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돌아가자.”
솔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급격한 피로감이 찾아오자 짜증이 득실거렸다. 조금 전까지 환히 웃던 얼굴에 예민하게 날이 섰다. 솔의 변화에 가람이 의아한 듯 확인차 되물었다.
“솔, 사진 안 찍어?”
“응. 연습실로 돌아갈래.”
방금 막 졸업식이 끝난 참이었고 멤버들은 솔이 졸업장을 받을 무렵부터 와 있었지만 조금 전 그 소녀를 제외하곤 솔이 반 친구들과 사진을 찍거나 대화하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하다못해 졸업을 기념할 독사진이나, 그도 마땅찮다면 오늘 축하해 주러 찾아온 지호와 태오, 가람과 사진 한 장 정도는 찍어야 도리에 맞았다.
솔은 무척 단호하지만 날카롭게 대답했다. 툭 대답을 던져 놓고 제가 생각하기에도 어조에 날이 섰었는지. 솔은 가람을 비롯한 멤버들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솔의 의지는 확고했다. 여기에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졸업식인데 사진 한 장 정도는 찍어야지.”
“아니, 괜찮아. …여기까지 와 줬는데 미안. 그냥 연습실 돌아가서 다음 미션 회의하자.”
기운이 쭉 빠져 사탕이 가득 담긴 상자를 들 힘도 없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들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솔이 상자를 들다 말고 멈춰 있자 태오가 말없이 상자와 꽃다발을 대신 들어 주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은 그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YC 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습생. 데뷔조 TEAM ONE 성솔의 자리로.
고등학교를 떠나 회사로 돌아가는 내내, 가람과 지호는 솔을 살피며 저기압이 되어 버린 그를 다시 웃음 짓게 하려 자잘한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솔의 귀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지호는 고등학교를 이전 소속사 연습생일 때 다녔고, 가람과 태오는 일찍이 공개 오디션으로 소속사에 들어오면서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 대체했다. 사실상 멤버 누군가의 졸업식은 처음 가 보는 거였다.
더군다나 무대 의상이 아닌 진짜 교복을 입은 솔의 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교복을 입은 솔은 평소보다 더 앳되어 보였고 청춘 드라마 속 첫사랑 역의 미소년 같았다. 내심 교복 입은 솔의 사진을 남기고 싶었던 세 사람은 애써 들떴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솔은 아닌 척하지만, 그의 컨디션이 급격하게 떨어졌는데, 도대체 원인이 무엇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혹 멤버들 자신들이 졸업식에 간 것 자체에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하기엔 장미꽃을 건넸을 때 좋아하던 얼굴은 꾸며 냈다고 볼 수 없을 만큼 너무도 해맑았다.
연습실에 도착하고도 솔은 저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축 늘어져 기운 없이 연습실 한구석에 교복을 입은 채 앉아 있는 솔의 모습에 태오는 지호와 가람을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지금의 솔에게 딱히 효과가 없다는 게 분명해서였다. 이럴 때는 혼자 시간을 보내게 해 주는 게 나을 듯싶었다.
태오의 예상은 적중했다. 솔은 지호와 가람이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제 생각에 푹 빠져 있었다. 서주환과 백의찬. 두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안 하고, 지금의 세상이 가짜고 진짜이고 이런 것은 이제 솔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늘 졸업식에 찾아와 웃으며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장미 한 송이를 내밀던 멤버들은 누가 뭐라 해도 진짜였다.
솔은 저에게서 멀어져 몸을 푸는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솔의 마음을 헤집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이 ‘서주환’을 정말 짝사랑하기는 했던 걸까? 하는 물음에서였다.
그저 제가 보고 싶은 대로 ‘서주환’을 포장해서 보고, 제멋대로 의지하고. 저 좋을 대로 꾸민 허상을 세워 두고 그 모습을 좇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름도 모르는 소녀가 주고 간 사탕. 그 사탕을 보는 순간 무언가 한 꺼풀 쓰였던 막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느닷없었던 결혼 소식. 오가며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소식 정도는 전해 주었지만, 친구로서라도 소개해 준다거나 흔히들 하는 애인 자랑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주환이 건넸던 청첩장이 급작스럽다고 느꼈던 거 같았다. 솔은 제 생각보다 자신이 서주환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걸 이제야 느꼈다. 의찬이 주환에 대해 탐탁지 않아 할 때, 솔은 왜 의찬이 그런 말을 하는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서주환이 결혼하던 날. 그날 자신은 정말 그렇게 슬펐던가. 답지 않게 울고불고 술까지 마시고 진상을 부리긴 했었다. 그다음 날은? 물론 그다음 날부터 정신없는 나날이 펼쳐지기는 했지만 제 말대로 오랜 짝사랑의 끝을 맞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쉽게 털어 버리지 않았나? 영화나 소설, 드라마를 보면 대단한 사랑의 실연을 맞이한 사람은 며칠씩 눈물짓고 끼니도 거르고 온종일 상대만을 생각한다. 쉬이 갈무리되지 않을 만큼 깊은 감정.
저 스스로 오래도록 주환을 사랑해 왔다고 말했으면서 주환과 닮았다는 태은겸을 보며 시련의 아픔을 되새김질한 적도, 그도 아니면 어딘가 다른 세상에서 결혼한 부인과 잘 살고 있을 그를 그려 본 적도 없었다. 그저 주환과 닮은 은겸을 볼 때 느꼈던 불편한 감정은 이곳의 진위, 자신의 옆에 숨 쉬는 사람들이 진짜인지에 대한 불편함이었다.
