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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를 뽑고 싶어 (133)화 (133/192)

#133

소파에서 밤을 보낼 생각으로 솔은 지호의 부름에 눈을 뜨는 대신 오히려 몸을 돌려 누웠다. 자는 척하는 걸 금방 눈치챘을까, 얼굴을 가리기 위해 한 행동이었지만 솔은 얼굴에 닿는 단단한 가람의 배에 헛기침을 토할 뻔했다. 본의 아니게 꼭 가람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배에 얼굴을 치대는 꼴이 되었다.

민망함보다 이 불편한 포즈에 당혹감이 더 컸던 솔은 여전히 깊게 잠이 든 척, 슬쩍 뒤척이며 몸을 한껏 웅크려 가람의 허벅지에서 머리를 옮겼다.

“성솔.”

가만히 지켜보던 태오가 다가와 솔의 팔을 잡아 살짝 흔들며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솔은 일부러 과장되게 ‘으음’ 하는 잠꼬대를 흘리며 짜증스럽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가람이 태오의 손목을 붙잡았다. 태오가 그를 바라보자 가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 몸도 안 좋아 보이고 피곤했나 봐. 억지로 깨우지 말자.”

“불편할 텐데….”

가람의 제안이 탐탁지 않은 듯, 태오는 그의 만류에도 솔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작은 키도 아닌 솔이 소파에 욱여 자는 것도 영 불편해 보였다. 그간 지켜봐 온 바로는 솔은 추위도 퍽 많이 탔다. 차라리 짜증을 내더라도 지금 깨워 따뜻한 방에서 편하게 자게 하는 게 낫다, 가 태오의 생각이었다. 태오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반대의 말을 꺼내자 가람이 그의 말을 자르고 급히 제 말을 했다.

“내가, 조금 있다가 깨워서 들여보낼게. 이불 좀 가져다줘.”

“그래, 한 숨 자게 두자. 보일러 온도 올리면 괜찮을 거야.”

상황을 지켜보던 지호가 솔을 빤히 바라보며 가람의 편을 들었다. 자는 척, 눈을 꾹 감고 있던 솔은 뺨으로 느껴지는 시선에 손가락을 살살 꿈질거렸다. 뺨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잠시 뒤, 솔은 제 몸 위로 포근하게 덮어지는 이불을 느꼈다. 꾹 감은 눈꺼풀 위로 쏟아져 시야를 붉게 만들던 전등불이 사라지고 주변이 조용해지자 솔은 안도했다. 고요한 적막을 느끼며 태오를 향한 제 마음을 정리해 보려 하는데, 기척과 함께 소파 쿠션에 체중이 실리며 살짝 기울여졌다.

솔은 한쪽 눈만 살짝 떠 제 머리맡에 앉은 사람을 확인했다.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하게 보였지만 상대를 알아보기엔 문제가 없었다. 노트북을 든 가람이었다. 거실에서 편곡 작업을 할 생각인 듯했다.

지금 피하고 싶은 사람은 태오였지 가람이 아니었다. 상대를 확인한 솔은 숨을 깊게 내쉬며 안심한 듯 다시 눈을 감았다. 노트북 키보드를 타닥타닥 누르거나 딸깍거리는 가람이 만들어 내는 작은 소음을 들으며 솔은 묘하게 차분해짐을 느꼈다.

