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 (121)화 (121/192)

#121

“그렇지만….”

솔이 말꼬리를 흐리며 고개를 들자 지호는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렸다. 의식하고 한 행동이 아니라 자동 반사 같은 것이었다. 언제 표정이 고요하게 내려앉았었는지 모르게 지호는 아주 생글 웃고 있었다. 그의 변함없이 웃고 있는 얼굴을 확인하자 솔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런 솔과 눈을 맞추며 지호는 다정하고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들이 무슨 말 하든지 간에 결국 솔이 네 생각과 네가 느낀 게 중요한 거야.”

지호의 그런 모습이 너무도 의젓하고 어른스러워 솔은 어깨에 힘을 풀었다. 긴 목덜미부터 조금 낮은 승모근, 둥근 어깨가 힘이 빠지자 한참 축 내려갔다. 힘이 빠진 어깨가 무거워 보인다기보단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한결 편안해 보였다.

“뭐 거창하게 날 믿어라 이런 거 아니고, 사람은 복잡하니까. 명하의 말대로 명하에겐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느껴졌을 수도 있어.”

솔이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자 지호의 표정은 밝아졌지만 그의 속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욕을 먹은 건 지호인데 도리어 그는 솔을 진정시키듯, 타이르듯 이야기하고 있었다. 남 일처럼 말이었다. 지호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며 겉으로는 보란 듯이 더 환하게 웃었다.

“명하 말고도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더 있을 수도 있고. 모든 사람한테 좋게 기억되는 사람이면 싶지만 그러기는 힘들잖아.”

듣기 좋은, 입에 발린 말을 하고 있었다. 이건 어쩌면 착한 사람 콤플렉스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명하의 말대로 솔의 외모가 워낙 눈길을 잡아끌어서, 재능이 있어서, 연예계에서 성공할 것 같아서. 그런 이유로 솔에게 잘해 주고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저 솔의 앞에서는 이유 없이 좋은 사람, 그럴듯한 사람이고 싶었다.

솔직히 지호는 명하의 말이 꽤 아파서 한편으로 불안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웃으며 입에 발린 말을 내뱉는 이유는 솔에게 멋진 형,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결국 그 의도가 어찌 되었든 솔에게 잘 보이려 모습을 꾸미고 있으니 명하의 말대로였다. 이제는 제가 솔에게 보여 주는 모습과 감정이 정말 진짜이긴 한 건지 스스로가 헷갈릴 정도였다.

“아무리 열심히 하고 조심해도 안티팬이 생기는 것처럼 말이야. 반대로 내가 애쓰지 않아도 나와 정말 잘 통하고, 내가 좋은 사람도 있겠지.”

더 나은 사람인 척 솔에게 조언하고 있지만 사실 이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모습을 꾸며 내지 않아도, 온전하게 약하고 찌질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도 솔이 제 마음을 알아주고 좋은 사람이라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

“뭐 물론 나서서 싸워 주는 그런 행동에 감동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딱히 그렇지는 않거든. 저 이야기를 듣고도 솔이 네가 평소처럼 날 걱정하고 날 보고 웃고 변함없이 우리가 좋은 사이라면 난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

아니. 속에 없는 말은 아니었지만, 이왕이면 솔이 더 화를 내 주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편을 들어 준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솔에게 그런 과분한 요구할 자격 같은 건 없었다. 더불어 솔의 유약한 성격에 그런 걸 바라기는 더더욱 힘들었다. 지금이 딱 좋았다. 이 적당한 거리감과 손을 뻗을 듯 말 듯. 가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바로 옆에 있지만, 온전히 붙이진 않는 이 정도 거리감.

