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 (114)화 (114/192)

#114

착, 착.

태오의 손에 들린 무용 부채가 일정한 소리를 내며 깔끔하게 펼쳐졌다 접히기를 반복했다. 일주일간 내내 손에 쥐고 다녀 대나무 살에 붙은 천이 너덜너덜했다. 손에 부채가 붙은 듯 태오는 자유자재로 부채를 돌리기도, 던졌다 받기도 했다. 한국 무용을 하며 부채춤을 수없이 연습했던 솔보다도 더 자연스레 다루는 수준이었다.

타고난 순발력과 운동 신경도 있었지만, 잠잘 때 빼곤 부채를 놓지 않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의 노력으로 빚어낸 결과였다. 이따금 지호를 끌고 녹음실을 들락날락하던 가람은 늦게 준비를 시작한 만큼 무리를 해 편곡을 빠르게 끝냈다. 연습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두 사람은 연습실 한쪽에서 쪽잠을 잘 정도였다.

사전에 받은 안내에서 ‘보컬’에 대한 부분을 우선순위에 둔다고 한 만큼 노래 연습에 온 힘을 다해야 했다. 아직 첫 촬영분이 방송된 것은 아니었지만 우수한 성적을 가져온 덕에 회사 측으로부터 녹음실 사용이며 의상이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 호언장담과 달리 곡의 컨셉이 정해졌는데도 의상에 대한 소식은 아무것도 공유된 바가 없었다.

솔이 아직 뽑기 가챠를 돌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저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솔은 다소 난감한 상황에 직면했다. 1라운드에선 컨셉 가챠를 먼저 뽑았고 전반적으로 무난한 컨셉의 의상과 편곡이었다. 다만 2라운드의 곡은 달랐다.

솔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동양적 요소를 가미한 편곡에 안무에는 부채가 사용되었다. 컨셉이 뚜렷하다 보니 의상도 그에 딱 알맞아야 했다. 티켓을 열 장 사용해도 뭐가 나올지 모르는 랜덤 뽑기. 가진 티켓을 다 사용해도 한복이든 뭐든 동양풍 비스름한 게 나오지 않는다면?

가죽 재킷을 입고 부채춤을 출 수는 없었다. 혹시 모를 불안감 때문에 솔은 아직 가챠를 돌리지 못했다. 연습을 하며 한 번씩 지호나 득용이 ‘우리 의상은요?’라고 말할 때마다 괜히 솔이 뜨끔했다. 뽑기는 뽑아야 하는데…. 솔은 눈가를 찌푸려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부채를 날렵하게 휘두르며 동작을 전체적으로 점검하는 태오가 뿌옇게 보였다.

요즘 들어 태오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리만치 속이 울렁거렸다. 긴장감과 불안감이 혼재하는 것 같으면서도 춤을 추거나 무대에 오르거나, 차에 탈 때처럼 불쾌하지는 않았다. 울렁이는 속을 달래려 솔은 애꿎은 침만 꼴깍 삼켜 보고 이내 손에 쥔 악보에 얼굴을 박았다. 조금 전까지 지호와 보컬 연습실에서 특훈을 하고 온 참이었다. 메모로 빼곡한 종이에 코끝이 닿자 종이 향과 잉크 향이 느껴졌다. 그 향기에 솔은 묘한 안정감을 느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꺼풀에 한 번, 종이에 한 번 시야가 가려졌지만, 귓가에 살랑이는 음악 소리로 태오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음악이 없더라도 온전히 둘의 힘으로 짠 안무이기에 걸음 소리만 들어도 어떤 동작인지 알 수 있었다. 솔은 눈을 감은 채로 음악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뭉그러진 발음으로 흥얼거리던 노랫소리는 이내 뚜렷한 소리로 발전해 제대로 된 발음을 갖추기 시작했다. 귀에 박히도록 듣고 부른 탓일까, 솔의 노랫소리에 맞춰 누군가 발을 굴렀다. 탁, 탁 연습실 바닥을 두드리는 신발 굽 소리와 태오가 부채를 펼치는 소리가 딱 맞아떨어졌다. 발 구르는 소리는 분명 지호일 것이다. 긴장하면 솔이 엇박자를 타는 경우가 있어 지난 연습 기간 내내 지호는 안무가 선생님처럼 박수를 달고 살았다.

