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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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은 교복 넥타이를 한껏 조였다가 풀었다. 몸은 스무 살이었지만 속에 든 것은 이미 고등학교 졸업이 아득해지는 나이였다. 남들 눈에 그저 그 나이대에 맞게 잘 어울리는 모양새였지만 솔만 교복을 갖춰 입은 자신이 어색해 계속 꾸무럭거렸다.
교복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었었는데, 막상 덩그러니 남겨졌던 집에 가 옷장 문을 여니 방금 막 세탁소에서 찾아온 것처럼 깨끗한 교복이 걸려 있었다. 얼마 전 무대 의상으로 교복을 입기는 했으나 그때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오전 수업에 참석해야 하는 득용과 함께 일찌감치 숙소를 나선 솔은 덕분에 이른 시간에 학교에 도착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보는 고등학교의 모습은 낯설기도 했고, 모든 것이 작아 보였다.
학교에 관한 것은 까맣게 잊어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발길이 닿는 대로 휘적휘적 걸어오니 가물가물한 제 자리도 딱 맞게 찾아왔다. 텅 빈 교실. 교실 뒤로 늘어선 사물함에 적힌 이름을 솔은 찬찬히 하나하나 읽어 보았다. 제 이름 ‘성솔’은 있는데 어디에도 낯이 익은 이름은 없었다. 예상했던 바이기에 덤덤했다.
솔은 없는 기억을 쥐어짜 제 자리를 찾아 책상에 앉아 보았다. 의자도 무척이나 낮은 것 같았고 책상도 아담하게만 느껴졌다. 솔은 햇빛이 길게 드리운 책상 위에 뺨을 대고 엎드려 보았다. 그러고는 엎드린 채, 책상 서랍을 손바닥으로 이리저리 더듬어 보았다.
역시나 있을 리가 없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아침에 학교에 와 이렇게 엎드려 책상 서랍에 손을 넣어 보면 동그란 사탕이 손에 잡히곤 했었다. 투박한 남색 비닐 포장지의 포도당 캔디였는데, 아침에 약해 늘어져 있는 솔을 그 사탕이 깨워 주고는 했다.
솔은 매일같이 제 서랍 속에 사탕을 넣어 줄 사람은 주환과 의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이치였다. 솔의 학창 생활은 두 사람과의 기억뿐이었으니까. 내심 솔은 그 사탕을 넣어 둔 사람을 주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엔 주환과 의찬 두 사람 모두 없으니 사탕도 존재할 리가 없었다. 딱 사탕이 필요할 만큼 입이 썼다.
교실의 빈자리가 메워지고, 다시 강당으로 이동하고 졸업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솔은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 사이에 딱 이물질처럼 껴 있었다. 먼저 말을 걸어 주는 사람도 없었고 말을 걸어 줘도 문제였다.
대충 그렇게 자리를 잡고 눈치만 살살 살피고 있으니 어느덧 졸업식이 시작되었다. 졸업식은 처음 참석하는 거였지만 귓가에 들어오는 훈화도 없었고 감흥도 없었다. 그저 이 모든 일들이 별거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솔은 고개를 돌려 멍하니 강당 창을 가린 암막 커튼을 바라보았다. 창문이 살짝 열려 있는지, 아니면 외풍이 있는지 커튼 자락이 살랑살랑했다. 허울뿐인 식이 끝나고 나자 저마다 졸업장을 들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발끝이 닿는 자리마다 꽃다발을 든 중년 여성이나 남성이 아이들을 반기고 있었다.
솔은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지금이야 별 감흥 없이 보고 있지만 그때에는 ‘저 모습이 보고 싶지 않아 졸업식에 안 왔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이쯤 앉아 있었으면 돌아가도 되겠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솔을 한 여자아이가 불러 세웠다.
“성솔.”
뒤를 돌아보니 자그마한 종이 상자를 든 여학생이 서 있었다. 별달리 기억에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깨를 조금 넘는 흑갈색 머리에 둥글게 만 앞머리. 같은 반 맨 앞자리에 오늘 하루 앉아 있었다는 것 외에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예전이었다면 이름 정도는 기억했을 텐데, 상대는 제 이름을 부르는데 자신은 시간이 흘렀다고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미안했다. 아니, 다시 돌아간다 해도 솔은 저 아이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담임 선생님께 이야기 들었어. 아이돌 준비한다며?”
“어…. 응.”
누구든 저에게 말을 거는 사람은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예상 밖의 상황에 솔은 잔뜩 위축되어 불안정하게 대답했다. 근래 멤버들과 함께할 때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않고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숙이는.
솔의 앞에 불쑥, 종이 상자가 내밀어졌다. 표면이 거친 크라프트지로 만들어진 상자는 제법 묵직했다. 얼떨결에 소녀가 건넨 상자를 받아 든 솔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상자를 꽤 한창 들고 있었는지, 손이 닿았던 양옆 부분에만 온기가 남아 있었다.
“마지막이라 그냥 주고 싶었어. 잘 지내.”
“어? 너도, 너도 잘 지내.”
“응원할게. TV에서 보게 되면 좋겠다.”