지호는 태오를 떠올려 보았다. 태오는 자신처럼 제 모습을 꾸며 내지 않겠지. 그런데도 태오는 든든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특히나 요즘 솔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샘이 날 정도로 솔에게 의지가 되고 있었다. 겨우 어깨를 나란히 하고선 좀 더 닿을 수 있을까 시꺼먼 마음을 숨기려 연기하는 자신과 달리 태오는 솔의 어깨 뒤에 서 있으면서 오히려 솔에게 더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솔이 태오를 바라보는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반대로 솔을 지켜보는 태오의 눈을 봐도 알 수 있었고. 태오라면 지금 이 상황 솔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지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윤태오라면 분명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거다. 자신처럼 구질구질하게 말을 늘어놓지도 않고 무심한 표정으로 눈썹 한번 꿈질거리곤 솔을 데리고 대기실로 돌아가겠지.

자신은 윤태오가 아니니 비교해 봐야 소용없었다. 오히려 이런 자신이 더 거짓된 사람 같아 심란해질 뿐이었다. 지호는 고개를 살짝 흔들며 눈가를 활짝 접었다. 컬을 더욱 크게 넣어 스프레이로 고정시킨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흔들렸다.

“그리고 지금 솔이 넌 나 대신 화내 주고 있고 걱정하고 있잖아?”

“응.”

“그래서 충분히 좋아.”

“지호 형….”

지호가 일말의 그림자도 없이 밝은 햇살처럼 웃자 솔은 그가 내뱉은 말을 곱씹더니 살포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 묵묵히 생각을 되새기던 솔이 조금 수줍게 입을 열었다.

“형이 나 많이 도와주는 거 알고 있고…. 고마워하고 있어.”

멤버들 모두가 솔에게 많은 배려와 도움을 주고 있지만 생활에 있어 솔을 챙기는 건 지호의 비중이 가장 컸다. 나이 터울이 많이 나는 형제가 있었다면 딱 지호 같았을까.

지호가 꾸며 낸 모습이든 뭐든. 그 속내를 모두 알 수 없는 솔은 그저 눈앞의 지호가 너무도 멋진 사람이라 생각했다. 자신도 저렇게 의연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은 같은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사람의 모습을 부러워했다.

“지호 형은 정말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솔이 제 손가락을 꿈질거리며 수줍게 속마음을 이야기하자 지호가 가지런한 이를 드러냈다. 언제 태오를 부러워했냐는 듯, 지호는 활짝 아주 아주 환하게 웃었다. 꾸며 낸 표정이 아닌 자신도 모르게 지은 순수한 웃음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윤태오보단 도지호인 게 좋았다.

웃음을 터뜨린 지호는 민망해하는 솔을 보며 장난을 걸었다. 농담인 듯 진담같이 툭 던진 말이었다. 지호가 첫사랑 고백을 받은 아이처럼 과장되게 두 손을 가슴께에 모으며 몸을 살살 꼬았다.

“우리 솔이, 형한테 고백하는 거야? 이다음에 반지나 꽃다발 나오는 거 아니지? 형 설렌다. 막 두근거려.”

지호의 장난에 솔의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 버렸다. 지호는 자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끅끅 소리를 내며 참았다. 솔이 제 일에 화를 내서 좋았다는 말은 취소였다. 억울함과 후회, 분노로 빨개지는 것보다 부끄러워 붉게 익은 모습이 몇 배는 보기 좋았다.

“화장실 안 갈 거면 먼저 돌아갈래? 나는 잠깐 들렀다가 갈게.”

지호는 부끄러워하는 솔의 몸을 슬쩍 돌리며 복도로 밀어냈다. 아주 조금, 짧지만 지호에게도 제 감정을 정리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지호는 솔이 ‘응’ 하고 수줍게 대답하고는 대기실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을 한참 지켜보다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하지만 그도 잠시. 자신을 비추는 세면대 거울 앞에 서자 지호는 반사적으로 그린 듯 웃음을 지었다. 자동 반사 같은 것이라 어찌할 수가 없었다.

***

“부채, 다들 확인해요.”

