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태오는 얼굴에 커다란 블랙홀이 생긴 듯, 입술이 말려 들어갈 것 같았다. 아예 입이 사라져서 아무 말도 못 하게 되는 편이 속 편하지 않을까.
‘고백’.
그런 무책임하고 모두를 힘들게 할 만한 행동을 마음이 이끈다는 이유 하나로 쉽게 내뱉을 수 있는 위인이 아니었다. 어찌 보자면 그 정도 용기도 없이, 혹은 감정에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윤태오의 최선이고 윤태오가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수군대던 연습생들의 말대로 불운의 아이콘이지 않은가. 공개 오디션으로 말뚝처럼 소속사에 눌러앉아 데뷔도 못 하고, 집이 풍비박산이 나고. 그런 주제에 연애? 사랑? 언감생심이었다. 책임감이 강한 태오에게 그 말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침몰하자는 말처럼 들렸다. 더불어, 함께 활동해야 하는 ‘팀원’이었다. 게다가 그를 마음에 둔 다른 멤버도 있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태오가 보기엔 솔은 이미 충분히 제 삶으로 버거워 보였다.
가타부타 자세한 사정까지 속속들이 얘기해 주지 않지만, 그간 봐 왔던 모습과 단편적으로 나누었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이미 제 삶으로 버겁고, 그 버거움을 어떻게든 이겨 내려고 하는 사람에게 자신이란 짐을 더 얹어 줄 수는 없었다. 누군가는 둘이 함께 이겨 낼 수 있다고 하겠지만 태오는 그런 것들이 마음의 부채감으로 남는 사람이었다.
태오에게 제 마음을 이실직고하는 일은 그야말로 최악의 선택지였다. 그리고 태오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그런 선택을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돌아올 후폭풍이 무서워서라기보단 모두가 힘겨워할 테니까. 기꺼이 희생을 감내하는 것이다.
그리고 태오는 그런 삶에 익숙했다. 다만 익숙하다고 해서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솔의 말에 일말의 희망을 얻었던 그의 마음이 물먹은 솜보다 더 무거워졌다. 차라리 솔의 이런 밀어냄이 그에겐 잘된 일일지도 몰랐다. 솔의 말대로 너무 가까워져서 곤란한 건 태오 자신이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 해도 그 끝이 밝을 수가 없다는 결론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단순히 혼자 고통받는 일이었다면 그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해도 시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은 그럴 수가 없었다. 모두를 위해서라도 접어야 하는 마음이 맞았다.
태오는 무척이나 단호한 사람이었다. 특히나 타인에게 민폐가 될 만한 일에서는 단칼에 잘라 내 다소 냉정하다는 평도 듣곤 했는데, 처음 느껴 보는 이 감정에선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윤태오 인생에서의 첫사랑이었다. 흔히들 첫사랑은 영원히 첫사랑이라고 하니, 아마 영원히 이 감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지도 몰랐다.
“…태오야.”
“성솔.”
두 사람이 서로의 이름을 동시에 불렀다. 목소리가 겹치자 태오와 솔 모두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태오가 솔에게 먼저 말하라는 듯 고갯짓을 했지만, 솔은 우물쭈물했다. 사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의 이름을 불렀는지, 솔도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이 이상하고 불편한 분위기에 휩싸여 충동적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말과는 달리 태오와 지금보다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솔은 고개를 내젓고 태오에게 먼저 말하라 양보했지만 정작 태오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도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제 눈치를 살피고 걱정이 가득한 솔의 얼굴을 확인한 태오가 먼저 손을 들었다. 그의 뜻을 존중해 주기로 말이었다.
“걱정하지 마.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우린 계속 같은 팀일 거고 여전히 친구일 거야.”
“…….”
“단지 조금 더 친한 친구와 상대적으로 덜 친한 친구가 있을 뿐이야.”
“…응.”
‘덜 친한 친구’. 여기서 솔과 태오, 두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는 건 ‘덜’이 아니라 ‘친구’였다. 오래 굶은 것처럼 어딘지 배 속이 텅 빈 느낌이 되었지만, 솔은 태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실 밖, 복도가 소란스러운 것 같더니 득용이 우렁찬 목소리로 연습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지호 형 변태야!’ 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들어오는 바람에 태오와 솔, 두 사람 모두 하려던 말을 황급히 집어삼켰다. 그러곤 자연히 솔깃할 수밖에 없는 득용의 말에 시선을 돌렸다.
“변태, 변태.”
득용이 장난기 많은 아이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며 연습실을 마구 뛰어다녔다.
“야! 김득용!”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놀림의 대상이 된 지호도 덩달아 득용을 잡겠다고 함께 뛰어다녔다.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던 연습실의 분위기가 놀이터처럼 활발해졌다. 덩치만 커다랬지, 두 남자가 서로를 놀리고 잡겠다며 장난치는 모습이 영락없는 초등학생 같았다.
지호를 피해 요리조리 도망을 다니던 득용이 솔을 덥석 붙잡았다. 저보다 작은 솔을 방패막이로 삼은 득용은 지호가 손을 뻗을 때마다 그 방향으로 솔의 몸을 밀어내 방어했다. 결국 솔을 가운데 두고 득용과 지호가 서로의 손을 콱 붙잡았다. 졸지에 가운데 갇힌 모양새가 된 솔은 어리둥절한 상황에 ‘하하’ 하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오가 느닷없이 난입해 꼬리잡기하는 방해꾼들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태오가 묻자 득용이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서 솔을 와락 끌어안으며 대답했다.
