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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를 뽑고 싶어 (134)화 (134/192)

#134

솔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눈을 뜨고 제 이마에 입을 맞춘 가람을 바라보지도, 지금 무엇을 한 거냐 물어보지도 못했다. 이대로 눈을 뜨고 일어나서 가람을 본다 한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뭐라고 물어본단 말인가?

왜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냐, 날 좋아하냐고 물어야 하나. 갑자기 눈꺼풀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만약 가람이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자신도 태오에게 그런 감정을 품고 있으면서 감히 가람에게 무어라 말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람이 저를 좋아한다니. 가람을 위해서라도 그건 끔찍한 소리여야 했다.

저 같은 걸 좋아한다니, 그런 건 가람이 너무 불쌍했다. 그는 자신보다 훨씬 좋은 사람을 마음에 두어야 했다. 저처럼 혼자선 아무것도 못 하고 도망치기만 하는 비겁한 사람보다 다정한 그에게 상처 주지 않을 사람.

솔은 조금 전 일어난 접촉을 모른 척하기로 했다. 원래 허구한 날 까먹는 것이 특기 아니었던가. 잊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람은 계속 편곡하던 중이었고 자신은 지금 깊게 잠이 든 것이다. 그렇게 여기며 솔은 오지도 않을 잠을 청해 보았다. 당연하게도 쉬이 잠이 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놀란 것도 놀란 것이지만 가슴이 아팠다.

모른 척. 서주환을 짝사랑하면서 그 ‘모른 척’에 얼마나 아팠었지. 이제는 그 고통마저 흐릿했지만, 주환과 함께하는 내내 솔은 서주환이 차라리 매몰차게 제 마음을 거절해 주었으면 했던 때가 있었다. 차라리 그랬다면 덜 상처받았을 것 같아서. 솔은 지금 자신이 가람에게 그리 행동하는 것이 나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 가람과 영영 틀어져 버린다면 더욱이 끔찍할 것 같았다. 솔이 눈을 질끈 감고 고민하는 사이, 그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가람의 손이 솔의 손으로 옮겨 갔다. 심란한 마음 탓에 힘껏 움켜쥐어 하얗게 되어 버린 솔의 손가락을 구슬리듯 살살 펴는 가람의 행동에 솔은 혹 자신이 깨어 있음을 그가 눈치챘을까 싶어 놀라 숨을 집어삼켰다.

다행히도 그건 아닌지, 가람은 솔의 손가락을 펼쳐 그저 조용히 맞잡을 뿐이었다. 꽉 움켜쥔 솔의 손이 불편해 보였고 그저 잠시 닿아 있고 싶었을 뿐이었다. 가람은 그렇게 한참 말없이 솔의 손을 잡은 채 고요한 거실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솔은 맞잡은 손과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입이 바짝 말라 벌떡 일어나 가람과 잡은 손을 놓고 차가운 물을 벌컥 들이켜고 싶은 기분이었다. 자신이 옆에서 맴돌 때 서주환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태오도 앞으로 이런 기분이 될까. 솔은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바람이 부는 대로 제멋대로 흔들리다 꺾여 버릴 억새가 된 기분이었다.

솔의 복잡한 마음일랑 아랑곳하지 않고 고요한 거실에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만 가득 찼다. 맞잡은 손의 온도가 너무도 뜨거워 덴 것 같아 놓고 싶었다. 늘 그래 왔듯 자고 일어나면 오늘의 기억이 송두리째 사라졌길. 그러면 다시 즐겁고 편안한 관계로 돌아가 태오와 가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솔은 오늘만큼 기억에 공백이 생기길 바라본 적이 처음이었다. 자꾸만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는 자신을 질책했는데, 오늘만큼은 절실히도 필요했다. 다만 늘 그렇듯 본래 필요한 때엔 뭐든지 주어지지 않는 법이었다.

그렇게 말없이 솔의 손을 오래 잡고 있던 가람은 한참 만에야 끌어 쥔 손을 놓고 마침내 노트북을 덮었다. 그러곤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솔에게 ‘들어가서 자자’라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들었으면서 솔은 끝까지 모른 척을 했다. 가람도 구태여 아득바득 솔을 깨울 생각이 없었는지, 머리카락을 살짝 매만지고는 아주 작게, ‘잘 자’라고 속삭였다.

가람의 기척이 점점 소파에서 멀어지자 솔은 몸을 돌려 눕고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숨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솔은 화들짝 놀라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겼다. 아무래도 오늘은 편히 자기는 영 어려울 듯싶었다. 조용한 거실에 혼자 누워 있으니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가 여간 크게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간 딱히 인지하지 못했었는데. 째깍, 째깍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그 소리가 심장 소리랑 맞물려 괜히 불안감이 들었다.

갑갑함을 못 버티고 이불을 박차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방문이 열리고 태오가 밖으로 나왔다. 어두컴컴하니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제 방문이 열린 것이니 태오밖에 없었다.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던 솔은 다시 철퍼덕, 소파에 드러누워 자는 척을 했다. 자는 척하는 것도 퍽 힘이 들었다.

저벅저벅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째깍거리는 시계 소리에 겹쳤다. 기척이 가까워질수록 그 두 가지 소리 위에 솔의 심장 소리가 덧대어졌다. 귓가에 세 소리가 한데 겹쳐 시끄러웠다. 귓가를 마구잡이로 어지럽히는 소음을 뚫고 묵직한 저음이 거실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유난히도 낮은 태오의 목소리는 참 신기했다. 분명 정적을 깨는 소리인데도 정적과도 같은 고요함을 줬다.

“성솔.”

솔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오늘은 정말이지 여러모로 힘든 날이었다.

