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솔은 화장실 방향을 가리키는 팻말을 따라 대기실과 반대로 복도를 따라 쭉 들어갔다. 똑같은 회색의 문이 쭉 늘어선 복도는 딱히 이렇다 할 만한 특징이 없었다. 걸음을 옮기던 솔은 잠깐 뒤를 돌아보고 멤버들이 사라진 방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어리바리하게 굴다가 제 대기실이 어딘지 까먹으면 여러모로 난감할 것 같아서였다.
돌아갈 대기실의 호수까지 속으로 확인한 솔은 남자 화장실 입구로 들어섰다. 모퉁이만 돌면 되는데, 그 안쪽에서 들려오는 남자들의 웃음소리에 반사적으로 솔은 걸음을 멈췄다. 보기엔 한적한데, 화장실 안이 꽤 붐비는 것 같았다. 민망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 솔이 걸음을 돌려 다시 복도로 빠져나오려던 찰나, 그의 뒤에서 아주 사나운 말소리가 들렸다.
“존나 짜증 나.”
누군가를 비웃듯, 힐난하는 어조. 멤버들을 만나기 전까지 솔이 제법 많이 듣던 목소리들이었다. 물론 그 스스로가 자초해 만든 일들이었지만, 그래도 저렇게 어딘가에 모여 욕하며 웃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은 발끝으로 가라앉기 마련이었다. 당해 본 사람이 더 잘 안다고 딱 한 마디였지만 솔은 그 목소리에 담긴 맥락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화장실…. 이따가 다시 오자.’
불편한 감정들이 밀려와 빨리 복도를 벗어나려던 솔의 발걸음을 익숙한 이름이 붙잡아 세웠다. 그리고 솔의 생각을 증명하듯 바로 뒷말이 이어졌다.
“도지호, 그 새끼 여전하더라. 존나 재수 없어.”
“아까 명하, 네가 인사할 때 걔 표정 봤어?”
“처웃는 거 가식 쩔어.”
지칭되는 익숙한 이름에 솔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역시, 조금 전에 느꼈던 그 묘한 기분 나쁨은 착각이 아니었다. 지금 저 안에서 지호에 관해 이야기하며 웃고 떠드는 사람이 바로 인사를 나눴던 그 ‘명하’였다.
지호의 이름을 저런 어조로 부르며 낄낄거리는 것 자체가 기분 나빴다. 단순하게 기분 나쁜 걸 넘어서서 얼굴이 화르르 타오를 정도로 화가 났다. 화를 내며 화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지호에 대해 함부로 떠들지 말라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그럴 강단은 없었다. 용기 없는 비겁자이기에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솔이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이번에는 지호가 아닌 제 얘기에 다시금 멈추어 섰다.
“근데 그 은발 왜 소개해 달라 했어?”
“뭐가.”
“아까 YC 애 소개해 달라며. 네가 도지호한테 그랬잖아.”
“아. 그거? 도지호 걔 빨대는 잘 꽂잖아.”
못 들은 척 지나가야지. 한 귀로 듣고 흘려 머릿속에서 털어 낸 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기실로 돌아가야지. 돌아가서 어서 의상 갈아입고 지호 형이랑 가람이랑 태오랑 득용이랑 모여서 파이팅을 외쳐야지. 그러면 모든 게 다 좋게 흘러갈 거야. 솔은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솔의 생각과 달리 그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등이 벽이랑 붙어 버린 듯, 신발 밑창의 고무가 녹아 바닥과 한 몸이 된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화장실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점점 커져 솔의 귀에 또렷하게 박혔다. 듣지 않고 싶은데, 벽에 바짝 귀라도 대고 엿듣는 것처럼 어쩜 그리 잘 들리는지 의문이었다.
“그 새끼가 맨날 착한 척 챙겨 주고 붙어 지내던 애들 다 잘됐잖아. 도지호 걔 원래 그런 애들한테 붙어서 빨대 꽂는 게 특기야.”
“그랬었나?”
“기억 안 나냐? 원우랑 진형이도, 도지호만 빼고 다 잘됐잖아.”
“그러네. 맨날 원우 먹을 거 챙겨 주고 ‘엄마’ 이 지랄 할 때 토할 거 같았잖아.”
솔은 고개를 푹 숙이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지호가 굳이 멤버들을 챙겨 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매일 아침 솔을 비롯한 멤버들에게 식사를 챙겨 주는 것도. 대기실에서처럼 따스하게 솔을 걱정해 주는 것도.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으면 매번 득용과 장난을 쳐 풀어 주는 것도 구태여 그가 할 필요가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행동이 어떤 의도가 있어서라고 솔은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 지호를 만났을 때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기는 했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적어도 솔이 느끼기엔 지호는 매 순간 진심으로 동생들을 챙겨 주고 있었다. 과묵한 태오와 매번 실수투성이인 자신, 다정한 목소리만큼 속이 여린 가람과 산만 한 덩치와 달리 애교가 많은 득용에게 지호는 의지할 수 있는 좋은 형이었다.
지호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욕을 들은 것도 아닌데 솔은 그가 이런 대화에 거론된다는 것이 분하고 억울했다. 주먹을 꽉 쥐니 손바닥이 욱신거려서일까, 눈가가 뜨뜻미지근해졌다.
“그렇지? 이번에도 봐. 은근히 싸고도는 애, 걔는 YC 아니어도 그 비주얼이면 어디든 먹힐걸? 검은 머리 둘도 그렇고.”
“아, 솔직히 거기서 도지호가 제일 구린 듯.”