“아니, 태오 형. 가람 형이 지호 형한테 거친 숨소리? 그런 것 좀 녹음하게 내 달라고 했단 말이에요?”
커다란 득용이 일부러 허리를 숙여 솔의 어깨에 제 턱을 괴고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득용이가 말을 할 때마다 그의 턱이 솔의 어깨에 압력을 가했다. 솔은 아무렇지 않게 득용의 팔을 끌어당겨 제 허리에 둘렀다. 조금 전, 태오를 거칠게 밀어내 문제가 생겼던 것과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득용에게 향했던 태오의 시선이 절로 솔의 허리춤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태오는 솔을 포함한 누군가가 제 시선을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돌렸다.
“그런데 지호 형이 하아, 하아, 하아아… 이러는 거예요.”
솔의 어깨에 기댄 득용이 지호를 흉내 낸다며 가쁜 숨을 내뱉자 그 숨이 솔의 뺨과 목 언저리를 간지럽혔다. 소름이 쫙 끼치는 간지러움에 솔은 목을 움츠렸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한껏 들어 올려 자라처럼 목을 짧게 만든 솔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가 자신이 웃었단 사실에 아차 싶어 태오의 눈치를 살폈다. 태오를 보며 재빨리 정색했던 솔은 득용을 보고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 양쪽 장단에 다 맞추려니 오락가락 정신이 없었다.
“쓰읍! 내가 언제 그랬냐.”
“아, 진짜 그랬다니까요.”
득용이 계속 반복해서 거친 숨을 내뱉자 허리를 굽히고 간지러움을 참지 못해 바들바들 떨며 몸을 비틀었다. 그 모습에 지호가 주먹을 움켜쥐곤 득용의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진정 때릴 생각도 없었지만, 득용은 여전히 솔을 끌어안은 채로 휙휙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솜방망이 같은 지호의 주먹을 피했다.
“형은 순수하게 열심히 춤을 춰서 호흡이 거친 거라고 생각하면서 열연한 거거든.”
“누가 봐도 아니었는데, 완전 야한 숨소리 그 자체였는데.”
“야! 청소년! 이게 머리에 음험한 생각만 가득해서 말이야. 뭐? 형의 야한 숨소리?”
지호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역으로 득용을 공격했다. 두 사람의 말다툼에 태오와 어색해진 빈 공간을 채웠다. 한편으로 다행이란 생각이 들면서 이런 식의 회피에 익숙해져선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공존했다. 그래도 그 우울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두 사람이 솔을 가운데에 두고 정신을 쏙 빼 놓을 만큼 정신없이 군 덕이었다.
“득용이 어디 갔었나 했었더니…. 거기 가 있었구나.”
그나마 분위기가 조금 풀리자 솔도 쭈뼛거리며 웃음 짓곤 득용의 행방에 대한 의문을 풀었다. 그러자 솔의 말에 득용이 입을 댓 발 내밀었다.
“헐…. 저 형들한테 말하고 나갔잖아요.”
득용은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태오와 솔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솔 또한 반사적으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태오도 전혀 인지하지 못했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어…. 그랬어? 미안, 못 들었어.”
“힝. 저한테 관심 좀…. 너무해. 막내한테 관심을 좀 주세요.”
득용은 속상하다며 우는 시늉을 하곤 자기가 연습 중인 태오와 솔에게 무어라 말을 하고 연습실을 나섰는지 재방송을 해 주었다. 태오도 솔도 다른 것에 신경이 쓰인 탓일까. 득용의 말을 들은 기억이 없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그리고 결국 그 때문에 이 사달이 났고.
소강상태가 된 지호와 솔이 토라진 득용을 살살 구슬려 달래는 사이. 가람이 녹음실을 정리하고 들어와 연습실 구석으로 향했다. 의자 위에 들고 온 노트북을 내려놓던 가람은 모퉁이에 설치된 카메라에 불이 꺼진 것을 발견했다.
“이거 카메라 꺼졌네? 배터리가 없나?”
“아!”
“아.”
가람의 말에 태오와 솔이 동시에 탄성을 내뱉었다. 태오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였지만, 솔은 놀란 것처럼 큰 소리를 내었다. 묘한 두 사람의 반응에 가람이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오는 시선에 태오가 슬쩍 솔을 곁눈질했다가 덤덤히 대답했다. 태오가 먼저 나서지 않으면 또 괜히 솔이 버벅거리다가 가람에게 오해를 살 것이 분명했다.
“내가 잠깐 껐어.”
“……왜?”
가람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가 싶더니 ‘대체 왜?’라는 의문이 담긴 눈으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묘한 눈초리에 솔이 손을 번쩍 들고 다급히 변명했다.
“어어. 잠깐 옷 좀 정리하느라….”
“옷을…?”
솔의 변명에 태오는 획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곤 가람도 솔도 보지 못하게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이지 솔은 거짓말에 조금의 재능도 없었다.
“아니!!! 연습하다 보니까 오, 옷이 흐트러져서….”
가람의 이상한 표정과 마주하자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떠오르며 순간 제 변명이 얼마나 이상하게 들릴지 인지한 솔이 변명을 덧붙였다. 그러자 가람은 무언가 찜찜하긴 한지, 아리송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곤 카메라의 전원을 켰다. 다시금 카메라에 붉은빛이 돌아오자 적어도 렌즈 속에 비치는 모습은 평범한 여느 때로 돌아온 것 같아 보였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달라진 태오와 솔의 분위기에 가람이 조용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데면데면해진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기쁘지도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