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금색으로 테두리가 반짝이는 카드가 회전하고 그 안에 이미지가 나타났다. 솔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다시 한번 가챠를 돌릴 필요는 없을 듯했다.
검은색 가죽으로 이루어진 정장이었다. 거기에 전에 한번 차 본 경험이 있는 체인과 가죽 스트랩이 더해진. 다소 타이트하고 몸을 많이 묶은 의상이었다. 사실 가죽에다 이런 액세서리가 많은 의상을 입으면 당연히 춤을 출 때 거슬리기 마련이었다. 혹은 의상이 망가지든가.
고난도의 여러 트릭킹 동작이 들어가 있는 안무 구성에 이런 의상이 부담스러울 만도 했지만, 솔은 개의치 않았다. 솔이 제일 조심해야 할 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도망치려 하는 자신, 나약해지려 하는 자신.
솔은 미련 없이 금색으로 반짝이는 카드를 선택했다. 컨셉 설정이 완료되었다는 짤막한 메시지를 확인하였음에도 솔은 화장실을 나서지 않았다. 잠시 이 좁은 공간에서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었다. 연습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천장과 벽을 타고 쿵, 쿵 진동으로 전달되었다. 벽을 타고 전달되는 소리는 꽤 웅성거려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수없이 반복해서 들은 곡이다 보니 솔의 머릿속에선 아주 또렷했다.
잠시 머리를 비우고 홀로 쉬고 싶어 숨어든 화장실이었는데, 막상 노래가 울려 퍼지자 솔은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따라 부르며 발을 들썩거렸다. 몸에 완전히 익어 버린 스텝을 사뿐사뿐 밟으며 흥얼거리던 솔은 갑자기 음악 소리가 끊기자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지금 여기서 나가 당장 연습실로 돌아가야겠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솔은 열기가 식어 서늘해진 몸을 일으켜 터덜터덜 연습실로 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불편하건 힘들건 어떻건 그곳이 제 자리였다. 힘들어해도 거기서 힘들어해야 했다. 그런 소속감 같은 것이 의식하기도 전에 솔을 찾아왔다.
***
“다들 문제없지? 컨디션 확인.”
“네! 컨디션 좋아요!”
빨대가 꽂힌 생수병을 건네며 외치는 영호의 말에 득용이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컨디션 좋다며 밝게 웃는 얼굴과 달리 득용의 온몸에선 파스 냄새가 진동했다. 솔은 늘 활기찬 득용을 보며 영호가 건네준 생수만 홀짝였다.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길게 내린 앞머리가 속눈썹 위에 앉아 자꾸만 신경에 거슬렸다. 반사적으로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대던 솔을 지호가 제재했다. 그러곤 본인의 손가락으로 살살 앞머리를 헤쳐 눈꺼풀 바로 위에서 치워 주었다.
머리에 무언가 잔뜩 뿌려 바르곤 막 샤워를 마친 것 같은 느낌이라며 스타일리스트는 ‘크’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다들 이쁘다 해 주니 그러려니,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고 손길을 받아들였다. 청량감이 가득하고 다소 어려 보이게, 또 반짝이는 화장을 주로 했던 그간의 무대와 달리 이번 메이크업은 꽤나 진하고 어두웠다. 눈가를 붉게 만들고 밝은색의 컬러 렌즈까지 끼었다. 입술에도 뻑뻑하리만치 화장품을 잔뜩 발랐는데 솔은 이번 메이크업과 헤어가 사실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보기엔 제 모습이 그저 우울한 물에 빠진 생쥐 꼴 같아서였다.
주변의 반응은 남달랐다. 요정처럼 반짝거릴 때도 흠잡을 곳 없었지만 다소 어두운 느낌이 솔의 서늘하고도 냉한 마스크와 맞물려 ‘퇴폐미’의 아이콘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솔은 대기실 안을 쓱 둘러보고 눈썹을 살짝 찡긋거렸다. 자신이야 문외한이고 전문가들이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못 봐 줄 꼴이었다면 득용이 제일 먼저 손가락질하며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솔은 흘깃, 가람을 곁눈질했다. 얼굴 한가운데에 치렁치렁 불편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체인을 건 가람보다는 나은 듯했다.
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가람이 솔과 눈을 마주치며 살짝 웃음 지었다. 그가 웃자 솔은 황급히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회피했다. 태오는 그날 이후로 이전처럼 세심하게 나서 솔을 챙기지 않았다.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어도 애써 꾹 눌러 참는 중이었고 가람은 솔이 의도적으로 피하는 중이었다.
그러자 그 빈자리를 맏형인 지호가 치고 들어왔다. 솔이 다시금 생수병에 꽂힌 빨대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오물거리자 지호가 슬쩍 생수병을 붙잡았다. 솔은 인지하지 못한 듯했지만, 조금 전 영호가 건넨 한 병을 거의 다 마셔 가는 참이었다.
“솔아, 물배 차서 뛰지도 못하겠어.”
“어….”
“긴장했어?”
옆에 딱 붙어 앉은 지호의 물음에 솔은 고개를 내저었다. 안정의 포션 효과는 아주 잘 적용되어 있고 상태 창 어디에도 긴장이나 트라우마 같은 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대에 서서 춤을 추고 노래하는 데에 부담감이 없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다른 종류의 부담감을 가지고 있어서겠지.
피차 태오도 마찬가지이고, 가람도 솔이 의도적으로 저를 피하는 낌새를 눈치채서일까. 오늘의 대기실 분위기는 유난히도 가라앉아 있었다. 득용도 그 기류를 느꼈는지 어떻게든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조금 전부터 괜히 방방 뛰고 있었다.
“다들, 잠깐만 집중해 주세요.”
