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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를 뽑고 싶어 (120)화 (120/192)

#120

명하와 다른 두 사람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솔은 걱정을 가득 담아 지호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솔의 시선을 느낀 지호는 그와 눈을 맞추고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는 미소를 지었다. 기분이 나쁘거나 억지로 웃는 게 아니라 짓궂은 웃음이었다. 솔이 제 눈치를 살피는 기색이자 지호는 그제야 꽉 잡은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

“쟤네 때문에 화장실 못 갔지? 얼른 다녀와.”

눈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화장실에 가는 것도 웃겼다. 솔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하다 도리어 지호에게 반문했다.

“괜찮아…. 별로 가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근데 괜찮아?”

“나? 괜찮은데?”

“…….”

솔의 눈에 지호는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그의 반응에 솔은 가슴 한편이 스산했다. 비난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비난의 내용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일단은 상처받게 된다. 물론 그 상처의 크기가 다를 수는 있다. 나아가 사람에 따라 조금 시차를 두고 그 비난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솔이라면 그 상처를 스스로 떨쳐 내고 다시 일어나지 못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눈앞의 지호는 정말 조금의 상처도 받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건 어딘지 이상했다.

솔의 표정이 도무지 풀릴 줄을 모르자 지호는 두 손을 들어 그의 어깨에 올렸다. 지호의 손이 툭툭 솔의 어깨를 두들겼다. 욕을 들어 먹은 건 지호인데 오히려 솔이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 낼 듯 보였다. 솔의 얼굴을 보고 입을 한번 씰룩인 지호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늘어놓았다.

“사실 솔이 너한테 들켜서 조금 창피하긴 해. 그래도 별로 신경 안 써. 딱히 틀린 말도 아니고.”

지호의 말에 솔의 표정은 더욱 안 좋아졌다. 도리어 명하의 비난을 인정해 버리는 지호의 대답에 솔은 명하에게 아무 말도 못 하고 숨어만 있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지호 형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따지지는 못할지언정 화장실을 박차고 들어가 뚫어져라 쳐다보기라도 할걸. 정작 지호를 욕하던 사람들 앞에선 아무 말도 못 하던 솔은 지호에게 날카롭게 언성을 높였다.

“뭐가 창피해? 창피해야 할 건 뒤에서 형 욕한 사람들이야!”

솔이 이토록 언성을 높이는 모습을 처음 본 지호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 놀람도 잠시, 지호는 빠르게 표정을 감추고 조금 전보다 더욱 환하게 웃었다.

“명하가 맞는 말 했는데 뭐. 난 솔이 옆에 거머리처럼 찰싹 붙어 있을 건데. 그리고 내가 보는 눈도 좀 있지.”

걱정을 넘어서 뒤늦게 화가 난 듯한 솔의 반응에 지호는 슬그머니 솔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투정을 부리는 듯한 말투로 장난스레 솔을 달랬다.

지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명하의 말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스스로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걸 깨닫고 그리 뛰어난 재능도, 외모도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이후로 지호는 딱 명하의 말처럼 지내 왔다. 선두 그룹에서 도태되는 게 싫었다. 악착같이 그들과 어울리려고 부탁한 적도 없는 일을 척척 해 주곤 했었다.

솔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니 제법 화가 났는지 둥둥 불안하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애초에 명하 그 새끼가 솔에게 눈길이 가게 만드는 게 아니었는데. 멀찍이 떨어져 있을걸. 그에게는 이런 제 이야기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자신이 지금 솔에게 하는 모든 행동이 진심이 아니라 포장된 가식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생각하면 어쩌나. 조금의 의심도 심어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니 괜한 기우였단 생각이 들었다. 지호는 살짝 솔에게서 몸을 떨어뜨렸다가 다시 와락, 힘껏 끌어안았다. 그 행동에는 혹여나 솔이 어색해하지 않게 장난이 그득했다.

“솔이가 나중에 엄청 인기 있어져도 나 버리지 못하게 더 잘해 줘야지.”

“지호 형!”

이제 와 속에서 열이 끓어올라 눈물이 나려 하는 자신과 달리 태평하게 허허 웃으며 장난을 치는 지호를 보니 솔은 한층 더 속이 상했다. 소리를 높여 지호를 단호하게 부르자 지호가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지호가 자신을 포장하고 꾸며 내는 데에 능숙해도, 솔의 생각대로 지호도 사람이었다. 이 정도 애들 유치한 신경전엔 이골이 났고 솔의 앞만 아니었다면 상대해 줄 가치도 없었다.

하지만 그도 사람이기에 사실 화장실 앞에서 제 뒷담화를 듣고 있는 솔을 발견했을 땐 입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찰나였지만 제 모습을 솔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 보지 못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조금 전까진 솔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강한 척하느라 거짓된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지금은 정말 오롯하게 짓는 웃음이었다. 솔의 걱정과 화가 기꺼웠다.

처음 만났을 때,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은 건 스스로이면서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 정작 스스로 상처받은 표정을 짓던 솔이었다. 그런 솔이 지호 자신이 당한 일에 화를 내 주고 분해 씩씩거리며 눈물을 글썽이는데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 대신 화내 주는 거야? 우리 솔이 착하기도 하지. 솔이가 내 편 들어 주니까 기분 좋은데.”

지호가 능청을 떨었다. 평소라면 지호의 이런 넉살에 웃고 넘어갔을 솔이었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오히려 뒤늦은 감정이 북받치는지 솔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아 낼 것처럼 눈가를 새빨갛게 붉혔다. 그제야 지호는 당황하며 뺀질거리기를 멈추고 황급히 솔을 달래기 시작했다.