가람의 작은 기척에 마음이 차분해진 솔은 태오를 떠올려 보았다. 이런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게 정확히 언제부터일까? 급작스럽게 오늘, 하루아침에 생긴 감정은 아닐 것 아니던가. 분명 제가 눈치채지도 전에 시작되어 그간 쌓여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연습실에서 태오가 갑자기 끌어안았을 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아무 생각이 들지 않고 심장이 터질 듯 벌렁거렸던 것이, 이미 마음에 두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보다 훨씬 전이라면 태오가 제가 짠 안무를 추는 것을 보며 이상하게 떨렸던 때? 인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일까. 핵심은 자신이 태오를 그저 일반적인 친구나 동료로 보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솔은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서주환을 되새김질해 보았다. 친구이자 무대 위에선 동료가 되는 서주환을 옆에 두고도 얼마나 시름 했었던가. 눈앞에 있음에도 마음을 전할 수 없는 사람을 곁에 두는 건 꽤나 전전긍긍하고 힘든 일임을 솔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모든 사실을 알고도 지켜봐 주는 제 편이 있어도 힘든 일이었다. 하물며 태오를 제외한 멤버들과 영호 형까지. 그리고 무엇보다 솔과 태오는 매일 말 한마디도 조심하란 말을 닳도록 듣는 아이돌 지망생이었다. 거기에다 태오는….

솔은 속으로 이번에도 또다시, 그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저 혼자서만 삭이는 감정이 될 거라고. 태오에겐 제일 첫 번째로 ‘일’이 중요했다. 가족을 위해서라도 윤태오 자신을 위해서라도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릴 여유가 태오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당사자인 솔은 제 마음이 이렇다고 태오가 그걸 받아 줄 리 없다고 단정을 지었다.

한 번 해 봤던 일인데, 두 번이 뭐 대수라고. 오히려 처음보다 더 잘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혼자 삭이고, 혼자 사소한 거에 기뻐하고 착각하고, 혼자 슬퍼하고. 이번에는 의찬도 없으니 더 들키지 않고, 이 감정을 잘 접어 둘 수 있지 않을까? 꼭꼭 잘 접어 고이 숨겨 둬야 할 텐데, 어설펐던 첫 번째와 달리 이번엔 두 번째니까 좀 더 능숙하게 감정을 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냥 솔직히 고백해 버려’라고 쉽게 이야기하겠지만 이건 솔 스스로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 하는 자기방어기도 했으며 멤버들 모두를 지키는 길이기도 했다.

솔은 차라리 태오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쭉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쭉 인지하지 못했다면 태오와 멤버들이 주는 안락함을 더 오래 만끽할 수 있었을 텐데. 하여간 어디를 가나 자신이 늘 문제라고 솔은 자조했다.

가슴은 답답한데 어쩐지 자꾸만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실성이라도 한 걸까 싶었지만 뭔가 웃음이 나왔다. 무슨 감정이었든 어떤 의미였든 서주환이 저를 완전히 떠난 날. 의찬에게 울며불며 그를 닮은 캐릭터를 뽑겠다고 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

의찬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애’인 서주환을 뽑겠다고 이 세상으로 와서 이제는 그 ‘최애’가 윤태오로 바뀌어 버렸다. 언제고 매번 그런 유의 게임을 할 때면 ‘최애 뽑고 싶어.’, ‘최애 뽑아야 해.’ 하던 의찬의 말이 떠올랐다. 그럴 때면 의찬은 ‘그냥 돈 받고 팔아 줘. 제발!’ 이란 말로 대화를 마무리하곤 했었다.

그 마음이 어쩐지 조금 이해가 갔다. 가지고 싶은데, 가질 수 없고, 차라리 돈이든 뭐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게 좋을 것 같았다. 차라리 게임이라면 쉬울 텐데.

솔은 웃음을 누르며 몸을 더욱 웅크려 이불에 몸을 깊게 파묻었다. 몸은 따뜻하지만 마음 한편이 시렸다. 쓴맛만 잔뜩인 감정을 홀로 삭이는데, 순간 무언가가 솔의 머리에 닿았다. 키보드를 건반처럼 두들기던 가람의 손가락이었다. 가볍게 꼭 솔의 이마가 건반이라도 되는 듯 매만졌다.

가람의 터치는 햇살이 스민 마룻바닥을 걷는 고양이의 발걸음 같기도 했고 피아니스트의 유려한 연주 같기도 했다. 가람은 제 손길에 솔의 반듯한 이마가 드러나자 피식 웃으며 다시 앞머리를 살살 건드려 드러난 이마를 가려 주었다.