정말 단순히 그 물건만 전달해 주려는 목적이었는 듯, 소녀는 솔이 상자를 품에 안자 그 말만 남기고 훌쩍 제 친구들에게로 달려갔다. 여자애들 몇몇이 그녀와 모여 무슨 이야기를 속닥거렸지만 이내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솔은 이름도 모르는 친구가 남긴 상자처럼 덩그러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름 모르는 친구는 자신이 가지 않았던 그때의 졸업식에도 이 상자를 들고 자신을 기다렸을까? 기분이 이상했다. 적어도 제가 속한 반에 한 명쯤은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고 생각하니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뭐야. 솔이 고백받았어?”
불쑥, 이 자리에 있을 리가 없는 인물의 목소리에 솔은 깜짝 놀라 튀어 오른 고양이처럼 화들짝 뒤를 돌아보았다.
“지호 형? 태오? 가람아?”
돌아본 뒤편에는 한참 수업을 듣고 있을 득용을 제외한 세 사람이 꽃 한 송이씩을 들고 서 있었다. 급작스러운 방문이기도 했고 셋 모두 주머니 사정이 여유롭지 못하다 보니 학교 앞, 정문에서 파는 꽃다발이었지만 그마저도 감지덕지했다.
“솔, 졸업 축하해.”
장미꽃 한 송이를 내밀며 가람이 활짝 웃었다.
“고마워.”
생각지 못한 축하에 솔은 마주 웃으며 그가 건넨 장미꽃을 받아 들었다. 지호를 선두로 태오와 가람 모두가 꽃을 한 송이씩 건네며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솔의 두 손이 종이 상자와 세 송이의 장미로 붐볐다.
졸업식이란 거 그저 형식적인 귀찮은 행사라고만 생각했는데, 멤버들의 축하를 받으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런 거로 아이처럼 들뜰 거라 생각 못 했는데, 솔의 기분이 한없이 하늘로 치솟았다. 사실은 익숙한 멤버들의 얼굴을 보니 다시 마음이 편안해진 듯싶었다. 방금 전 위축되고 불안했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진 걸 보면 말이다. 뜻밖의 선물과 멤버들의 축하에 기분이 좋아진 솔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아니, 여긴 어떻게 왔어?”
“영호 형이 가 보라고 해서.”
솔의 물음에 태오가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거짓말이었다. 물론 영 없는 말은 아니었다. 평소처럼 시간 맞춰 연습실로 출발하려는데 밴 안에서 문득 영호가 ‘솔이 왕따 같은 거 당하는 거 아니겠지?’라는 말을 꺼냈다.
이유인즉 졸업식에 가기 싫어하는 걸 넘어 학교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아 보였다는 것이었다. 세 사람 모두 영호의 말을 듣자마자 처음 솔을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슬프게도 제법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그 정도 외모면 학교 내에서 인기인이 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솔은 ‘인기’는커녕 친구라곤 없는 사람처럼 쭈뼛거렸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성솔’이라는 사람 앞에 ‘인기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게 어색할 정도였다.
생각이 끝나자 순간 가람과 지호가 동시에 태오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에 태오는 영호를 바라보았다. 결국 그렇게 급히 차를 돌려 솔의 학교로 오게 된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영호는 멤버들에게 솔의 졸업식에 가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기뻐하는 솔을 보며 역시나 오길 잘했다고 생각한 지호는 장난스레 솔이 들고 있는 상자를 보며 말했다. 영호의 걱정이 그저 기우였음을 확인시켜 준 상자였다.
“솔이 축하해 주러 왔는데, 우리 솔이는 고백받고 있고…. 인기인이었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그냥?”
지호가 장난스레 서운한 척을 하자 솔은 졸업식 내내 지루한 얼굴로 앉아 있었던 의자 위에 잠시 상자를 내려놓았다. 지호의 말에 솔은 답변할 말을 딱히 찾지 못했다.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받은 선물이니 그 의도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소녀의 표정과 건넨 말에는 호의가 가득했다.
“친해?”
“…아니.”
조용히 지켜보던 태오가 묻자 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하고 나니 이름도 모르는 친구에게 미안해졌다. 덜컥 상자는 받아 버렸는데 제대로 인사도 못 했다. 혹여 이름이 적힌 무언가라도 들어 있지 않을까 싶어 조심스레 상자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자그마한 쪽지나 편지조차 없었다. 그저 상자 가득, 한 물건으로 채워져 있었다.
“사탕이네.”
익숙하고도 너무도 눈에 익은 남색 비닐 포장지의 포도당 캔디. 그간 왜 이걸 주환이 줬다고 생각했을까?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지호가 상자 안에 가득 담긴 사탕 포장지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그러게. 스포츠 포도당 캔디. 특이하다. 보통 이런 거 잘 안 먹지 않아?”
까드득, 어금니로 깨문 사탕처럼 무언가 깨진 기분이었다. 주환에 관한 생각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주환에 대해 기억하는 것들, 주환에 대해 느낀 것들. 모두 사실 그저 저 좋을 대로 꾸며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주환을 영 탐탁지 않아 했었던 의찬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니 정확하게는 텅 빈 검은 공백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애를 써도 의찬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 이 상자를 주고 갔던 여자아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서주환’ 대신 그를 닮은 ‘태은겸’이 떠올랐다. 아니 서주환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닮았다고 인지하고 있으니 은겸의 얼굴이 떠올랐을 뿐이지 정확히 서주환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제 더는 기억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행복하고 기뻤는데, 솔의 안에서 무언가가 어긋나 버렸다. 그들이 저에게 어떤 친구들이었는데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그런 자신이 서주환을 가슴 아리게 좋아했고, 백의찬에게 누구보다 의지했다고, 그게 진심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머리가 지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