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 (131)화 (131/192)

#131

***

“어때요?”

밴에 오르자마자 득용이 눈을 빛내며 영호에게 물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영호는 득용의 물음에 의미심장하게 씩 웃으며 말을 아꼈다.

“너희 눈으로 직접 봐.”

“숙소 가면 다시 보기로 바로 볼 수 있어요?”

“그럴 거야.”

득용은 안전띠를 채우며 궁금한 것이 퍽 많은 듯 영호에게 계속 질문을 쏟아 냈다. 하지만 영호는 명확한 대답을 주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아쉽다. 본방으로 보고 싶었는데.”

지호가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자 영호를 포함한 멤버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맨 마지막으로 밴에 오른 솔도 안전띠를 팽팽하게 당겨 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마이 아이돌 스타즈>가 본격적으로 방영되는 날이었다. 자신들이 TV에 나오는 모습을 본래라면 숙소에 모여 실시간으로 감상할 예정이었지만 사정으로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 팀 개별 인터뷰 촬영과 중간 미팅 일정이 급작스럽게 변경되어 <마이 아이돌 스타즈>가 방송될 시간에 방송국에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무대 스튜디오 장소가 변경되어 그 부분도 확인해야 했고 개별 인터뷰와 미팅, 모두가 조금씩 길어지며 대망의 첫 방송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핸드폰, 핸드폰 주세요.”

득용이 영호에게 두 손을 내밀고 현란하게 파닥거렸다. 다급한 득용의 외침에 영호의 손도 바빠졌다. 영호가 수거했던 핸드폰을 돌려주자 멤버들 모두 핸드폰에 쌓인 부재중 메시지와 연락을 확인하기 바빴다. 솔만 멀뚱히 바라보다 이마를 짚었다.

오늘은 안정의 포션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음 무대를 위해 포션을 아껴야 하기도 했고 수량이 한정되어 있는 안정의 포션을 모든 일에 의지할 수 없었다. 개별 인터뷰. 많이 좋아졌다곤 하나 솔에게는 아직까지 스트레스가 크고 힘든 일이었다.

훅 줄어 버린 체력과 높아진 피로도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자신들의 모습이 방송에 어떻게 나왔을지, 반응이 어떨지 궁금해했지만 솔은 그저 걱정스러웠다. 당장 오늘 촬영한 인터뷰부터 아리송했다.

단순히 그 때문에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는 게 아니었다. 솔은 멤버들의 모습을 훑어보며 다들 누구와 연락을 주고받는 걸까? 궁금증이 일었다. 물어볼 것도 없이 방송을 본 가족이나 친구겠지. 솔은 필시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을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하는 대신 멤버들의 반응을 살폈다.

차 안을 둘러보던 솔의 시선이 태오의 얼굴에 머물렀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확인하는 탓에 높고 곧은 콧대가 한층 더 날카로워 보였다. 더불어 짙은 눈썹 아래에 자리 잡은 눈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멍하니 태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데, 순간 그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핸드폰 화면이 뿜어내는 빛이 스민 얼굴. 무뚝뚝한 인상이 아주 짧은 순간 부드럽게 풀어지며 짙은 눈매가 휘었다. 호선을 그리는 입매, 하지만 기쁨보다는 어딘지 그리움이 남은. 가슴 한편을 시큰하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솔은 그 순간 지금 자신이 앉아 있는 곳이 차 안이라는 것도 잊을 만큼 시선을 빼앗겼다. 생명 줄처럼 꽉 잡고 있던 안전띠가 아니었다면 밴이 아니라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공간에 있다 착각할 만큼 세상이 멈춘 듯했다.

솔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속으로 탄성을 내뱉었다.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는 태오의 눈빛이 너무도 따스했다. 하지만 이내 그의 눈가에 스미는 슬픔에 솔은 입술을 짓씹었다. 기쁜 듯 슬픈 저 표정을 보니 상대가 누구인지 가늠이 되었다. 가족이겠지. 그의 마음에 콱 박여 도무지 빠지지 않고 아물지도 않을 가시이면서 동시에 저런 미소를 짓게 하는 사람.

지금도 충분히 다정하고 든든한 태오인데, 저런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에겐 얼마나 더 멋지고 좋은 사람일까. 그 눈빛을 받는 대상이 핸드폰이 아니라 저였으면 어떤 기분일까.

“아!”

이전에도 한 번 느껴 본 적 있던 충격이 솔의 머리를 때렸다. 이번에는 둔탁한 통증의 충격이 아닌 마치 종소리가 울리는 듯한 충격과 함께 떠오른 ‘윤태오’라는 이름이 온몸에 퍼지는 듯했다.

갑작스레 솔이 낸 탄성에 태오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 부딪쳤다. 솔은 두 손으로 안전띠를 한껏 움켜잡고 커다란 비밀을 들킨 사람처럼 숨을 ‘흡’ 들이마셨다.

숨을 참으니 오히려 심장이 더 세차게 뛰었다. 너무 당황한 솔은 태오와 마주친 시선을 돌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늘 이런 상황에서 먼저 시선을 돌리는 건 태오였는데, 오늘따라 태오도 솔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득용이 왁자지껄 지호와 떠드는 소리가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흔들리는 차 안, 창밖 너머로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음에도 솔은 아무렇지 않았다. 시간이 느리게 지나가는 것 같았고 지금 참은 숨을 내뱉으면 제 숨이 태오에게 닿을 것 같았다.

머릿속에 마치 멜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날, 태오와 연습실에서 했던 포옹이 떠올랐다. 맞닿았던 가슴을 통해 전해지던 심장 소리, 뺨과 귓가에 닿는 홧홧한 열기.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부드러운 얼굴. 마치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시선을 피하지 않고 한참 솔을 마주 보던 태오가 조금 전 핸드폰을 보던 때와 같은 미소를 그에게 지어 보였다.

