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편하게, 솔직하게 얘기해 줬으면 좋겠어. 우리 다음 촬영 이제 3일 남았어. 혹시 내가 불편해서 연습이 어려운 거라면 대책을 세워야지.”
“…그게.”
무척이나 침착하게 말을 하지만, 태오의 목소리에서 미묘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런 거 아니라고, 아무 문제 없다고 대번 대답해야 했었는데 이번에도 쉬이 말이 나오지 않아 솔은 변명하려다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어?”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에 솔은 땀에 젖은 제 머리카락만 마구 헤집었다.
“혹시 불편한 게 있었으면 말해 줘. 그래야 사과하고 고치지. 불편한 상태로 계속 지낼 수는 없잖아.”
태오의 말이 맞았다. 남은 시간 사흘,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인데 감정에 발목이 잡혀 헤매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자신이 팀을 망칠 게 분명했다. 무대 위에서도 이런다면 이번에야말로 지난 성적의 만회는커녕 정말 탈락할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퀘스트도 실패하고 결국 자신은 사라지게 되겠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퀘스트 생각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모든 것을 망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혹여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기회가 생긴다 해도 이곳을, 멤버들을 택하겠다고 결정한 솔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또 이전처럼 자신이 모든 걸 망쳐 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탈락하면? 퀘스트에 실패해 자신이 사라져 버리면? 솔은 고개를 들어 태오를 바라보았다. 검은 두 눈동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더 어둡고 깊어 보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윤태오.’
3일 뒤, 무대를 망쳐 버리면 자신이야 두 번의 실패를 탄식하며 사라지게 되겠지만 그건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의 인생을 그르치게 하는 일이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데뷔가 간절한 태오. 태오의 길에 재를 뿌리다 못해 또 그에게 기약 없는 기다림을 선사하게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또 자신을 좋아하는 가람에게도, 지호에게도, 득용에게도 모두의 삶을 짓밟는 짓이었다. 자신이 선택한 새로운 삶도.
솔은 무척이나 엄한 원장 선생님에게 매질이라도 당한 것처럼 눈이 번쩍하고 불꽃이 튀었다.
“태오, 네가 왜 불편해. 실수한 것도 없어.”
“…….”
솔은 웃어 보이며 뒤늦은 변명을 덧붙였다.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하는 솔의 변명에도 태오의 굳은 얼굴은 풀어지지 않았다. 윤태오에게 실수랄 게 뭐가 있을까. 하필이면 자신의 앞에 나타나 너무도 다정했던 게 실수라고 할까.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너무도 멋진 사람인 점이 실수라고 할까. 솔은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진짜야. 오늘 좀 힘들어서, 넘어질 거 같아서 그랬어. 땀도 너무 많이 나고….”
태오가 영 믿지 않는 눈치이자 솔은 제 말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일부러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가며 변명했다. 그러고는 평소처럼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쉬었다가 다시 하자. 미안, 이제 진짜 집중할게.”
솔은 태오의 팔을 붙잡은 채로 미안하다며 사죄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곤 젖은 머리에서 땀을 털어 내며 과장되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정말 힘들다는 듯, 태오의 팔을 붙잡고 의지하는 척하더니 이내 연습실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흐르는 땀을 훔쳐 내며 솔은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한참 헤드셋을 끼고 손짓하며 랩 연습에 열중이던 득용은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구석에 설치된 카메라만 눈에 들어왔다. 솔의 시선을 따라가던 태오도 카메라를 발견했다. 성큼 걸음을 옮긴 태오는 카메라 앞에서 손을 쭉 뻗어 녹화 버튼을 꺼 버렸다. 아무래도 더 할 말이 남은 듯했다. 태오의 눈치를 보며 솔은 돌아올 말을 가늠해 보았다.
앞서 솔과 나눈 말들이 카메라 안에 고스란히 녹화되어 있을 것이었다. 지금 녹화를 꺼 버린다는 것이 오히려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태오는 확실히 하길 원했다. 솔은 정말 거짓말에 소질이 없었다.
본인은 제 나름대로 잘 숨겼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표정이며 목소리 모든 것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티가 팍팍 났다. 솔이 그럴 때마다 파헤치고 지적하기를 오히려 더 불편해할 거 같아 못 본 척 넘어갔지만 지금 이 문제는 다른 무엇보다 확실히 하고 싶었다.
단순히 태오 자신을 불편해해서가 아니었다. 물론 좋아하는 사람이 날 꺼린다니 그것만큼 가슴 아픈 일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자신이 불편한 ‘성솔’이 중요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지만 솔이 자신을 불편해한다면 같은 방을 쓰는 것도, 이렇게 멤버로서 함께 연습하고 생활하며 활동할 때도, 늘 부담감과 불편을 안고 가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들이 솔을 힘들게 만들 거라는 걸 태오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확실히 정리해 두고 싶었다.
“성솔, 그동안은 네가 불편해하면 더 묻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말해 줬으면 좋겠어.”