어쩌면 그저, 너무 외로워 남들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제대로 듣지도 보지도 않고 제가 좋을 대로 생각하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서주환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본격적으로 생각했던 때가 언제였을까. 무용을 그만두고 동질감을 느꼈던 그때? 가족이 사라졌던 그때?
그런 감정의 형태였다면 만일 지금 자신의 앞에 진짜 서주환, 결혼이란 선택을 하지 않은 서주환이 나타난다면 어떨까. 솔은 스트레칭에 열중인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만약 서주환과 눈앞에 보이는 태오나 가람, 지호를 두고 선택해야 한다면? 아니면 서주환이 있는 세상과 멤버들이 있는 세상 둘 중 하나만을 골라야 한다면?
순간 머릿속에 파지직, 스파크가 튀는 듯했다. 고민할 것도 없이 튀어 오른 생각에 솔은 허탈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질문을 떠올리자마자 솔의 머리에 든 생각은 ‘돌아가고 싶지 않다.’였다.
주환에 대한 감정이 거짓이든 알량한 것이든. 어찌 되었든 주환은 솔의 삶에서 꽤 많은 부분을 차지했고 의지가 되었음은 사실이었다. 의찬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이 있는 이전의 세상과 지금의 세상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솔은 의찬과 주환 두 사람을 포기할 것이다.
이곳에 와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처음엔 황당하기만 했던 일들도 이제는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아가고 있었고 비관적인 생각도 줄어들었다. 불행한 아이 취급하는 시선도 없었고 여기서는 마치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다시 이전으로 돌아간다니 생각만으로도 밑바닥이 없는 나락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상한 시스템과 태오, 가람, 지호 그리고 득용을 만나게 된 게 그저 무언가가 자신이 가여워 다시금 기회를 줬다고 단순하게 생각해 버리면 안 되는 걸까?
술에 취해 주환의 이름을 부르며 울던 날. 의찬이 게임 화면을 보여 주던 날.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백의찬이 저를 너무도 불쌍하게 여겨 이곳에 보내 준 거라고. 그러니 허튼 생각 말고 여기서 멤버들과 함께 다 이겨 내고 행복하게 잘 살면 그걸로 된 거라고 그렇게 여기고 싶었다. 주환을 좇던 마음처럼 저 좋을 대로 포장해 그렇게 믿고 싶었다.
순간적이었지만 솔은 스스로의 생각에 놀랐다. 너무도 이기적이었다. 제 이기심에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그렇지만….’
솔은 스트레칭을 하며 은근슬쩍, 자신을 돌아보는 가람과 눈이 마주쳤다. 솔과 눈이 마주치자 가람은 눈매를 한층 더 나른하게 풀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다음 눈이 마주친 사람은 태오였다. 가람이 웃는 걸 가만히 보고 있는데, 그 너머로 거울에 비친 태오와 눈이 마주쳤다. 짙은 눈썹과 새카맣게 올곧은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솔은 고개를 돌려 지호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지호는 아예 몸을 돌려 솔을 보며 스트레칭을 하는 중이었다.
순간 솔의 눈에 왈칵 눈물이 고였다. 의찬과 주환에게는 미안했다. 하지만 지금이 좋았다. 모든 걸 포기한다는 실수를 저지른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태오, 지호, 가람, 득용이까지 그 누구와도 서주환과 바꾸고 싶지 않았다.
서주환과 달리 솔 자신은 저 세 사람을 똑바로, 제대로 보고 있나? 너무도 선명하고 또렷하게 보고 있었다.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이 감정을 쏟아붓는 관계가 아니었다. 지금처럼 자신이 바라보면 웃음을 짓고, 눈이 마주치면 슬쩍 눈썹을 올려 눈짓하고. 세 사람 모두 넘치도록 솔 자신과 감정을 주고받고 있었다.
의찬이라면 이런 제 마음을 이해해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싶었다. 그러면 더 이상 주환의 모습도 의찬의 모습도 좇지 않고 현실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솔에겐 이 자리가 자신의 자리였고 여기가 현실이었다. 더 이상의 짝사랑도 없었다.
이젠 깨달았다. 주환을 향해 품고 있었던 감정은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문제가 많았다. 사랑하고 소중한 사람이라 한다면 아무래도….
솔은 다시금 세 남자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태오는 누구보다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사람이었고 가람은 세 사람 중 가장 선하고 다정다감했다. 지호는 부드러운 외모와 달리 강한 사람이었다. 세 남자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깃털을 삼킨 것처럼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낯설기만 했던 손길들이 이제는 익숙해 몸에 익었다. 솔은 수줍게 잡은 멤버들의 손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아주 꽉 잡고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혹여 실수로라도 놓치지 않도록 단단히 옭아맬 생각이었다. 세 사람을 보는 솔의 가슴 속에 무언가 꿈질꿈질 요동치며 자라나려 하고 있었다. 친구를 향한 감정이라기엔 지나치게 이기적이었다.
마침내 어두운 긴 터널을 달려 빛이 드는 끝자락에 다다랐다,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밝은 빛 속에 싹을 틔울 수 있는데, 그 빛의 끝에서 난데없이 득용이 튀어나왔다.
“솔이 형! 졸업 축하해요.”
오전 수업을 끝내고 연습실 문을 박차고 득용이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솔에게로 달려왔다. 웅크리고 앉은 솔의 등을 덥석 한 품에 끌어안은 득용은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애교를 부렸다. 힘이 넘치는 막내는 웅크려 앉은 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불쑥 들어 올려진 솔이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우앗!’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갑자기 나타난 득용에 의해 상념이 깨어져 버렸다. 득용이 와락 솔을 끌어안아 버리자 그는 모든 걸 털어 버리고 바보처럼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