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무대 위로 푸른 조명이 쏟아졌다. 태오를 제외한 멤버 모두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클래식한 발라드곡에 동양적인 요소를 가미하기 위해 가람은 과감하게 전주를 늘렸다.
현을 튕기는 동양 특유의 악기 소리와 세찬 바람이 지나가는 듯한 대금 소리가 이어지는 도입부. 무대 중앙에 태오만이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서 있었다. 이번 무대의 시작은 윤태오로부터였다. 그의 등 뒤로는 커다란 보름달의 영상이 흘러나왔다. 푸른색 조명과 부채로 가린 얼굴, 등 뒤에서 쏟아지는 달빛에 태오의 얼굴에는 역광이 드리웠다.
부채로 하관을 가린 탓에 그의 형형한 눈매와 짙은 눈썹이 한층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역광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가 무척이나 강렬했다. 그 모습이 초대받지 않은 밤손님 같기도 하고 달을 등지고 내려온 호랑이 같기도 했다.
비록 만들어진 달빛이지만 그 빛이 태오의 어깨선에 스며들었다. 하늘하늘한 옷감이 빛을 반사해 태오의 너른 어깨와 모델 같은 실루엣이 어둠에 가려지지 않게 만들었다. 단단한 나무토막이 서로 부딪히는 ‘짝’ 하는 타악기 소리가 무대 위에 울려 퍼지자 태오는 그 박자에 맞추어 부채를 움직였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다른 멤버들도 서로 다른 방향을 응시하며 태오와 같은 움직임을 이어 나갔다. 이윽고 부채가 동시에 착 소리를 내며 일제히 접혔다.
순간 태오를 향해 밝은 조명이 쏘아지며 역광 속에서도 빛나던 태오의 눈빛이 흠뻑 빛을 머금었다. 멤버들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자 태오는 시선을 잡아 두기 위해 화려한 손 기술을 펼쳤다. 막대처럼 접힌 부채를 허공에 살짝 던지고는 휘릭 돌려 다시 붙잡은 태오는 그 부채로 제 어깨를 톡톡 두들기고 다시 펼쳐 얼굴의 반을 가렸다.
어느새 안무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난 솔은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태오의 앞에 섰다. 카메라 화면 가득 솔의 얼굴이 잡혔다. 붉은 아이섀도에 눈꼬리만 포인트로 살짝 들어간 흰 아이라인이 무척이나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멜로디에 다소 슬프게 들리는 거문고 소리가 덧입혀지자 솔은 부채를 말아 쥐었다. 그러고는 처연히 시선을 떨구고 팔을 쭉 뻗어 높이 들어 올렸다. 백월에 떠오른 달 아래 부채를 쥔 솔의 가는 손이 창백하리만치 희게 보였다. 달빛과 조명을 받은 긴 소맷자락 너머로 쭉 뻗은 팔의 실루엣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긴 목과 애처로운 손끝이 순식간에 분위기를 고풍스럽고 우아하게 만들었다.
솔은 아주 능숙하게, 부채와 한 몸이 된 것처럼 허공에서 부채를 펼치고는 날갯짓하듯 팔랑거려 제 반대편 어깨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자신을 찍는 카메라를 보곤 첫 소절을 떼었다.
“난 꿈을 꿔, 깊은 밤.”
제대로 박자를 맞춰 노래를 시작하기 위해 솔은 단순 반복적인 연습을 계속했다. 딱 맞는 타이밍에 솔의 고요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함께 고생했던 지호의 입가가 살짝 씰룩였다.
솔이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한 바퀴를 빙 돌아 왼편으로 물러섰다. 카메라도 솔을 따라 움직이며 그의 모습을 계속 렌즈에 담았다. 첫 소절을 솔이 시작하는 것에 대해 솔을 포함한 모두가 부담감을 가졌다. 보컬 실력을 중점으로 보여 줘야 하는 무대이다 보니 당연하게도 곡의 후반부로 갈수록 애드리브나 고음, 가창력과 호소력을 요구하는 소절이 많았다.
