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 (118)화 (118/192)

#118

***

두 번째라서일까, 촬영장의 분위기는 첫 촬영 때와 사뭇 달랐다. 대기실을 배정해 주고 리허설도 각각 진행해 다른 참여자들과 얼굴 마주할 기회도 없었던 첫 촬영과 달리 이번에는 리허설이 한창인 현장에 다들 모여 있었다.

촬영장에는 제일 먼저 도착했지만, 솔을 비롯한 멤버들은 가장 늦게 등장했다. 솔 때문이었다. 앞으로도 무대를 하려면 안정의 포션이 꼭 필요했고, 그 수량은 한정되어 있었다. 숙소에서부터 사용한 채로 나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게 낭비하기엔 불안한 요소가 많았다.

방송국까지 이동하는 차 안에서 조금 힘들더라도 리허설, 하다못해 무대 직전에만 안정의 포션을 사용하면 된다는 생각에 솔은 비장한 각오로 밴에 올랐었다. 페널티도 50%로 줄었으니 제법 버틸 만하다고 판단했다.

밴에 오르자마자 좌측엔 가람을 우측엔 지호를 끼고 앉아 두 사람의 손을 꼭 잡은 채 눈을 감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아침, 도로가 너무도 혼잡했다. 출근 시간이 겹치며 도로에 차가 많다 못해 방송국 앞 대로변엔 차가 뒤엉켜 있었다. 복잡하고 막히는 도로에서 사고는 필수 불가결이었다.

안정의 포션 없이 버텨 보겠다는 솔의 의지를 비웃기도 하려는 듯, 솔을 비롯한 멤버들이 탄 밴 바로 앞에서 가벼운 충돌 사고가 났다. 다친 사람도 없었고, 그저 승용차 두 대의 범퍼가 살짝 찌그러진 정도였지만 솔에게는 그리 가벼운 광경이 아니었다.

모든 게 다 좋아지고 순탄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만이었다. 결국 그날의 기억을 되새김하고 속이 매스꺼워진 솔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꼭 잡고 있던 두 사람의 손을 놓고 입을 틀어막자 멤버들의 걱정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지호가 차려 준 아침밥을 다시 보여 주는 일은 없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치미는 두통과 구역감에 솔은 안정의 포션을 바로 사용했다. ‘이래서 약물 중독 같은 거에 빠지는 걸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효과는 빠르고 확실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고통이 가라앉았지만, 솔의 괜찮다는 말에도 멤버들은 그를 대기실 소파에 눕혔다.

솔의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본인도 한사코 이젠 괜찮다며 손사래까지 쳤지만, 모두가 그가 바람 불면 쓰러질까 속을 태웠다. 가타부타 말하지 않아도 억지로 누운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만으로도 그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과분할 정도의 애정과 관심, 걱정에 솔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럴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기는 했지만, 그보다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멤버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조금 안심할까 싶어 얌전히 누워 있는 솔에게 지호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지호는 생각 없이 솔의 이마를 쓰다듬으려다가 스타일리스트의 지적에 손을 멈칫했다. 앞머리가 흐트러지며 드러난 가지런한 솔의 이마 대신 서늘하고 흰 손을 붙잡았다.

“한동안 괜찮더니 오늘은 멀미 진짜 심하게 하네.”

“이제 괜찮아졌어.”

맞잡은 지호의 손이 따뜻했다. 지호의 손은 늘 그의 다갈색 머리카락과 미소처럼 따뜻했다. 손을 잡고 있자니 그 온기가 전해져 묘하게 마음이 풀어졌다. 미안한 것과 별개로 이렇게 누워 온기 어린 손길을 받는 게 기분이 나쁘지 않아 솔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솔의 미소에도 지호의 얼굴은 쉬이 펴지지 않았다.

“아침 식사가 너무 무거웠나 봐. 내가 괜히 더 먹으라고 해서….”

