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 (128)화 (128/192)

#128

“성솔, 욕실 비었어.”

젓은 머리를 정돈하며 들어온 태오가 그의 이름을 부를 때까지 솔은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어, 응.”

태오의 말에 솔은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다섯 사내가 화장실 두 개로 생활하려니 욕실이 비기를 기다리는 것도 일이었다. 두꺼운 메이크업을 지우고 싶은 생각에 솔은 한참 쥐고 있던 핸드폰도 내팽개쳤다.

태오는 솔이 떠난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뒹굴어 제멋대로 흐트러진 이불을 바로잡고 따뜻하게 잘 수 있도록 전기장판의 온도를 올렸다. 조금 전까지 솔이 붙잡고 웃음 짓던 핸드폰이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요즘 들어 숙소에서 핸드폰을 붙잡고 있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 태오는 잠시 멈칫하다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살짝 뒤집어 놓았다.

제 침대로 돌아가 누운 태오도 뒤척거리다가 핸드폰을 붙잡았다. 다음 미션에 대해 고민하며 여러 영상을 자료 삼아 찾아보았다. 꽤 한참 집중했을까. 핸드폰 화면을 너무 오래 들여다본 탓에 눈이 빡빡하고 목덜미도 뻐근했다. 태오는 여전히 해외 안무 팀의 커버 영상이 재생 중인 화면에서 잠시 시선을 멀리 떨어뜨리고 머리를 한 바퀴 크게 돌렸다. 짧은 스트레칭을 하던 태오의 눈에 테이블 위에 올려진 옷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음….”

솔이 갈아입을 옷을 안 챙겨 갔던가. 너무 다급히 나간 터라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가지런히 개어 올려진 잠옷을 보며 태오는 잠시 고민을 했다.

한편 샤워를 끝마친 솔도 태오와 똑같이 턱을 문지르며 ‘음….’ 하는 침음을 내뱉었다. 생각 없이 옷을 훌러덩 다 벗어 던지고 샤워를 끝냈는데, 선반을 보니 그제야 갈아입을 옷을 챙겨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깨끗이 샤워를 끝마쳤는데, 더럽혀진 옷을 다시 걸쳐 입기엔 영 찜찜했다. 솔은 욕실 문을 살짝 열어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거실에 누가 있으면 불러 옷가지를 가져다 달라 부탁할 생각이었다.

욕실에서 그리 오랜 시간을 보낸 거 같지 않았는데, 슬쩍 내다본 거실에는 어둑하니 간접 등 하나만 은은하게 켜져 있고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다들 피곤해 일찍 잠들기라도 했는지 무척이나 고요했다. 고요한 가운데에 차마 누구를 부르기 머쓱해진 솔은 문고리를 붙잡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썰렁한 기운이 스며들어 솔은 몸을 움츠리며 다시금 문을 닫았다.

수증기가 들어찬 욕실을 대충 쓱 둘러본 솔은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몸을 가렸다. 다들 잠이 든 듯하니 조용히 하지만 빠르게 후다닥, 방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허리춤에 두른 수건을 단단히 고정하고 수건 한 장을 어깨에 둘렀다.

찬 기운에 재빨리 뛰어갈 생각으로 욕실 문을 연 솔은 날쌔게 다리를 움직였다. 물기가 조금 남은 발바닥이 바닥을 박차자마자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태오 형.”

“어.”

“어? 솔이 형?”

분명 조금 전만 해도 모두가 잠든 듯 고요했는데, 문을 벌컥 열고 뛰어나온 솔의 앞엔 제 옷가지를 든 태오가 서 있었고. 한 발 떨어진 자리엔 득용이 물컵을 들고 서 있었다.

득용의 느닷없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솔은 놀란 도둑고양이처럼 화들짝 튀어 올랐다. 펄쩍 뛴 솔은 그대로 ‘어라?’ 하는 얼빠진 소리를 내며 솔은 옷가지를 들고 서 있던 태오와 마주 부딪혔다. 물기를 머금은 발이 바닥에서 쭉 미끄러지며 몸이 중심을 잃고 뒤로 훅 넘어갔다.

태오의 손에 들린 솔의 옷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태오는 팔을 뻗어 뒤로 넘어가는 솔의 허리를 붙잡았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덕에 매끈한 피부가 따끈하게 열이 올라가 있었다. 태오는 순간 제 손안에 느껴지는 감촉에 놀라, 솔은 이 민망한 상황에 마주친 두 사람과 제 허리에 닿는 서늘한 태오의 손길에 놀라 두 사람 모두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다리가 꼬이고, 붙잡았던 손을 놓쳤다.

당황스러움에 오히려 솔을 밀쳐 버린 태오는 제 행동에 놀라 버둥거리는 솔을 다시금 끌어당겼다. 불협화음처럼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서로 뒤엉켜 버린 두 사람은 득용의 부름을 배경 음악 삼아 함께 그대로 바닥으로 엎어졌다.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솔은 태오의 위로 넘어졌다. 우습게도 가지런히 태오의 몸 위에 누운 꼴이 된 솔을 보며 득용이 탄성을 내뱉었다.

“우와우. 솔이 형 엉덩이가 완전 아기 궁둥이네.”

태오의 몸 위로 엎어지며 허리에 두른 수건이 살짝 벌어져, 솔의 흰 엉덩이가 살짝 드러났다. 짓궂은 그 나이대 남자답게 종종 벗고 뛰어다니는 일이 있는 득용은 물컵을 든 채로 아주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순간 솔의 얼굴이, 아니 온몸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푸드덕, 놀라 도망가는 새처럼 퍼덕거린 솔은 태오에게서 비켜나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마구잡이로 수건을 끌어 내려 몸을 가린 솔은 그제야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몸을 일으킨 태오도 큼큼 헛기침하며 솔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획, 돌렸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앉은 두 사람을 두고 득용은 별일도 아니라는 듯, 물을 홀짝이며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민망함은 두 사람의 몫이었다.