화악, 솔은 얼굴을 붉혔다. 지금 대체 자신이 무슨 상상을 한 걸까? 솔은 제 망상에 놀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눈을 맞추고 있던 솔이 갑작스레 허리를 숙이며 얼굴을 가리자 놀란 태오가 자리에서 들썩였다. 하지만 조금 떨어져 앉은 태오보다 가람의 손이 빨랐다.

“솔, 멀미해? 토할 거 같아?”

솔이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허리를 숙이자 그가 심한 멀미를 하는 줄 알고 있는 가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조금 전 자신이 한 엄청난 상상에 솔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대답조차 없는 솔의 반응에 가람의 얼굴이 더욱 걱정으로 얼룩졌다. 상황을 인지한 지호가 급한 대로 봉투를 건넸지만, 솔은 입을 틀어막고 고개만 저었다.

태오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자신을 도와주는 선량한 친구를 보며 그의 가족을 질투하고 그와 키스하는 망상을 했다. 숙소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크라프트 종이 상자가 떠올랐다. 상자 안에 가득 담겨 있는 남색 비닐 포장의 포도당 캔디. 갑자기 그 달콤한 맛이 입 안에 감도는 듯했다.

그제야 솔은 태오와 닿았을 때, 왜 그리 심장이 두근거리고 얼굴에 열이 올랐는지, 왜 시선을 떼지 못했는지 깨달았다. 윤태오를 친구가 아닌 그 이상의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답도 없는 성솔이 저 빛나는, 곧 더욱 빛날 윤태오를 좋아하고 있었다.

가람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동그랗게 굽은 솔의 등을 쓰다듬었다. 푹 숙인 솔의 얼굴을 확인하려 가람도 같이 허리를 숙이자 솔의 뺨에 가람의 콧날이 닿을 듯 말 듯 했다. 순간 조금 전 떠올렸던 태오와의 입맞춤이 되새김질되어 솔은 화들짝 허리를 곧추세우고 가람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이런 감정을 가람이, 지호가, 득용이, 나아가 회사, 그리고 무엇보다 태오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이제는 허상 같아진 서주환이나 조금 전부터 트라우마 경고를 보여 주고 있는 시스템 창 같은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손에서 절대 놓고 싶지 않은, 이제는 솔에게 제일 소중한 것들이 되어 버린 것을 제 손으로 망치고 떠나가게 만들지도 몰랐다.

“괜찮아졌어. 잠깐 울렁거려서 그런 거야.”

조금 전까지 터질 듯 얼굴을 붉혔던 솔이 이제는 사색이 된 자신을 쓰다듬는 가람의 손길을 밀어냈다. 흰 얼굴이 가뜩이나 더욱 하얗게 질렸지만, 솔은 애써 머릿속에 자꾸만 떠오르는 장면을 지워 내며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반쯤 일어섰던 태오가 안심한 듯 좌석에 다시 앉았지만, 솔은 애써 그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지 않으려 시선을 돌렸다.

“솔이 형…. 우리 숙소 가서 같이 방송 보기로 했잖아요. 아프지 말아요.”

득용까지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내던지고 솔을 바라보았다. 솔은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고 대화를 피하려 눈을 질끈 감았다. 오늘따라 숙소로 향하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애정이 어린 시선으로 가득 찬 차 안의 공기가 오늘따라 따뜻하다 못해 더워 가슴이 갑갑할 지경이었다.

숙소에 도착한 뒤 솔은 피로감을 느끼면서도 방에 들어가지 않고 거실에서 나뒹구는 득용의 옆에 붙어 다녔다. 태오와 같이 쓰는 방이 그간은 그의 세심한 배려에 편안했었는데 오늘은 가시방석이었다. 제가 어지럽힌 자리를 정리하거나 별것 아닌 가방을 옮겨 준다거나 속은 괜찮아졌냐며 상태를 확인하는 행동까지 그동안 아무렇지 않게 받아 왔던 것들이 솔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자꾸만 얼굴이 새빨개지고 심장이 벌렁거려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가 내는 아주 사소한 생활 소음까지 변태처럼 귀를 솔깃하고 기울이게 되었다. 너무도 신경이 쓰여 같은 공간에 있기가 버거웠다. 결국 솔은 옷을 갈아입는 둥 마는 둥 하곤 방송을 보러 나가겠다며 방문을 박차고 나왔다. 함께 방송을 보며 먹을 간식을 준비하던 지호가 얼굴이 붉어져 뛰쳐나온 솔을 보고 놀라 물었다.

“깜짝이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지호의 물음에 솔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굴이 완전 빨간데? 솔아, 너 열나니?”

지호가 손에 든 간식거리를 급히 테이블에 내려놓고 솔에게로 다가왔다. 열을 재 보려는 듯, 손을 든 지호를 미꾸라지처럼 유연하게 피한 솔은 잽싸게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솔, 열나?”

“솔이 형, 아파?”

지호의 손길은 피했지만, 지호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이 득달같이 솔의 옆으로 다가왔다. 결국 가람의 손이 이마에 닿았다.

“열나는 거 같은데?”

당연한 일이었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화끈거리는데 열이 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가람과 득용에게 붙잡혀 쩔쩔매고 있는데, 잠옷 주머니에 들어있는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톡이 연달아 오는 알림 소리에 득용이 꽉 끌어 잡고 있던 솔의 팔을 놓아주었다. 꾸물꾸물, 핸드폰을 확인하니 은겸에게서 온 축하와 응원의 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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