지난밤, 나지막이 이름을 불러 줄 땐 무척이나 달게 다정했는데 오늘 태오가 부르는 제 이름은 유난히도 딱딱하다 느껴졌다.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태오의 태도에 솔도 웃음기를 지우고 얼굴을 굳혔다. 그동안 시간을 보내면서 느낀 거라면 태오에겐 어물쩍 웃어넘기는 것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이랑은 상황이 여러모로 달라졌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태오의 말이 대다수. 아니, 거의 늘 맞는 말이기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이번에도 태오의 말이 전적으로 맞았다. 그의 말대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사뭇 무거워지는 분위기에 솔은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태오는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조금의 웃음기도 없는 얼굴이었지만 화가 나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씁쓸해 보였다.
“무엇 때문인지, 이유까지 말하긴 싫다면 불편한지 아닌지 그것만이라도 확실히 알려 줘.”
“불편한 거 없다고 했잖아.”
태오의 말에 솔이 조금 불퉁하게 대답했다. 모난 어조로 말대꾸하고 나니 꼭 마치 처음 그를 만났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방어적으로 뾰족하게 나오는 솔의 반응에 태오가 어조를 누그러트렸다. 솔을 비난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 과정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기는 하겠지만 장기적으로 편안하게 해 주려 꺼낸 말이었다. 태오는 가벼운 농담을 던지듯,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솔을 바라보았다.
“성솔. 너 거짓말 잘 못해.”
“…….”
“다른 건 다 느는데 그것만 그대로더라.”
조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농담하듯 말하는 태오를 보며, 솔은 또다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마저도 태오의 말이 맞아 어처구니가 없기까지 했다. 연기 수업을 그렇게 듣는데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가 그렇게도 어렵다. 가식적인 사람이 되라는 게 아니라 적어도 타인을 상처 주지 않을 정도로 제 감정을 감췄으면 했다. 솔 자신이 정말 그쪽으론 영 재능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태오를 포함한 멤버들이 지나치게 눈치가 빠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며 다른 생각을 하는 솔을 보며 태오는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그가 끝내 이유를 말할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걸로 너한테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야. 우리 이제는 팀이고, 전처럼 하루아침에 누가 나가건 아무렇지 않은 사이가 아니잖아. 서바이벌도 진행하고 있고, 되도록 응어리는 푸는 게 좋지만 네가 그러고 싶지 않은데 강요할 생각은 없어.”
태오의 말에 솔은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태오의 말처럼 그가 이런 일로 솔을 괴롭힌다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한다거나 할 인물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 이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태오야, 잠깐만! 진짜 오해야.”
“멤버들이 신경 쓰지 않게 적당히 둘러대서 방 바꿔 줄게. 일부러 거실에서 버티지 않아도 돼.”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낮고 차분한 태오의 목소리와 가볍고 청아한 솔의 목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서로의 귓가를 간질였다.
“네가 나 때문에 피곤하진 않았으면 해.”
태오의 진심이었지만 그건 솔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마음인데 전할 길이 묘연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좀 더 능숙했다면 좋았을 텐데.
“네가 뭘 잘못해서나 네가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나는!”
“나는?”
“…….”
지금 솔이 무슨 말을 해도 태오의 눈엔 거짓이라는 게 훤히 보일 것이었다. 그렇다고 솔직히 말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뭐라고 말한단 말인가? 내가 사실 널 좋아해서. 너와 맞닿는 안무들이 부끄럽고 설레어서 그래서 피했다고? 단둘이 좁은 공간에 함께 있으면, 네 숨소리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되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고?
“너무…. 가까워지는 것도 도리어 불편할 거 같아서….”
겨우 쥐어짜 낸 말이었는데, 뱉고 나니 정말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뱉고 나서 솔 자신도 모르게 제 이마를 턱 하고 때릴 만큼 말이었다. 정확히 따져 보자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이상한 말이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솔의 궤변에 황당하기는 태오도 마찬가지인지, 마주 보고 선 얼굴이 어쩐지 풀어져 멍해 보였다. 태오의 그런 표정을 마주하기는 처음이었다. 그와 별개로 이상한 변명을 내뱉은 솔의 얼굴이 터질 듯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조금 전 헛소리를 내뱉기 전, 아니 아예 연습을 시작하기 전으로 되돌리고 싶었다.
솔은 이상한 궤변이라 자책했지만, 태오는 또렷하진 않아도 한 줄기 가능성을 본 것 같았다. 너무 가까워지는 것도 불편하다니. 그 말인즉 어떻게 보자면 지금 너무 가깝다, 혹은 더 가까워질 것 같다는 말이 되기도 했다. 혹시….
태오는 고개를 미세하게 살짝 저었다. 저 좋을 대로 제멋대로 곡해하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어찌 되었든 솔의 말은 거절이지 않은가. 더 가까워지기 싫다는.
불쑥, 억눌렀던 마음이 갑자기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래도 만약에, 어쩌면 솔도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이 있다면? 그래서 지금 거리를 벌리려는 거라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한번 머릿속에 자리 잡고 나니 무척이나 솔깃했다. 여차하면 지금 제 마음을 고백해 버릴까 하는 충동이 들 정도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