이른 출근에 더 이른 시간부터 일어나 지호가 준비한 아침 식사였다. 숙소에 있는 재료가 거기서 거기다 보니 따뜻한 계란국에 계란말이. 달걀 일색인 아침 식사였지만 유독 맛있게도 먹었다. 지호가 선뜻 더 먹으라 하자 솔도 흔쾌히 그러겠다 했다. 그 어디에도 지호를 탓할 부분은 없었다.

“아니야! 나 진짜 원래 멀미 엄청 심해. 아침밥도 맛있어서 더 먹은 거고. 형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솔이 손사래를 치며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확하게는 일어나려고 했다. 솔이 상체를 일으키기 무섭게 지호가 그의 어깨를 눌러 도로 소파에 눕혀 버렸다.

“왜 일어나, 아직도 너 창백해. 더 누워 있어.”

“다들 준비 끝냈는데, 나도 마무리해야지.”

소파에 가지런히 누운 채로 솔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멤버들 모두 세팅을 끝내고 최종적으로 의상만 갈아입으면 모든 준비가 끝나는 단계였다. 구역질 때문에 입을 틀어막기도 했고, 소파에 눕기도 했으니 솔은 메이크업, 헤어 모두 다시 손을 봐야 했다. 스타일리스트의 눈치를 살피니 태오가 소파에 누운 솔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천천히 해도 돼.”

흘긋 보니 스타일리스트도 고개를 끄덕이는 게 태오가 미리 말을 해 둔 듯했다. 태오가 소파 가까이 다가오자 한 발 떨어져 있던 가람도, 득용도 솔의 옆으로 다가왔다. 모두가 다가와 누워 있는 자신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되어 솔은 대번 사과했다.

“미안해….”

“뭐가 미안해.”

솔의 사과에 지호가 별걸 다 사과한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모여든 멤버들의 얼굴 뒤로 불쑥, 영호의 얼굴이 비집고 들어왔다. 잠시 나갔다 온 영호의 손에는 뒤집힌 속을 달래라며 솔을 위한 따뜻한 물이 들려 있었다. 구태여 그 뜨거운 물을 마시지 않아도 이미 목울대며, 가슴이며, 온몸이 푸근하리만치 따뜻했다.

결국 리허설 순서가 임박해서야 솔은 앞머리를 고정하는 핀을 꽂은 채로 무대로 나가야 했다. 전과 달리 서로의 리허설을 볼 수 있게 되자 다른 참가 팀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리에 앉아 있었다. 본의 아니게 대기실에 콕 박혀 있다 마지막에 등장한 멤버들을 향해 참가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리허설도 연습이었다. 무대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점검할 수 있는 마지막 연습. 말이 리허설이지 본무대 못지않게 최선을 다하고 무대 아래로 내려오자 쭉 그 모습을 지켜본 다른 참가자들이 인사를 건넸다.

“지호야. 안녕.”

참가자 중 첫 촬영 때도 지호와 인사하는 걸 본 적 있는 무리가 제일 먼저 그를 반겼다. 태오나 가람과 달리 다른 소속사에 있기도 했고, 오디션 프로그램 출신이니만큼 연습생 중 아는 사람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었다. 솔을 비롯해 모두가 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꽤나 알고 지낸 사이인지 무리 중 머리를 노랗게 탈색한 남자는 제법 친근하게 지호에게 말을 붙였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저번 촬영 때 얘기도 못 하고 헤어졌네. 잘 지냈어? 어디로 갔나 했더니 YC 갔구나.”

금발의 남자가 말을 걸자 솔의 뒤에 서 있던 지호가 솔을 뒤로 잡아끌며 앞으로 나섰다. 묘하게 그 모습이 솔을 제 뒤로 숨기는 행동 같았다. 얼떨결에 뒤로 밀린 솔은 뭔가 이상함에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하지만 이내 평소와 다름없이 밝게 웃으며 대화를 주고받는 지호를 보며 찜찜함을 흘려 넘겼다.