무대에 오르기 3분 전. 태오의 차분한 목소리에 득용은 부채를 한번 쫙 펼쳤다. 얼굴이 비치도록 얇고 흰 망사 재질로 만들어진 부채에는 대나무 수묵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 사이로 득용의 얼굴이 언뜻언뜻 비쳐 보였다. 태오의 지시대로 부채에 문제가 없는지 확인한 득용이 당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확인 완료!”

부채 확인을 끝내고 이마에 댄 천을 다시 한번 단단히 묶는 득용을 보고 가람도 익숙지 않은 복장이 어색한지 연신 도포 뒷자락을 매만졌다. 혹 의상이 말려들어 가진 않았는지 재차 확인하던 가람은 제 뒤에 서 있던 솔에게 물었다.

“나 뒤에 괜찮아?”

“응. 괜찮아. 잘 어울려.”

솔은 가람의 한복 뒷자락을 한 차례 정리해 주고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여 주었다. 솔이 한 차례 더 맵시를 매만져 주자 가람은 그제야 안심한 듯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던 얼굴을 조금 풀어 보였다.

대개 남자 아이돌들의 동양풍 컨셉 의상은 좀 더 화려하게 개량된 의상이 대다수였다. 무대에서 더 멋져 보일 수 있게 망사의 긴 도포나 치렁치렁한 장식이 달리거나, 그도 아니면 천 자체에 화려한 자수나 문양이 들어가거나. 하지만 솔을 비롯한 멤버들이 입은 의상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솔이 전통 한국 무용을 무대에 올릴 때 입는 제대로 갖춰진 한복에 가까웠다.

흔히들 ‘선비’라고 불릴 법한 한복 말이었다. 저고리와 바지는 깨끗한 흰색에 겉에 걸친 도포는 짙은 군청색이었다. 아무래도 등급이 낮은 카드를 뽑아서일까. 의상은 무대 의상보단 전형적인 한복에 가까웠고 화려하지는 않았다. 또 한복을 제법 입어 본 솔의 기준에서 그다지 좋은 옷감도 아니었다. 다소 밋밋해질 수 있는 의상에 스타일리스트는 노리개나 득용의 이마에 두른 천, 허리띠처럼 몇 가지 포인트 액세서리를 추가했다.

“솔, 너도 잘 어울려.”

솔의 칭찬에 가람도 솔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워 주었다. 워낙 뛰어난 외모 덕에 뭘 입어도 흠이 없었지만, 솔은 정말 한복이 잘 어울렸다. 달리 한국 무용을 했던 게 아닌지. 한복을 입은 솔은 정말 청아하고 고아한 선비 같아 보였다. 솔에게 잘 어울릴 거라며 특별히 포인트로 그려 준 흰 아이라인과 탈색한 은발 머리만 아니었다면 운치 있는 달밤에 고고하게 산책을 나온 선비가 따로 없었다.

가람의 칭찬에 솔이 제 옷매무새를 한번 다듬었다. 오랜만에 입는 한복이 낯선 듯 익숙하기도 하고 기분이 묘했다. 전통적인 한국 무용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한복을 입고 제가 만든 안무를 무대에 올린다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다. 첫 무대 때도 그러했지만 느껴지는 감정의 크기가 달랐다.

솔은 아직 무대에 오르지도 않았는데 긴장감에 가빠지는 호흡을 느끼며 제 상태 창을 다시금 확인했다. 트라우마 저항. 안정의 포션의 효과가 잘 적용되고 있는 것을 확인한 솔은 눈을 지그시 감고 크게 심호흡했다.

뒤에서 멤버들의 모습을 다시금 점검한 태오도 솔을 따라 심호흡을 크게 하고는 ‘화이팅.’ 하며 단호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솔은 제 등에 닿는 커다란 손을 느꼈다. 태오의 손이었다.

제 등을 지지해 주는 손의 온기를 느끼며 솔은 가람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캄캄하지만 곧 더없이 화려하게 빛날 무대에 올라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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