솔이 계속해서 노래를 이어 나가자 지호가 화음을 덧대었다. 지호를 시작으로 잠시 휴식을 가지고 있던 득용과 가람도 제가 맡은 소절이 나오면 소리를 내었다. 설렁설렁 노래를 이어 가고 있는데 마룻바닥에 미끄러지는 고무 밑창의 소리가 ‘찍’ 나더니 태오가 멈추어 섰다.

“성솔.”

“응?”

그의 부름에 솔은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기분 좋게 흥얼거리던 노랫소리가 뚝 끊기고 솔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솔이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가자 태오는 방금 막 했던 동작을 되풀이하며 솔에게 물었다.

“여기서 저쪽으로 이동할 때, 동선이 너무 길지 않아?”

“어…. 조금 급하긴 했는데 크게 문제 될 정도는 아니었어. 오히려 가람이가 지호 형이랑 자리 바꿀 때가 더 촉박했을 거야.”

안무를 훑어가던 중, 동선에 의문이 생긴 듯했다. 아무래도 보컬에 집중해야 하는 곡이다 보니 동선을 최소화하는 데에 중심을 맞췄다. 숨이 모자라거나 음정이 불안정해지는 일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난 괜찮았어.”

가람이 여상하게 대답했지만, 솔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부채를 주웠다. 여러 번 반복해 보긴 했지만 혹 자신이 놓친 다른 문제가 있는지 솔은 태오를 따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솔과 태오는 부채를 펼치고 몸을 크게 한 바퀴 돌렸다. 보컬에 집중하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퍼포먼스를 아예 방치할 수는 없었다. 발라드 가수가 아니라 아이돌이지 않은가. 태오와 솔은 합이 잘 맞았다. 따로 박자를 맞춰 보거나 신호를 주고받지 않아도 척하면 착이었다. 두 사람의 동작이 맞아 들어가자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음에도 마치 신선처럼 우아해 보였다.

두 사람이 동작을 주고받는 모습을 한참 지켜보던 득용이 슬그머니 일어나 연습실 구석으로 다가갔다. 이번 안무에서 가장 난항을 겪고 있는 사람이 바로 득용이었다. 섬세한 동작보다는 크고 힘 있는 동작이 자신 있는 득용에겐 다소 나긋나긋한 이번 안무가 영 어려웠다.

득용이 구석으로 빠지자 막내가 걱정된 지호가 득용의 뒤에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의 걱정과 달리 득용은 모서리에 설치된 카메라 앞에 서서 두 팔을 휘둘렀다. 그 모습에 솔을 바라보던 가람도 득용에게로 뭐 하냐 물으며 다가왔다.

카메라 앞에 옹기종기 모인 세 사람은 렌즈에 반사되는 자신들의 모습을 확인하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슬슬 정돈했다. 카메라 렌즈에 자신을 비춰 보던 득용은 손가락을 들어 제 뒤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방향엔 세 사람의 이탈에 조금의 신경도 쓰지 않는 연습 벌레 두 사람이 바지런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득용이 갑자기 솔과 태오를 가리키던 손가락으로 제 눈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흑흑…. 천재 연습 벌레 형들 사이에서 막내 힘들어요.”

눈을 콱 찌르는 득용의 행동에 놀란 가람이 그를 쳐다보았다가, 곧바로 이어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애교 아닌 애교에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눈을 왜 찌르나 했더니 그게 아니라 우는 시늉이었다. 가람이 자신을 어떤 얼굴로 보든 말든 득용은 카메라 앞에서 입술을 쭉 내밀고는 되지도 않는 장난질을 이어 나갔다.

