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늘 느슨한 분위기를 풍기는 가람이 오늘따라 급급해 보였다. 가람과 손을 잡은 채 그의 조급한 걸음을 쫓아가던 솔은 한 번씩 성큼 다리를 내뻗었다. 한 걸음 크게 걸어 아주 조금 앞서가면 가람의 얼굴을 살짝이나마 볼 수 있었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늘 가람이 멈춰 서는 그 골목에 다다라서야 가람은 쫓기듯 급박했던 걸음을 그쳤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흐지부지 흘러 넘어간 사건이지만 가람은 이 사거리에서 습관적으로 멈추어 섰다. 가람이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솔은 맞잡은 손을 조심스레 풀었다. 하지만 떨어지기도 잠시, 가람이 다급하게 다시금 솔의 손을 붙잡았다. 성마르게 다잡은 손을 한번 바라본 솔은 가람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다음 미션 곡 때문에 그래?”
“뭐가?”
“녹음실 다녀오고부터 기분 안 좋아 보여서….”
“아.”
솔의 말에 가람은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다시금 붙잡은 그의 손을 놓았다. 연습실 문틈 사이로 보인 솔과 태오의 모습을 보곤 불쾌감을 숨기지 못했다. 가까이 밀착된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최대한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상황을 이해해 보려 여러 생각을 했다. 애써 합리화를 해도 불쑥 자라나 버린 감정을 온전히 다 숨기기는 어려웠다.
태오는 고맙고 멋지고 좋은 친구였다. 제 친구를 위해 무엇이든 양보하고 감내할 수 있었지만, 저 하얗고 서늘한 손만은 아니었다. 한번 숨을 고른 가람은 조금 전 성급했던 손길과는 다르게 평소처럼 조금 느린 듯 여유가 있는 움직임으로 솔의 손을 제 손바닥에 올렸다. 가람의 뜬금없는 행동에 그를 올려다보는 솔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가람은 제 손바닥에 꼭 알맞은 크기로 놓인 솔의 손을 말없이 바라보다 시선을 뒤로 넘겼다. 제 감정을 진작에 눈치채고 일부러 느릿하게 걸어오고 있는 태오가 보였다. 가람은 솔의 손을 움켜잡아 보았다.
콱,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오므리며 움켜잡은 듯 보였지만 달걀을 조심스레 쥐듯이 손바닥을 둥글려 솔이 불편하다면 언제든 손을 뺄 수 있게 여유 공간을 두었다. 자신은 와락 잡기도 조심스러운 손인데 태오와 끌어안고 있는 모습을 보니 치졸한 질투가 솟아났다.
‘내가 먼저 좋아했어.’
어린아이도 아니고 그런 유치한 생각이 가람의 가슴속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병원에 드나드느라 바빴던 제 친구를 대신해 매일 밤 함께 이 골목길을 걸어가던 때와, 솔이 제 노래를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때. 정상적인 사고와 논리를 잃어버릴 정도로 겁에 질렸던 때에도. 나란히 병원 침상에 누워 위로와 사과를 주고받으며 웃었던 때부터 솔을 향한 마음을 가져왔다.
혼자만의 감정일 것이 틀림없고 이 감정으로 그가 불편해질까, 팀에 영향을 줄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지만, 윤태오보다 자신이 먼저 그 마음을 키워 왔다. 가람은 솔의 손을 잡은 채로 멀찍이 걸어오는 태오를 바라보았다. 거리가 있었지만 두 사람이 시선을 주고받기에는 충분했다. 노골적이고 유치한 제 행동에도 태오의 표정은 평소처럼 고요했다.
“가람아?”
손을 잡고 아무 말도 없는 가람이 영 이상했는지, 솔이 침묵을 깨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태오를 바라보던 시선을 솔에게로 옮긴 가람은 조금은 울적해 보이는 얼굴로 그와 눈을 마주쳤다. 태오를 향해 유치한 질투를 해 봤자였다. 가람은 태오처럼 제 앞에 서 있는, 손만 뻗으면 끌어안을 수 있는 솔을 그처럼 안아 볼 용기는 없었다. 손조차 이리 조심스레 잡는데 포옹이라니. 솔에게는 그저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심지어는 제가 가지는 이 감정을 정립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가람이 속으로 쓴웃음을 삼키던 그때, 솔이 가람에게로 한 발짝 다가갔다. 가람에 잡힌 손을 쉽게 빼낸 솔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저를 마주 보고 선 가람을 끌어안았다.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던 태오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가람은 눈을 크게 뜨고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허공에 놓인 두 손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가람은 멀뚱히 저보다 한 뼘 작은 솔에게 안겼다.
솔의 눈엔 가람의 얼굴이 딱 태오가 오기 전의 자신 같았다. 온갖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머릿속을 맴도는 수없이 많은 생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표정을 보며 솔은 연습실에서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때 솔은 무거운 생각에 짓눌려 자신이 압사당하는 것만 같았다. 태오가 이렇게 와락 끌어안아 준 그 순간부터 모든 생각이 날아가 버렸던 솔은 자신이 느꼈던 것을 가람에게 전해 주고 싶었다.
첫 방송 녹화를 무사히 끝나고 쉴 틈도 없이 더 난도가 있는 편곡 작업을 해야 하는 가람이었다. 부담감을 가지고 있을 그를 도와 뭐라도 그럴싸한 아이디어를 내놓기는커녕, 솔은 종일 잡생각에 잠겨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한 자신을 속으로 질책했다.