“솔아.”

솔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태오는 다시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더 낮고 은밀하지만, 윤기가 나는 까만 동물의 털처럼 한결 부드럽고 포근하게 불렀다.

솔은 하마터면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갑자기 왜 이리 그가 다정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지,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꼭 제 마음을 알고 놀리는 것만 같았다. 다른 멤버들과 다르게 늘 또박또박 성까지 꼭 붙여 ‘성솔’이라고 부르던 태오였다.

딱히 그렇게 부르는 것이 모나게 들린다거나 거리감이 들지는 않았었는데, 막상 이렇게 성을 떼고 이름만 부르니 너무도 다정하게 들렸다. 제 이름을 이렇게 부르는 태오의 얼굴이 궁금했다.

솔은 이쯤, 자는 척을 그만두고 일어나 태오의 얼굴을 확인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솔보다 태오의 행동이 더 빨랐다. 태오의 커다란 손이 불쑥, 이불 속으로 들어와 솔의 다리에 닿았다. 여린 오금 밑으로 들어온 단단한 팔뚝에 놀라 솔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내 반대 손까지 허리 밑으로 파고들더니 태오는 솔을 이불째로 번쩍 들어 올렸다.

제아무리 솔이 말랐다곤 하나 큰 키의 남자였다. 태오는 솔을 가뿐하게 들어 안고는 망설임 없이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태오의 품에 폭 안긴 솔은 심장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태오의 가슴팍에 기대어진 뺨이 타는 듯했고 심장 소리가 울리는 귓구멍도 불구덩이처럼 화끈거렸다. 그나마 이불이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솔은 이불을 꼭 끌어 쥐고 그 아래로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솔을 끌어안은 태오는 입꼬리를 살짝 씰룩거렸다. 소파에 긴 다리를 굽히고 한껏 웅크리고 누워 있는 게 불편하고 짠해 보였다. 깊게 잠이 든 듯해 편히 자라고 침대로 옮겨 주려 했다. 솔직히 말해 흑심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그 아래엔 정말 선의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솔을 끌어안은 순간 빳빳하게 힘이 들어가는 몸에 태오는 그가 깨어 있음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모르기엔 물에서 건진 나무토막처럼 빳빳했다.

민망함에 자는 척을 하는 건지, 그도 아니면 아침 기상 시간에 보여 주는 모습처럼 그저 잠에서 완전히 일어나기 싫어 버티는 것인지 그 속내를 알 수 없었지만, 태오는 그저 솔의 그런 행동이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도 모른 척하기로 했다. 덕분에 이렇게 품에 안아도 보는데, 모른 척 따위야 아주 쉬웠다.

태오는 애써 웃음을 삼키며 아주 조심스럽게 솔을 침대에 눕혔다. 잠든 사람이라기엔 잘 고정한 미라처럼 굳은 솔의 모습이 웃겨 태오는 잠시 위기를 맞이했다. ‘큼큼’ 헛기침으로 웃음이 터지는 상황을 간신히 모면한 태오는 이불을 잘 펼쳐 덮어 주곤 팔과 다리도 가지런히 넣어 주었다.

임무를 완수하고 제 침대로 돌아가려던 태오는 문득 그가 가람의 허벅지를 베고 한데 엉겨 있었던 모습이 떠올라 다시금 발걸음을 멈춰 솔에게 다가갔다. 아무리 멤버들과 스킨십이 스스럼없어졌다지만 지나치게 가까웠던 건 아닐까 불쑥 질투가 들었다.

태오는 손을 들어 솔의 이마에 올렸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 했던 것이지만 태오의 손이 원체 크기도 했고 오목조목 솔의 작은 얼굴에 큼직하고 또렷한 이목구비가 모여 있는 탓에 태오의 손바닥이 솔의 눈꺼풀 위까지 덮었다. 따뜻한 열감이 눈꺼풀 위에 느껴져 솔은 살짝 움찔거렸다. 눈을 꾹 감고 있으니 태오가 뭘 하려는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태오의 이 모든 행동이 솔의 심장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다 못해 훌러덩 옷을 벗어젖히면 얇은 피부 위로 그 펄떡 뛰는 모습이 보이는 건 아닐까 싶었다. 심장이 터져 버릴 노릇이었다. 이러다 진짜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과호흡이든 부정맥이든 뭐든, 큰일이 나는 게 아닌지 싶었다. 정말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솔의 시름이 깊어질 무렵. 태오가 허리를 굽히고 솔에게만 들릴락 말락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 자.”

거품이 몽실몽실 난 우유처럼 아주 부드러운 저음이 귓가를 간지럽혀 발가락이 휙 굽고 등골이 쭈뼛 섰다. 당장에 간지러워 귀를 벅벅 긁거나 솜털이 곤두선 팔을 문지르고 싶었다. 태오가 일어나 제 침대로 돌아가자 솔은 휙, 몸을 돌려 가슴팍을 콱 움켜쥐었다.

‘왜! 왜 저러는 거야!’

늘 다정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 돌아서는 그가 자신을 놀리듯 얕게 웃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꼭 이제 제 마음을 알게 된 솔 자신을 시련에라도 들게 하려는 듯 태오가 장난질하는 것만 같았다. 솔은 아무래도 제 마음을 숨기는 일이 이전보다 더 힘들 것 같다는 불길한 촉을 느꼈다. 이렇게 심장이 벌렁거리다간 아마도 제 명에 못 죽지 싶었다. 솔은 밤새 제 가슴팍을 부여잡고 끙끙 속앓이했다. 물론, 그 옆방의 가람도 속 끓는 밤을 보낸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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