“인정. 까놓고 얼굴도 평타에 노래도 솔직히 이젠 그렇게 잘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그렇게 반박해 주고 싶었다. 지호는 사람을 정말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멋진 웃음을 가졌다. 목소리도 아주 또렷하고 듣기 좋았고 적어도 솔이 들어 본 노래 중에 그의 노랫소리가 제일 좋았다. 솔은 입술만 잘근 씹으며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 하염없이 발등을 바라보며 분을 삭이고 있는데,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둑해지는 주위에 솔은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화젯거리가 된 지호가 서 있었다. 당사자가 눈앞에 서 있는데 등 뒤에선 여전히 그에 대한 조롱이 들려오고 있었다. 솔은 지호가 저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면 했다.
솔은 황급히 지호에게 팔짱을 끼워 화장실 근처에서 벗어나려 그를 잡아끌었다. 하지만 지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솔을 보며 환하게 웃곤 검지를 제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도톰한 입술이 그의 집게손가락에 눌려 모양이 흐트러졌다. 솔이 당황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지호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윙크를 해 보였다.
“그렇게 잘난 척하고 착한 척하더니 겨우 간 게 YC. 난 또 대단한 곳 간 줄 알았네.”
“난 아예 때려치우고 군대 간 줄 알았다.”
화장실 안에서 즐거운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는 뭐가 그렇게 즐거울까. 지호를 보는 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런 일을 대학에 다니며 수없이 겪었는데도 솔은 도무지 의연하게 상황을 넘길 수가 없었다. 제가 자초한 일이면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혼자 눈물을 감추고 뛰쳐나오거나, 밤새 두고두고 곱씹으며 잠을 설쳤다.
다음 날, 자신에 대해 조롱하던 사람들과 다시 얼굴을 마주한다는 게 너무 무섭고 끔찍해서 수업에도 안 나가곤 했었다. 자신은 그러했는데, 눈앞에 지호는 웃고 있었다. 오히려 솔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고는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지호는 서늘한 벽에 등을 기대고 주먹을 움켜쥔 솔의 손을 꼭 감싸 쥐었다.
“야, 됐어. 누가 들을라, 나가자.”
저들 좋을 대로 실컷 떠들고 웃었는지. 명하의 목소리는 뒷담화가 끝났음을 알렸다. 짧은 물소리가 나고 화장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나올 기척이 일자 솔은 파드닥 놀라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지호는 솔의 손을 꼭 잡고 도리어 끌어당겼다.
아니나 다를까, 화장실에서 앞장서 나온 명하를 처음으로 줄지어 지호와 마주쳤다. 화장실에서 실컷 떠들던 세 사람은 눈앞에 당사자를 마주하자 당황한 기색이었다.
“내 얘기 너무 오래 하는 거 아니야? 화장실 가고 싶었는데 너희 민망할까 봐 기다리다 쌀 뻔했어.”
생글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지호의 말에 솔이 다 움찔했다. 본래 지은 죄가 있으면 지레 찔리는 법이었다. 하지만 진짜 죄를 지은 사람들은 짧은 당황을 금세 털어 버리고 지호를 보며 피식 비웃었다.
“들었어?”
“다 들으라고 큰 소리로 떠든 거 아니었어? 나 말고 스태프분들이 들었으면 어쩔 뻔했어. 여기 방송국이야. 명하야. 카메라가 없어도 항상 말조심해야지.”
“아이씨, 재수 없어.”
저를 욕했던 명하인데. 지호는 오히려 웃으며 그가 걱정된다는 듯 조언을 덧붙였다. 하지만 지호의 그런 발언이 오히려 명하는 고깝다는 듯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솔은 제 손을 꼭 잡은 지호를 바라보았다. 희한하게도 그는 그 속내를 짐작할 수도 없게 환하게 웃고 있었다.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한 그의 얼굴에 오히려 솔이 좌불안석이 되었다. 누가 봐도 화를 내고 속상해해야 할 상황인데 지호의 얼굴만 보고 있자면 친한 친구와 즐겁게 대화하는 얼굴 같았다.
“네 말 하나도 틀린 거 없어, 명하야.”
“뭐?”
지호는 명하를 보더니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명하는 얼굴을 찌푸리며 지호의 말에 날카로운 어조로 반문했다.
“나 사람 진짜 잘 보거든. 보는 눈이 있어. 우리 솔이 진짜 이쁘지? 심지어 엄청 착하고 춤도 잘 춰. 귀엽고 못 하는 게 없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요정 그 자체!”
명하가 칭찬을 한 것도 아닌데, 지호는 아주 당당하게 갑자기 솔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주 사랑스럽고 귀여운 생물체를 보는 것처럼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저를 욕하던 사람 앞에서 주접을 떨어 댔다.
솔이 부끄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바짝 언 솔은 끝없이 이어지는 지호의 말에 눈동자만 좌우로 급격히 떨었다. 점점 굳어 가는 솔과 눈앞의 세 사람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솔에 대한 칭송에 가까운 긴 칭찬을 늘어놓은 지호는 말을 끝내고 숨을 한번 골랐다. 새삼 그의 폐활량과 호흡이 무척 길다고 솔은 생각했다.
지호는 솔의 손을 한 번 더 꽉 잡았다. 손가락이 살짝 짓눌렸지만 아프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뭔가 든든하게 힘 있게 잡아 주는 느낌이라 솔은 오히려 안정감을 느꼈다. 숨을 고른 지호는 명하를 보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명하야. 너랑은 그렇게 오래 연습생 생활 같이했는데, 한번을 챙겨 주기 싫더라.”
그의 한마디를 들은 명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어깨를 들썩이는 명하는 지호를 매섭게 노려보곤 상대할 것도 없다는 듯이, 지호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명하가 지나가자 그 뒤를 따라 그의 일행들이 저마다 지호를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지나갔다. 그러든 말든, 지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콧방귀를 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