“아침에 태오 형한테 부채가 자꾸 말린다고 그랬더니 ‘그럼 안 말릴 때까지 연습해.’ 이러고 쌩 갔어요. 디케이는 속상해.”

연신 우는 시늉을 하던 득용이 태오를 따라 한답시고 팔짱을 끼더니 정색하고 말했다. 그 몸짓은 제법 태오와 닮아 있었지만 목소리나 분위기는 영 아니었다. 득용의 태오 흉내에 지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기요. 지금 그거 태오 흉내 낸 거세요?”

“저 잘하죠? 태오 형이랑 완전 똑같지 않아요?”

“…이건 윤태오도 욕할 듯.”

당당한 득용의 발언에 그를 떨떠름한 얼굴로 쳐다보던 가람이 한마디를 보탰다. 그래도 동생이라고 덩치 커다란 시커먼 사내놈이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막둥이의 장난에 지호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저보다 키가 큰 그의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김득용 선 넘네.”

득용의 머리를 마구잡이로 쓰다듬던 지호가 습관처럼 그의 본명을 부르자 득용이 버럭버럭했다. 신경 쓰다가도 너무 입에 익어 버린 나머지 이렇게 종종 실수할 때가 있었다.

“아! 디케이라구요.”

“그거 아직도 하는 거야? 이미 망한 거 같지 않아? 그냥 득용이라고 부르자.”

“편집해 주시겠죠. 믿어요.”

지호가 그냥 ‘득용’이라 부르자고 살살 꼬드겨 보았지만, 득용은 단호했다. 오히려 카메라에 대고 손으로 연신 하트를 그리며 ‘편집, 편집’ 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모여 장난치는 세 사람의 뒤로 여전히 동선을 확인 중인 태오와 솔이 찍혔다.

“근데 우리 의상은 진짜 어떻게 되는 거예요?”

득용이 다시금 의상 이야기를 끄집어내자 흘러나오던 음악도 딱 맞춰 끝이 났다. 멈춰 선 태오와 솔도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숨을 골랐다.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헐떡이던 솔의 귀에 그제야 득용과 지호, 가람이 나누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영호 형이 아무 말이 없네. 진짜 얼마 안 남았는데 피팅도 안 하고….”

“오늘은 하지 않을까요? 조선 제일 검, 막 이런 무사 같은 한복이었으면 좋겠다.”

득용의 말에 솔의 귀가 팔랑거렸다. 멤버들이 어떤 의상을 원하는지 알아볼 좋은 기회였다. 뽑은 카드에 한복이 나오지 않을 때를 대비해 차선책을 대비해야 했다.

“뭐야 그게.”

“왜요. 멋있잖아요.”

“우리 칼이 아니라 부채 든다.”

득용은 정말 무사라도 된 듯, 있지도 않은 칼을 허리춤에서 뽑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에 가람이 피식, 느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득용의 바람에 불과한 말이었지만 솔은 귀담아들었다. 솔 자신이 의상을 골라야 했지만, 그는 스스로가 이런 쪽에 안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뽑기를 더 차일피일 미루고 있기도 했다. 차선책으로 어떤 걸 선택해야 그럴싸할지 영 알 수 없어서.

“머리에 띠 두르고 화랑 막 그런 거. 크…!”

저 혼자 생각한 컨셉에 심취한 득용이 소주 한잔 걸친 아저씨처럼 연신 ‘크, 크’ 해 댔다.

“한복이면 좋지만, 꼭 한복이 아니어도 괜찮을 것도 같아. 그냥 동양풍 느낌만 풍기면 다 괜찮지 않을까? 좀 퓨전 그런 느낌으로.”

가람도 나름대로 생각해 둔 느낌이 있긴 한지 의견을 보태었다. 솔은 차근차근 멤버들이 흘리는 말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리스트를 작성했다. 가만히 가람의 말을 듣던 지호는 여태 소식 없는 이 상황에 갑자기 불안감을 느꼈는지 최악의 가정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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