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 (116)화 (116/192)

#116

느닷없는 솔의 포옹에 가람이 얼어 버렸지만 딱딱하게 굳어 버린 그의 반응은 솔의 안중 밖이었다. 그보다는 눈앞에 어른거리는 컨셉 카드가 더 중요했다.

득용이 말하던 것처럼 화랑이나 무사가 연상되는 그런 한복은 아니었다. 무대 의상으로 쓰기엔 지나치게 평범하고 밋밋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카드 속 솔이 입고 있는 옷은 분명 누가 봐도 한복이었다.

티켓을 모조리 다 소모하고도 쓸 만한 의상을 뽑지 못하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결국엔 뽑아내고 말았다. 끙끙 앓던 문제가 해결되자 긴장이 풀어진 솔은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가람을 놓으면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아 솔은 더욱 그를 세게 끌어안았다.

이런 속사정을 알 리가 없는 가람은 솔에게 안긴 채로 얼굴만 붉혔다. 오늘부터 동상이 되기로 한 것처럼 가람은 차렷 자세로 굳어 솔을 보지도 못하고 화장실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빗자루처럼 빳빳하게 서 있기를 한참. 자신을 끌어안은 솔의 팔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감지한 가람이 흘긋 그를 내려 보았다.

“솔, 우는 거 아니지?”

방금 전 아무 일 없다는 답변에 신빙성이 떨어졌다. 혹 어딘가 아프거나 불편해 화장실로 숨어든 거였나? 괜히 자신이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가람을 휘감았다. 가람의 물음에 솔은 ‘으응’ 하는 부정의 의미를 담은 소리를 내었지만 정말 별일이 없는 건지 얼굴을 확인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솔이 끌어안았지만 키 차이 때문에 품에 안긴 꼴이 된 그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가람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자세히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제 가슴팍에 얼굴을 푹 파묻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머리를 가슴에 기댄 탓에 눌려 살짝 볼록하게 올라온 하얀 뺨뿐이었다.

워낙 말라 볼살이 많은 편도 아니었는데. 힘껏 끌어안은 탓에 흰 뺨이 포슬포슬한 찐빵처럼 둥그렇게 올라왔다. 말랑해 보이는 살점이 한번 푹 찔러 보거나 쭉 늘려 보고 싶은 충동을 들게 했다. 가람의 손이 오갈 데를 모르고 허공에서 꿈질거렸다.

가람은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폭, 자신을 끌어안은 솔이 마치 따뜻한 깃털로 만들어진 것만 같았다. 어찌나 간질간질한지. 간지럼을 태운 것도 아닌데, 솔의 팔이 둘린 부위가 간지러워 몸을 가만히 두기가 어려웠다. 딱 10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0초만 더 참았다간 너무 간지러워 솔을 와락 끌어안아 버릴 것만 같았다. 가람은 간질이는 마음을 꾹 참으며 앙다문 입술을 씰룩거렸다.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다가오자 가람은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내뱉었다.

“윙크 못 하게 해서 그래?”

“뭐…?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가람의 헛소리에 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람이 턱을 높게 치켜들고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컨셉 카드가 시야를 방해해 솔의 눈엔 가람의 날카롭고 각진 턱과 높은 코끝만 보였다. 그마저도 카드 이미지에 방해가 되어 가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솔도 황당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새카만 욕심을 억누르기 바쁜 가람 또한 솔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고개를 숙여 솔을 바라보면 그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턱 끝에 스칠 듯 일렁거렸다.

백발에 가깝게 탈색한 머리카락은 여전히 윤기가 나고 보드라웠다. 잘 어울리는 건 두말할 것도 없었지만, 은발의 솔을 보고 있자면 한 번씩 괜히 만지고 싶은 충동이 들어 은근슬쩍 쓰다듬어 보곤 했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얼마나 부드럽고 윤이 나는지 손가락에 감기는 그 감촉을 알고 있는 가람은 더욱 곤욕스러웠다.

“어디 아프거나 속상한 일 있는 것도 아니지?”

“아니야.”

“그런데 왜 이렇게 떨어.”

가람이 재차 묻자 솔은 그의 품 안에서 고개를 저었다. 사실 지금 이 상황이 난감한 건 솔도 마찬가지였다. 원하던 카드가 나오자마자 기쁜 마음에 가람을 덥석 끌어안아 버렸다. 하필이면 타이밍 좋게 저를 찾아온 가람이 행운을 가져다준 것만 같았다.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는데, 긴장이 풀어지며 다리가 후들거린 탓에 멀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밀착하여 매달려 버렸다.