연기 수업, 보컬 트레이닝과 지호의 조언까지 받고 있는 솔이었지만 여전히 그는 감정 표현에 있어 어색한 부분이 많았다. 그런 솔에게는 차라리 처연하면서도 덤덤하게 회상하듯 시작하는 도입부가 안전하고 그를 매력적으로 돋보이게 만들어 주는 최선의 선택지였다.
“이뤄지지 않을 꿈속에서 수없이 너를 찾아보지만 결국 너를 놓치고 말겠지.”
눈이 내린 듯 얼어붙은 은발의 솔은 가사와 어우러지면서 상처 입고 지쳐 마음이 얼어붙은 남자처럼 보였다. 솔이 무사히 도입부를 시작하자 모니터링을 하던 영호는 화면 가득 채워지는 영롱하기 짝이 없는 솔의 얼굴을 보며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솔이 왼편으로 빠지자 가람이 부채로 제 옆머리를 살짝 툭툭 치며 그가 빠져나간 자리를 채웠다. 적당히 낮은 느른한 듣기 좋은 목소리가 노래를 이어 나갔다.
“눈을 뜨면 다시 반복되는 시간. 쓸쓸히 바래진 기억, 거꾸로 시간이 흐른 듯 나는 네가 떠난 그날에 여전히 갇혀 있어.”
가람이 안정적으로 제 파트를 마무리하며 팔을 크게 휘두르며 턴을 했다. 힘 있는 동작에 조금 긴 그의 머리칼과 옷자락이 휘날렸다. 펄럭이는 옷자락이 사뿐히 내려앉음과 동시에 가람의 오른편에서 태오가 나와 두 사람이 서로 등을 맞대고 부채를 펼쳤다. 잘생기고 큰 키의 두 남자의 투샷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낮과 밤. 이제는 꿈에서 헤어 나올 수 없어.”
유난히도 낮은 태오의 목소리가 조금 전까지 귀를 간지럽혔던 가람의 나긋한 목소리와 대조되었다. 등을 맞댄 가람이 어느새 일렬로 태오의 뒤편에 늘어선 멤버들의 뒤로 움직여 모습을 감췄다. 솔이 청아한 선비 같다면 같은 의상임에도 태오는 강한 눈매 때문에 명가의 도련님 같으면서도 강인한 무사 같아 보였다.
“꿈에 취해, 고장이 나 버린 나침반을 따라서 닿을 수 없는 너에게 달려가는 꿈에서 벗어나질 못해.”
태오는 부채 끝을 어깨에 살짝 올리고 반대 손을 카메라를 향해 펼쳤다. 그러고는 힘껏 무언가를 간절하게 붙잡듯 강하게 손을 움켜쥐었다. 노랫소리와 감정이 점점 고조되는 순간. 태오가 사라지고 솔과 득용이 만들어 낸 부채 가림막을 헤쳐 지호가 걸어 나왔다.
“아무리 네 이름을 부르고 애원해도 너에게 닿지 못하고 너를 찾아 헤매이네.”
아주 예쁘게 포장된 선물처럼 카메라 너머의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지호는 간절하게 호소했다. 카랑카랑한 고음의 목소리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제 실력의 마음껏 뽐내기 시작했다.
“오늘도 난 너를 찾아 이 자리에 있어.”
무대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커다란 성량과 안무에도 흔들림 없는 호흡. 그간 갈고닦았던 기교들을 가감 없이 들려주며 지호는 절절한 후렴구를 제 노래로 만들었다. 지호의 매끈한 고음이 하이라이트를 장식하자 노래에 담긴 감정처럼 휘몰아치듯 격정적인 거문고 현을 튕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말 그대로 ‘뜯는다’ 싶을 정도로 현을 강하게 튕기는 소리와 타악기 소리에 맞춰 지호가 허리를 숙이자 그 뒤로 득용이 뛰어올랐다. 태오와 가람을 디딤판 삼아 득용은 그야말로 날아올랐다.