“정말로 별로 신경 안 써. 지금 우리 멤버들이야 너무 순해 빠졌지만, 보통은 저런 게 일상다반사거든.”

“…….”

“뒷담 정도야 애교지. 적어도 대놓고 괴롭히지는 못하잖아.”

지호의 말에 솔의 표정이 풀어지기는커녕 눈가가 더욱 시뻘게졌다. 이내 동그랗고 예쁜 모양의 코끝까지 붉어졌다.

“대부분 10대 때부터 보호자 없이 생활하니까…. 관심 가져 주는 사람이 없으면 선생님 없는 교실이나 마찬가지야. 학교랑 똑같은 유치한 짓거리고….”

어째 제가 말을 하면 할수록 어두워지는 솔의 표정에 지호는 모처럼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허둥댔다. 솔을 달래기는커녕 지호는 자신이 뭐라 떠드는지 모를 정도로 횡설수설하며 말이 빨라졌다. 이내 눈동자 위가 온기를 가진 물로 넘실거리자 솔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솔을 본 지호는 끌어안고 있던 그를 놓고, 고개 숙인 솔과 눈을 맞추려 허리를 숙였다.

“솔아, 나 정말 괜찮거든? 울면 안 돼. 울지 마. 뚝!”

허리를 반쯤 숙이고 고개만 치켜든 지호가 억지로 고개 숙인 솔의 얼굴을 보려 머리를 들이밀었다. 메이크업 정돈도 끝냈고 옷만 갈아입으면 되는데, 여기서 울음을 터뜨리면 다시 누군가가 수고스러워져야 했다.

“이러면 내가 울린 거 같잖아. 솔아.”

고개를 푹 숙인 솔과 지호는 아득바득 눈을 맞췄다.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긴 했지만, 솔은 애써 눈물을 꾹꾹 참고 있었다. 오히려 더 건들면 툭 터져 버릴 것 같아 지호가 한 발 물러서자 솔이 손을 뻗어 지호의 팔을 잡았다. 그러고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푹 숙인 고개 사이로 흘러나왔다.

“…미안해. 지호 형”

“솔아, 네가 뭐가 미안해.”

지호는 거의 자동 반사처럼 솔의 사과를 받아쳤다. 대체 여기서 솔이 사과할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사과는 씹어 먹을 김명하가 해야지.

“아무 말도 못 하고 듣고만 있어서 미안해.”

“솔아….”

솔의 사과에 지호는 허탈한 숨을 뱉듯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게 뭐가 미안해.”

지호가 제 팔을 붙잡은 솔의 손을 감싸 쥐었다. 다정한 그의 손길에 솔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만약 화장실 너머의 사람들이 자신을 욕하고, 자신이 있던 자리에 지호나 다른 멤버들이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다들 제 일처럼 화를 내고 명하에게 한마디씩은 해 줬을 것이다. 과분할 정도로 애정을 보내 주는 제 멤버들이라면 한마디는 무슨. 사과하라며 드잡이질 하고도 남을 듯싶었다.

“반대였으면 형은 안 그랬을 거잖아.”

붉게 칠한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솔은 거의 속삭이듯 말을 내뱉었다. 목구멍에 울음이 턱 걸려 크게 소리를 내면 언어 대신 울음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지호는 그런 솔을 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틀었다.

“그건 그렇지. 김명하가 솔이 네 욕했으면 방송국이고 뭐고 싸웠을 거야. 근데 솔아. 내가 그런다고 너도 그래야 할 필요는 없어.”

지호가 나지막이 제 생각을 이야기해 나가면서도 솔은 고개를 돌릴 줄 몰랐다. 지호는 여전히 푹 숙어진 그의 은색 머리통이 유난히 둥글어 유리구슬처럼 쓰다듬어 주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러면 울음을 삼키고 어이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까. 솔에게 드리운 우울한 생각을 덜어 낼 수 있다면 그런 장난이야 수십 번도 더 쳐 줄 수 있었다.

“내가 너한테 선물을 준다고 너도 나한테 꼭 선물을 줘야 하는 건 아니야. 내가 너를 위해서 싸운다고 솔이 네가 날 위해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지호는 솔의 머리를 응시하며 모처럼 조금의 꾸밈도 가식도 없는 솔직한 제 마음을 이야기했다. 솔의 앞에선 늘 꾸밈없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도 이미 몸에 배 버린 습관 때문에 지호는 늘 그렇듯 자신을 포장하고는 했다. 다정하고 착하고 동생을 잘 챙겨 주는 형. 단순히 그런 좋은 형이고만 싶은 건 아닌데. 오히려 솔이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니 지호는 꾸밈없이 속을 터놓고 말하기 한결 수월했다.

제가 온전히 말을 끝내도록 솔이 저 고개를 들지 않았으면. 아니, 지금, 이 순간 끝까지 솔이 자신을 보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러면 자신 때문에 화를 내고 싸워 주지 못해 속상하고 분해하는 솔을 보며 기뻐하는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될 텐데. 솔이 고개를 들어 지호를 바라본다면 지호는 늘 그랬듯이 또다시 좋은 형으로 자신을 포장할 것이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에 멈추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숨 쉬듯 자연스레 하는 거였다.

“내가 뭘 해 줬다고 너도 해 줘야 한다는 건 좀…. 슬플 거 같은데. 그거야말로 진짜 명하 말대로잖아.”

다행히도 그가 바란 대로 솔은 끝까지 고개를 들어 지호를 보지 못했다. 고개 숙인 솔을 보며 지호는 울 듯, 웃는 듯 이도 저도 아닌 그답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이 바로 가장 솔직한 그의 민낯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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