애쓰는 득용과 지호를 보다 못한 태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리더의 부름을 기다렸다는 듯이 득용이 단번에 고개를 돌려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저마다 다른 생각 중이었던 멤버들이 태오의 앞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편하게 지내는 평소와 달리 태오가 존댓말로 말을 시작하자 솔도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를 제대로 바라보았다.
늘 이렇게 모두가 모인 자리나 공지 사항을 전달할 땐 존댓말을 쓰는 태오였다. 공과 사를 분리하는 느낌이 들어 그가 존댓말을 쓸 때 솔도 비교적 편안히 그를 볼 수 있었다.
“다들 이번 한 주가 꽤 힘들었죠. 이번 무대까지 끝내고 나면 그다음이 생방송이에요.”
태오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생방송’, 사실상 데뷔나 마찬가지였다. 앞선 무대 점수, 거기에 인기 투표와 다름없는 시청자 투표 점수의 합산. 사실 이번 무대를 완전히 말아 먹지 않는 한 솔이 속한 7조가 생방송에 진출하는 건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크게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무대였지만, YC 몰아주기라든가 솔에 대해 가타부타한 말을 집어넣기 위해서라면 확실한 순위권으로 생방송 진출을 확정 지어야 했다. 물론 솔이야 멤버들과 계속 사라지지 않고 함께하기 위해서라는 목표도 가지고 있었다.
멤버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서로 눈을 맞췄다. 가람과 태오의 시선을 피하던 솔도 이번에는 제대로 눈동자를 마주하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잠시 감정은 내려놓고 현재에 집중할 때였다.
갑자기 득용이 허공에 손을 내밀었다. 큼직한 막내의 손등이 의미하는 바를 캐치하지 못한 솔은 그저 멀뚱히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솔의 옆에 서 있던 지호가 득용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개었다. 그러자 그다음으로 가람도 손을 얹었다.
차곡차곡 포개어지는 손등을 보며 그제야 그 행동의 의미를 파악한 솔도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태오가 조금 더 빨랐다. 가람의 손 위에 핏줄이 도드라진 태오의 손이 포개어졌다. 솔은 주춤하다 이내 태오의 손 위에 제 손을 살포시 올려 두었다. 본의 아니게 맞닿은 피부를 타고 두근거림이 전해지는 듯해 솔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1등 합시다!”
득용이 멋이라곤 조금도 없이 우렁차게 외치곤 손을 팟 들어 올렸다. 별것 아닌 그 행동에 대기실에 있던 모든 사람이 힘을 얻었다. 얼굴엔 미소가 떠올랐다. 솔은 멤버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서서 제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조금 전에 맞닿았던 온기와 두근거림이 아직 손바닥에 남아 있는 듯했다. 붉어진 손바닥을 빤히 내려다보던 솔은 자기 왼손과 오른손을 포개어 기도하듯 꽉 깍지를 꼈다.
“얘들아, 이제 준비하자. 다다음이야.”
잠시 대기실을 나섰던 영호가 다시 돌아와 준비를 재촉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스타일리스트가 멤버들의 옷매무새를 다듬기 시작했다. 야무진 손길의 그녀는 솔의 허벅지에 채워진 스트랩을 단단히 조이며 여러 차례 괜찮냐 되물었다. 솔은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기도, 뒤로 쭉 뻗어 보기도 하며 움직이는 데 큰 문제가 없어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하반신을 크게 움직일 때마다 가죽 바지가 팽팽하게 당겨져 피부를 압박하는 감촉이 썩 편안하진 않았다.
장식이 많은 바지에 신경 쓰는 스타일리스트와 달리 솔은 사실 상의가 더 신경 쓰였다. 등 뒤가 트여 움직일 때마다 맨살이 훤히 드러나 서늘한 느낌이 났다. 찜찜한 느낌에 거울에 등을 비춰 보며 어깨를 한껏 웅크려 재킷을 팽팽하게 만들어 본 솔은 생각보다 적은 노출에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호가 장난기가 발동했는지, 맨 등이 노출된 옷 틈 사이로 지호가 손을 쑥 밀어 넣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며 머리털이 쭈뼛했다.
“미안,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어.”
깜짝 놀란 솔이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펄쩍 뛰어오르자 범인인 지호가 머쓱해하며 솔을 붙잡고 사과했다. 커다랬던 자신의 반응에 민망해진 솔이 얼굴을 붉히며 벌어진 옷자락을 잡아당겨 보려 팔을 뒤로 퍼덕였다.
“장난 그만하고, 이제 나가자. 얘들아.”
“잠시만요.”
영호가 박수를 짝짝 두 번 치고 유치원생을 통솔하는 선생님처럼 말하자 가람의 페이스 체인을 손봐 주던 스타일리스트가 다급하게 외쳤다. 시간이 임박해 올수록 가라앉았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정신없이 분주한 느낌이 되었다.
마침내 무대에 오를 준비를 끝낸 멤버들은 복도를 지나 무대 백스테이지에 대기했다. 바로 앞선 다른 참가자들의 무대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아 조명이 쉼 없이 번쩍이고 귓가를 울리는 커다란 노랫소리가 연신 흘러나왔다. 무대 뒤에서 살짝 틈새로 보이는 다른 사람의 무대는 땀 냄새가 물씬 나고 보는 이도 숨이 막힐 듯 차오르게 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솔은 오롯이 지금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내 무대, 우리 무대도 저렇게 보일까?’
다른 참가자들처럼 열정적이고 힘차고 모든 것을 쏟아부은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렇게 보이고자 한다면 당연히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겠지. 이번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정말 무대에만 집중해 보자. 솔은 고개를 살짝 주억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