“힘들지? 넌 맨날 날 도와주는데, 오늘 내가 너무 집중을 못 한 거 같아.”
비단 가람뿐만이 아니었다. 멤버들 모두 자신을 배려하고 도와주는데 솔은 늘 제 문제를 끌어안고 끙끙거리기 바빴다. 가람에게만 온전히 맡겨 둘 수 없는 일이었다. 퀘스트에 실패하면 죽게 되는 것은 자신이었고 그걸 떠나 ‘팀’으로서 함께해야 하는 일이니, 생각을 빨리 털어 내고 오늘 회의에 좀 더 집중했어야 했다. 뒤늦게 생각하니 스스로가 이기적이었단 생각이 들었다.
“너무 혼자 무리하지 마. 가람아. 나도 좀 더 생각해 볼게.”
가람의 저기압이 편곡에 대한 부담감에서 온 것이라 오해한 솔이 가람을 끌어안은 채로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러고는 가람의 등을 천천히 토닥여 주었다. 가람은 살짝 무릎을 굽혀 솔에게 안겼다. 등을 두들기는 솔의 토닥임에 맞춰 가람의 가슴도 둥둥 튀어 올랐다.
“내일은 분명 해결책이 나올 거야.”
가람은 솔의 어깨에 살포시 이마를 대 보았다. 조금 낮은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온몸을 뒤덮던 불쾌한 감정들이 잠잠히 가라앉고, 대신 심장이 날뛰기 시작했다. 솔의 어깨에 기댄 이마가 화끈거렸다.
“고마워. 내가 더 힘낼게.”
솔의 말대로 편곡의 방향이 잡히지 않은 것도, 오늘 회의가 무용지물이었던 것도 사실이라 가람은 둥둥 튀어 오르는 심장을 붙잡으며 말했다.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붙잡았다. 가람은 제 손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콱 움켜쥐었다.
자신에게 기대 오는 가람을 토닥여 주며 솔은 ‘아무래도 오늘은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한 날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솔은 숙소에 돌아가서 지호와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을 득용이도 한번 꼭 안아 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면 다들 잠시 힘든 생각을 잊을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가람을 달래던 솔은 천천히 제 어깨에 기댄 몸을 밀어냈다. 가람은 떨어지기 싫은 것인지, 꼭 머리가 무거워 가눌 수 없는 사람처럼 솔에게서 무겁게 떨어져 나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멀어지자 태오는 잠시 멈췄던 걸음을 서둘렀다. 두 사람 사이에 훼방을 놓는 것도 놓는 것이지만, 서 있는 위치가 좋지 못했다. 태오는 성큼 뛰어가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골목길을 확인한 태오는 일단 숙소에 돌아가라며 두 사람의 등을 떠밀었다. 자연스레 솔의 어깨에 손을 올린 태오는 솔과 다시 거리를 벌리지 않았다. 숙소로 발걸음을 옮기는 솔의 등 뒤에 태오가 바짝 붙어 걸었지만, 가람은 조금 전처럼 다시 태오를 노려보진 않았다. 오히려 몽롱하게 취한 얼굴로 평소보다 더 나른한 표정이 되어 휘적휘적 솔을 따라 숙소로 향할 뿐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솔은 제일 먼저 자신을 반기는 지호를 끌어안고 가람에게 했듯이 토닥여 주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당황한 지호가 ‘무슨 일이야?’ 하며 물었지만, 솔은 웃으며 ‘그냥, 다들 위로가 필요한 거 같아서.’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득용이 쪼르르 팔을 벌리고 솔에게 안겨 왔다.
“저 없는 사이에 너무 열심히 연습하지 말아요. 따라가기 힘들다고요.”
커다란 덩치의 성난 인상의 득용이 솔에게 폭 안기는 꼴이 제법 우스웠다. 솔의 품에 억지로 안긴 득용은 솔에게 학교 가기 싫다는 푸념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태오는 난처함을 느꼈다. 제가 한 충동적인 행동에 대한 알량한 변명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아 멋쩍었다. 그건 가람도 마찬가지인지 아직도 몽롱한 얼굴을 해서 멀뚱히 솔의 행동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쯤 되니 질투가 일지도 않았다.
샤워를 끝마치고 잠자리에 누운 솔은 불현듯 떠오르는 주환을 닮은 얼굴에 때늦게 서랍장을 뒤졌다. 한참 뒤진 끝에 핸드폰을 손에 쥔 솔은 전원을 켰다. 짧은 기다림 끝에 반짝, 핸드폰 화면에 불빛이 들어오자마자 진동이 여러 차례 울렸다. 하나같이 모르는 번호에서 온 연락이었지만 솔은 그 연락이 누구에게서 온 것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모두 은겸이 보낸 연락이었다.
솔은 늦게나마 은겸이 보냈던 톡을 확인하고 잠시 머뭇거리다 답장을 보냈다. 얼굴이 보이는 게 아니라 단순히 글자를 주고받는 거라 다행이었다. 다시금 은겸에게서 주환을 봐 버리면 겨우 진정되었던 마음이 다시 거센 풍랑을 만난 배처럼 흔들릴 것 같았다.
연습이 늦게 끝나서 이제 들어왔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