별생각 없이 그저 의식한 대로 솔을 매만졌는데, 손끝에 닿은 모든 것들이 보드라웠다. 동물의 털, 부드러운 직물인 것처럼. 세상 모든 부드러운 것을 모아 뭉치면 이런 느낌이 되지 않을까? 자꾸만 만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가람은 제가 건드리는데도 별다른 반응이 없는 솔을 보고 그가 완전히 깊게, 단단히 잠에 빠졌다고 생각했다.

가람은 다시금 살살, 솔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빗질하듯 머리카락을 쓰니 밝은 은색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스치며 보드랍게 흩어지는 느낌이 기분 좋았다. 한참 솔의 머리를 쓰다듬던 가람은 이내 아주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솔의 앞머리를 건드렸다.

마음 같아선 꽉 끌어안고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어도 잡아당겨도 보고 싶었다. 괴롭힘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모든 감각을 느껴 보고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랬다간 세상 가장 부드러운 것으로 만들어진 솔이니, 깃털처럼 흩어져 버릴지도 몰랐다.

가람은 살살 구슬리듯 덮어 놓았던 앞머리를 다시금 헤쳤다. 솔의 희고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것 같기도 해 가람은 손끝으로 그의 눈썹 사이를 살살 문질러 보았다.

한편, 눈을 꾹 감고 여전히 자는 척이던 솔은 가람의 행동에 입술을 몰래 씰룩거렸다. 가람의 손길에 놀라기는 했지만,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는 손길이 그의 기분을 나아지게 했다. 다정하기 짝이 없는 손길이 꼭 저를 위로해 주는 것 같아 기분 좋게 만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살살 앞머리를 헤치니 이마가 간질간질한 것 같았다. 간지럼을 참으려 솔은 발가락을 까딱거리고 입술에 힘을 주었다. 그런 솔의 속도 모르고 가람은 그가 간지럼을 참느라 미간이 찌푸려지자 오히려 더 깊게 손을 대었다.

더는 참지 못하고 솔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마음먹은 순간, 갑자기 그의 이마에 무언가 촉촉하고 보드랍고, 뜨거운 것이 닿았다. 아주 찰나처럼 ‘쪽’ 하고 닿았다가 떨어져 나간 그 감촉이 무엇인지 솔은 잠시 멍하니 그 감각을 되새김질했다.

‘어…어. 뭐였지?’

입술이었다. 솔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정보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것처럼 머릿속이 버벅거렸다. 솔이 컴퓨터였다면 ‘똥컴’이라 욕하며 몇 대 내리쳤을지도 모른다. 그런 솔에게 재차 확신을 주려는 듯,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던 가람이 다시금 그의 얼굴 위로 고개를 숙였다.

눈을 질끈 감은 솔은 다가오는 온기를 느꼈고 이마에 가람의 숨이 닿음을 느꼈다. 흘러내린 가람의 긴 머리카락이 제 눈썹 위를 간지럽히는 것까지 이번에는 쉬이 부정하지 못하도록 똑똑히 느꼈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촉. 말캉한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이번에야말로 부정할 수 없이, 가람이 제 이마에 입을 맞췄다는 것을 또렷하게 인지했지만, 솔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리에서 몸으로 당장 눈을 뜨고 일어나 놀란 표정을 짓고 가람을 쳐다보라는 신호가 내려오기까지 아무래도 종일이 걸릴 듯싶었다. 놀란 솔은 그대로 굳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불똥이 튀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어 바보 멍청이가 되었다.

무슨 일 일어났는지, 행동 자체는 인지했지만, 그 행동에 담긴 의미를 해석해야만 했다. 같은 나이의, 성인 남성이 이마에 입을 맞추는 게 무슨 의미일까. 보통 그 나이대의 남자들끼리 박치기는 하겠지만 입맞춤은 아니었다. 고민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사실 다 알고 있으면서 그저 쉽게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자신이 태오에게 품었던 것과 같은 감정을 가람이 자신에게 품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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