태오는 솔을 최대한 보지 않으려 고개를 고정한 채 바닥에 떨어진 옷을 수습했다. 솔은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움직이질 않았다. 솔의 옷을 챙긴 태오는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얼굴만 붉힌 채 옷을 내밀었다.

태오는 솔을 보지 못하고, 솔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탓에 태오가 내민 옷을 보지 못했다. 두 사람은 잠시간 그렇게 서로 통하지 않는 시간을 가졌다. 아무리 기다려도 솔이 옷을 받지 않자 태오가 조심스레 슬쩍 시선을 돌렸다가 화들짝, 다시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까만 머리칼과 대조되게 새빨갛게 달궈진 귀가 곧 터져 버릴 것처럼 붉어졌다. 열이 오른 태오의 귀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옷…. 안 챙겨 간 거 같아서.”

솔이 받지 않자 태오는 두어 번, 손을 더욱 내밀었다. 보송보송하게 잘 마른 잠옷이 팔에 닿자 솔은 그제야 허겁지겁 태오가 내민 제 옷가지를 받아 들었다.

“고, 고마워.”

옷을 챙긴 솔은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 놀란 사슴처럼 제가 튀어나왔던 욕실로 다시 들어갔다. 욕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날 때까지 태오는 먼 곳을 바라보던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화장실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솔은 소리 없이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괜한 짓을 했다. 스스로를 멍청이라 부르며 솔은 손에 든 옷가지에 이마를 푹푹 파묻었다.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엉덩이를 언급하던 득용의 말이 떠올라 솔은 ‘다른 건 못 봤겠지?’ 하며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잠시 뒤, 해프닝으로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잠옷을 가지런히 잘 챙겨 입고 나온 솔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민망함을 감추며 제 방문을 열었다. 민망하기는 마찬가지인 태오는 이미 불을 끄고 제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 가 있었다.

솔은 계속 열이 오르는 두 뺨을 가라앉히려 손부채질하며 따뜻한 이불 속에 발을 집어넣었다. 솔은 없는 사람처럼 조심조심, 사부작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너무 창피해 화끈거리는 얼굴이 도무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빨리 잠이나 자야지.’

부끄러움을 애써 진정시키며 솔은 엎어져 있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은겸이 몇 가지 노래를 더 보내 준 듯했지만, 솔은 그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보내 대화를 마무리했다.

부끄러움에 자는 척하다 솔은 평소보다 정말 빨리, 깊이 잠이 들었다. 사건의 원흉은 금세 새근새근 진정된 숨소리만 내뱉는데, 태오는 쉬이 잠이 들지 못했다. 자그마한 솔의 규칙적인 숨소리가 바로 옆 귓가에서 들리는 듯했다.

태오는 솔이 완전히 잠든 듯하자 조심스레 몸을 돌렸다. 태오도 솔처럼 빨리 잠들기를, 눈을 감고 청했었다. 하지만 시야에 어둠이 내려앉자 제 몸에 닿았던 솔의 감촉만 더 생생해지는 듯했다. 고개를 세차게 저은 태오는 머릿속에 스미는 생각을 떨쳐 내 보려 부단히 애를 썼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선명하게 떠올랐다.

성큼, 뛰어 허리춤에 두른 수건이 벌어지며 드러났던 허벅지. 늘 그의 손목이 깡말라 위태롭다 느꼈었는데, 다리는 제법 근육이 잡혀 있었었다. 무용해서일까. 늘 커다란 후드 티 너머로 가늠만 해 보던 둥근 어깨선과 쭉 뻗은 허리까지.

‘그 짧은 사이에 자세히도 봤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잔상에 태오는 어처구니가 없어 한숨을 내뱉었다. 그 정신없고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제법 자세히도 관찰했다 싶었다. 태오는 다시 한번 몸을 뒤척였다. 어떻게 누워도 불편하고, 이불과 맞닿은 구석구석이 절절 끓는 듯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숨이 가쁘고 가슴이 갑갑해 괜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뱉고 나니 그 숨소리가 퍽 커, 태오는 흠칫 솔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솔은 세상 편안한 얼굴로 깊게 잠이 들어 있었다. 따뜻하고 부드럽게 감기던 피부의 감촉이 손가락 위에 계속 남아 태오를 어지럽혔다. 손에 남은 감촉에 태오는 이불 속에서 괜스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 보았다.

고요하게 잠든 솔의 얼굴과 달리 태오의 속은 끓어올랐다. 한참을 뒤척인 태오는 갑갑함을 인내하지 못하고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벌떡 일어난 것과 달리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히 방에서 빠져나온 태오는 찬 기운이 도는 거실 소파에 주저앉았다.

서늘한 공기가 달아오른 뺨에 닿자 갑갑한 가슴이 조금이나마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았다. 태오는 서늘한 냉기가 도는 쿠션에 뺨을 대었다. 들끓어 올랐던 열기가 서서히 식어 감에도 태오는 쉬이 잠이 들지 못했다.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태오는 그렇게 소파에서 잠이 들 수 있었다.

“태오, 얜 왜 여기서 자?”

느지막이 소파에서 불편한 잠을 청했던 태오를 지호의 여상한 목소리가 깨웠다. 짙은 눈썹을 한껏 모아 인상을 찌푸린 태오의 귀로 영호의 목소리가 꽂혔다.

“솔이가 코 고니?”

“네? 솔이가요?”

영호의 물음에 지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태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이…. 조금 더운 거 같아서 여기서 잤어요.”

태오에게만 뜨거운 밤이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