낌보다는 거의 숨을 토하는 느낌으로 지호가 후렴을 마무리 짓자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 사이로 다시금 가쁜 숨소리가 차올랐다.

“NOW.”

어느새 자리가 바뀌어 무대 중앙에서 서 있던 가람의 나지막한 한마디와 시작된 비트 드랍. 스피커를 쿵쿵 울리는 베이스와 상반되는 일렉트로닉한 고음의 멜로디가 반복되었다. 이제부터가 솔의 시간이었다. 비트 드랍에 맞춰 조명이 꺼지고 이번에는 무대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잠깐의 암흑에 맞춰 몸을 재빨리 움직인 멤버들은 솔을 에워쌌다. 태오는 솔의 등 뒤에서, 가람과 득용은 각각 솔의 왼편과 오른편. 그리고 솔의 앞에는 한쪽 무릎을 꿇은 지호가. 쉬이 빠져나올 수 없는 늪 같은 유혹을 표현한 손이 솔의 몸을 휘감았다. 이 잠깐의 시간이 솔에게 숨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거칠어진 숨을 다잡으면서도 카메라에 흐트러진 모습을 내보이지 않게, 마치 태오처럼 솔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음악에 맞춰 솔이 몸을 기울이자 그의 몸 위에 둘러진 팔들이 함께 따라왔다. 연습하는 내내 솔은 꼭 이 안무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 같다 느꼈다. 무슨 거창한 유혹이나 늪 이런 게 아니라, 태오를 향하는 마음과 가람이 자신에게 보내는 마음, 어긋나고 싶지 않은 지호와 득용과의 관계. 모두의 손을 꼭 잡고 어느 하나 놓을 수도, 어느 하나에 치중할 수도 없다고 생떼를 쓰고 있는 자신 말이었다.

늘 오롯이 중심일 순 없는데, 사람이란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그때엔 지금 추고 있는 안무처럼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도 다른 손이 더 다가와 강하게 붙잡아 준다면 좋겠지만, 대다수는 그 기울임을 버티지 못하고 힘에 부쳐 놓아 버릴 것이었다. 솔은 그렇게 멤버들이 손을 놓을까 봐 노심초사했다. 솔을 따라 기운 쪽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를 붙잡아 주는 다른 손이 없다면 결국 혼자 남은 그 누군가가 모든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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