솔이 처음 이 안무를 선보였을 때, 태오를 제외한 모두가 그저 입을 벌리고 손뼉만 마주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오와 가람을 밟고 착지하기까지 그 일련의 과정이 마치 슬로 모션처럼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그다지 힘도 들이지 않고 우아하게 체공하는 솔의 모습은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솔의 설명이 이어진 끝에 멤버들이 저마다 돌아가며 그를 따라 한 번씩 뛰어 보았지만, 솔과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그나마 태오가 엇비슷하게 솔을 따라 하기는 했으나 여러 번 시도 끝에 결국 이 댄스 브레이크의 하이라이트를 가져가는 것은 득용이 되었다. 점프하는 사람 못지않게 아래에서 받쳐 주는 사람도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키가 큰 태오를 받치는 것이 멤버들로선 여의찮았고 힘들이지 않고 사뿐하게 뛰어오른 솔의 모습과 달리 뛰는 데에도 제법 힘이 필요했다.
솔보다 더 크고 무거운 득용을 높이 날리기 위해선 가람과 태오가 타이밍 맞춰 그를 힘껏 밀어 올려야 했다. 그 결과 지호를 훌쩍 뛰어넘어 날아오른 득용은 아주 육중하게 무대 위에 내려앉았다.
무사히 착지하나 싶었던 순간. 득용이 살짝 비틀거리며 들고 있던 부채를 놓쳤다. 바닥에 미끄러진 득용의 부채는 대열의 뒤로 빠지던 지호의 발에 치여 무대 위를 굴러다녔다. 하지만 그런 부채 따위 멤버들의 신경 밖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득용에게로 향했다. 이마에 군청색 띠를 두른 득용은 제 등 뒤에 느껴지는 멤버들의 걱정스러운 시선에도 쉬이 일어나지 못했다. 중심이 흐트러진 채 착지하며 발바닥을 타고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득용은 형들의 걱정이 담긴 시선을 느끼며 착지한 자세 그대로 보란 듯이 랩을 내뱉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중심이 흐트러지는 바람에 손으로 땅을 짚어 액션 영화의 주인공 같은 자세로 착지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슬픔에 잠겨 목이 멘 듯 거친 목소리로 울부짖듯 랩을 이어 간 득용은 왼발에 꾹꾹 힘을 줘 보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실수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이 득용은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며 귀에 내려꽂히는 랩을 자연스레 이어 나갔다. 발목이 조금 시큰거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득용은 내색하지 않았다.
득용이 무대 중앙에서 물러나자 솔과 태오가 중앙을 차지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등지고 같은 동작을 펼쳤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는 동작, 그리고 상반되는 머리카락 색과 인상이 대비되어 오히려 서로를 비추는 거울에 맺힌 상 같아 보였다. 태오는 본래 짜인 안무보다 더 나아가 다리를 길게 뻗었다. 솔이 다리를 뻗어야 하는 지점에 득용이 떨어뜨렸던 부채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이 부채를 밟지 않도록 태오는 득용의 부채를 발끝으로 밀쳐 내며 팔을 움직였다. 등을 맞대고 있던 두 사람이 몸을 돌려 서로를 마주하곤 엇갈려 스쳐 지나갔다. 무대의 사이드로 빠져 대열로 다시 합류하려던 솔은 태오가 밀어냈던 득용의 부채를 발견하곤 재빨리 주워 소매 안에 감췄다. 다시 빠르게 움직여 득용의 뒤에 선 솔은 그의 옆구리로 슬쩍 부채를 밀어 넣었다.
득용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솔이 건넨 부채를 건네받았다. 이어지는 단체 군무에 득용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부채를 손에 쥐었다.
무대가 끝나고 번쩍이며 조금도 쉬지 않고 움직였던 조명이 고정되고, 10초 정도 카메라를 응시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카메라의 빨간불이 꺼진 후 멤버들 모두 숨 고를 틈도 없이 득용에게로 모여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미처 인지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득용은 분명 착지하며 중심을 잃고 발목을 접질렸었다. 사고 이후 다시 안무를 모두 소화해 낸 득용이지만 그의 상태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득용에게로 멤버들이 모여들기 무섭게 무대에서 내려가라는 스태프의 수신호가 이어졌다. 득용은 저에게 모여든 형들을 보며 손을 마구 내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