“그러게. 너야말로 계속 거기에 있을 줄 알았는데. 화리엔으로 간 거야?”

“어. 그렇지 뭐.”

뒤로 밀린 솔은 태오와 가람의 사이에 서서 지호와 대화를 나누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화리엔 엔터테인먼트면 5조였다. 다른 소속사의 연습생들과 대화를 나누는 지호의 모습이 제법 신기하기도 해 솔은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전에 같이 연습하던 친구들에게도 살뜰하게 챙겨 주었을까. 그의 성격이라면 그러고도 남았을 것 같았다. 평범한 재회의 대화가 이어진다고 생각한 찰나. 금발의 남자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나도 난데, 너도 참….”

그 어조가 콕 집어 뭐라 말하긴 모호하게 기분이 나빠 솔은 지호를 바라보았다. 등을 지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솔은 자신이 예민하게 반응했나 싶어 멤버들을 곁눈질했다. 비단 솔만 그 뉘앙스가 불편했던 게 아닌지. 끄트머리에 서 있던 득용이 제법 이글거리는 눈으로 금발의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득용의 입장에서야 그저 빤히 쳐다본 정도겠지만 강한 인상 덕에 살벌하게 노려보는 듯했다.

“참, 소개 안 해 줄 거야? 안녕하세요. 저는 화리엔 소속 명하예요. 전에 지호랑 같은 소속사에 있었어요.”

득용의 시선이 너무도 뜨거웠던 탓일까. 지호와 두런두런 대화를 주고받던 남자가 지호의 어깨 너머로 솔을 향해 인사를 했다. 명하라 스스로를 소개한 금발의 남자와 눈이 정면으로 딱 마주친 솔은 엉겁결에 고개를 숙여 보였다. 인사를 받았으니 솔도 자신을 소개하려던 찰나 지호가 끼어들었다.

“생방송 진출 확정 전까지는 개인 활동명이나 팀명 사용하지 말라고 했지 않아?”

“방송 나가는 것도 아니고 우리끼리 다 아는 사이인데 뭐.”

“그러다가 인터뷰할 때 실수해. 조심해야지. 명하야.”

지호의 말투는 여전히 그답게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그런데도 어쩐지 솔은 계속해서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도 그렇고 명하라는 사람의 시선에서 솔을 차단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호는 명하가 반응할 틈도 주지 않고 작별을 고했다.

“우리 아직 준비가 덜 끝나서 빨리 대기실로 돌아가야 해. 촬영 시작할 때 보자.”

다정한 말투와 달리 획 몸을 돌려 솔을 대기실 방향으로 이끌던 지호는 뒤통수에 꽂히는 명하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참, 너는 여전하구나.”

“응?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한결같아서 보기 좋아서. 이번 무대도 잘해서 같이 살아남아요.”

지호도, 명하도 여전히 웃으며 다정다감한 어조였지만 솔은 괜히 가슴이 갑갑한 느낌이었다. 명하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멤버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던졌다. 지호가 ‘너도 잘해.’라는 말을 남기고 걸음을 재촉하자 솔도 대충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곤 지호를 따라 걸었다. 무언가 신경 쓰이고 거슬리는데 이렇다 할 만하게 콕 집어낼 만한 점은 없었다.

지호의 표정은 여전히 사근사근하고 생글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더불어 지호가 별말이 없으니 먼저 뭔가 물어보기도 멋쩍었다. 고개를 한번 크게 휘저어 찜찜함을 날려 버린 솔은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복도를 지나쳤다.

복도를 따라 대기실로 향하는 도중 화장실 팻말이 솔의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의상이 한복이니만큼 구김이 신경 쓰이기도 했고 의상을 갈아입기 전에 화장실에 다녀오는 편이 좋을 듯했다.

“나 화장실 좀.”

솔은 멤버들이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획 돌아서 화장실이 있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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