시간이 흐르고 차차 정신이 들자 민망함이 몰려왔다. 이전에는 아무리 놀라거나 바닥에 쓰러질지언정 타인과 접촉을 꺼렸던 솔이었다. 이제 와 민망함에 거리를 벌리려 하니 또 덜컥 밀어내기도 난감했다. 어제에 이어 ‘위로’를 들먹여야 하나 솔은 머리를 굴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만 갔다. 가람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방황했다.

“솔….”

“가람아, 왜 너 심장 소리 엄청 크게 들려.”

연습실로 돌아가자고 말을 꺼내려 했던 가람은 솔의 말에 말문이 턱 하고 막혀 버렸다.

“그, 그게.”

솔의 그 한마디에 가람의 심장이 더욱 박차를 가했다. 열띤 펌프질의 효과일까, 가람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솔에게 제 손끝이라도 닿을까 허공을 방황하던 가람의 손이 선을 넘고 그의 어깨를 덥석 붙잡았다. 가람은 더 변명도 하지 못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눈치 없이 시끄러운 심장을 진정시켜 보려 가람은 후우, 후, 크게 심호흡하고 일부러 숨을 느리게도 쉬어 봤지만 그럴수록 그의 심장 소리는 솔의 귀에 더욱 또렷하게 들렸다.

“엄청 크게 뛰어. 놀랐어?”

가람의 속도 모르고 솔이 ‘하하’ 소리를 내며 해맑게 웃었다. 그저 자신이 갑자기 그를 끌어안아, 쓰러질 것처럼 떨어 크게 놀랐다고만 생각하는지 조금의 구김도 없는 환한 웃음이었다. 어찌나 순진하기 짝이 없는 웃음인지 가람은 도리어 울상이 되었다. 저만 시커멓고 나쁜 놈이었다. 유혹에 지지 않으려 허공에서 뒤틀었던 손이 허무했다.

제 번민과 시커먼 속내도 모르고 청량하게 웃는 솔을 보니 가람은 맥이 빠졌다. 솔은 소리를 내어 웃으며 두 팔에서 힘을 뺐다. 꼭 끌어안고 있던 팔에서 힘이 빠지자 자연스레 두 사람 사이가 멀어지며 틈이 생겼다.

“아무 일도 없어. 그냥 반가워서.”

아무리 연기 수업을 들어도 솔은 연기에는 영 재능이 없었다. 특히나 거짓말엔 소질이 없었고 거짓을 내뱉는 말도 표정도 눈에 띄게 어색했다.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 사실이 솔에게도 느껴졌기에 그는 애써 거짓을 꾸며 내지 않기로 했다. 무엇보다 가람이든 태오든, 멤버 누구에게도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살짝, 숨길 뿐. 솔은 주어를 숨겼다.

알맞은 카드가 나와 기뻐 안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고 다른 변명을 하면 가람은 솔이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계속 걱정할 게 분명했다. 이게 최선이었다. 어찌 되었든 반가웠다는 말은 진실이었으니까.

자연스러운 솔의 말과 웃음에 가람의 얼굴이 더 붉어질 수 없이 붉어졌다. 새빨갛게 익은 그의 얼굴이 당황한 걸 들켜 붉어진 것이라 생각한 솔이 더욱 크게 웃었다. 또래 친구들과 장난치며 스스럼없이 웃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많이 놀랐어?”

“놀…랐지.”

가람은 손을 들어 제 입가를 가렸다. 가람은 붉어진 얼굴을 기다란 손가락으로 반쯤 숨길 수 있었다. 그의 걱정대로 어디 아프거나 불편했던 건 정말 아닌지, 솔은 예쁘게도 웃었다. 차마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는 가람은 얼굴을 가린 걸로도 모자라 시선까지 돌렸다.

솔은 그런 가람의 어깨를 살짝 톡톡 치고는 스쳐 지나갔다. 어색하지 않게 가람을 화장실에 남겨 두고 홀로 빠져나온 솔은 복도에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래도 연기 수업이 영 성과가 없는 건 아닌 듯했다. 잠시 진정할 시간이 필요한 가람을 뒤로하고 솔은 망설임 없이 여전히 시야에 자리한 컨셉 카드를 선택했다.

[2 ROUND : 하모니 스타 컨셉이 활성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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