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그…. 이상한 생각 한 게 아니라. 있잖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좀 오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당황한 솔이 우물쭈물했다. 태오는 그의 손가락을 따라 그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들어가면서 연습하는 장면을 녹화한다고 설치해 둔 카메라가 눈에 들어왔다. 태오는 저도 모르게 피식 바람 빠지는 웃음을 지었다.
오늘 정말 제 상태가 여러모로 좋지 않은지 뒤틀려 ‘이상한 생각 뭐? 무슨 오해?’ 하고 묻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태오는 머릿속에 차오르는 생각을 털어 내듯 고개를 휘젓곤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영호 형이 아까 개별 레슨 들어갈 때 다 껐어.”
득용과 지호도 모처럼 이른 시간에 숙소로 돌아갔고 태오는 병원에 갔으니 멤버의 절반이 자리를 비우게 되자 매니저인 영호와 채민주가 일찌감치 촬영을 종료시켰다. 염두에 두고 저지른 행동은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다소 치밀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태오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뜨고 카메라를 자세히 본 솔은 그의 말대로 아무런 불빛이 들어오지 않은 걸 확인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안도하는 솔의 모습을 보며 태오는 또다시 경계선에 발을 한발 들이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째 본래도 썩 살갑지 않던 성격이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지는 듯했다.
“다행이다.”
“뭐가?”
“어? 영호 형이 늘 조심하라고 했잖아. 의도가 어땠건 방송에 안 좋게 나올 수도 있다고….”
영호에게 매일 아침마다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듣는 말이었다. 솔의 말에 태오는 꼭 가람처럼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며 카메라가 설치된 방향을 노려보았다. 솔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녹화만 켜져 있다면 자극적으로 소모하기 딱 좋은 그림이 잡혔을 것이다.
“나는 괜찮은데…. 나 때문에 태오, 네가 괜한 소리 들을까 봐….”
솔은 쭈뼛거리며 태오의 눈치를 살폈다. 전과 달리 제법 제 목소리를 낼 줄 알게 되었지만, 잘 보지도 못하는 눈치를 살피는 행동은 여전했다. 특히나 자신 없거나 조심스러운 상황이면 어김없이 말꼬리를 흐리고 곁눈질했다. 태오는 솔을 노골적으로 빤히 쳐다보았다. 이렇게 정면으로 올곧게 응시하면 그가 당황한다는 것도, 금세 시선을 피해 버린다는 걸 알면서도 곧게 바라보았다.
분명 이런 모습도 답답하게 여기던 시간이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니 답답한 마음보단 안쓰러운 마음이 커졌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러더니 이내 진짜 미운 정이라도 들어 버린 것인지. 이젠 저런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어쩔 수 없지.’ 하며 속으로 웃음을 삼키게 되었다. 지금도 딱 그런 감정이었다. 태오는 속으로 숨을 삼키고 솔의 말을 바로 고쳐 주었다.
“…그게 왜 괜찮아? 내가 먼저 널 안은 건데, 그건 내가 해야 하는 말이지. 내가 갑자기 널 억지로 끌어안은 거잖아. 괜한 소리가 아니지.”
“그렇게 말하니까 더 이상해지는 거 같은데.”
“네가 불편했다면 몇 번이고 사과할게.”
태오의 말에 솔은 머리를 부여잡고 끙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사과라니 태오의 포옹이 갑작스럽고 놀라기는 했지만, 오히려 위로받은 건 솔이었다. 솔은 머리를 쥐어짜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이 감정들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 지호는 늘 태오에게 말주변이 없다고 놀리지만 사실 그보다 더한 말주변이 없는 사람은 솔이었다. 한참 끙끙거리던 솔은 말을 고르고 골라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 그니까. 그게…. 사과하지 마. 나는 기분 좋았어. 좋다고 하니까 또 이상해지는데….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좀 그랬거든. 그런데 위로받은 거 같아서. 덕분에 마음이 좀 편해졌어.”
은겸과 만난 뒤로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머리와 마음 때문에 아무것도 집중하지 못했다. 하지만 태오가 끌어안은 순간 놀라기도 했지만 그 복잡했던 생각들이 한 번에 싹 날아가 버렸다. 순백의 도화지처럼 새하얘진 머릿속. 그 뒤로 빈 공간을 채워 넣은 건 이해되지 않는 현실도, 주환과 닮은 은겸도 아닌 눈앞에 살아 숨 쉬고 따뜻한 체온을 가진 인간 ‘윤태오’였다. 퀘스트 알림 창이 찬물을 끼얹기 전까지 솔의 모든 생각과 신경은 ‘윤태오’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고민과 의심, 생각에서 해방되며 심장과 머리가 오로지 태오에게로 집중되었다. 그의 숨소리, 스킨 향기, 붉어져 열이 오른 귀. 단단하다 못해 딱딱했던 어깨. 늘 고요한 표정인 그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너른 등. 솔의 양 뺨이 상기될 정도로, 그의 모든 것들이 태오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덕분에 잠시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나름 고르고 고른 말이었는데,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초등학생이 발표해도 이보단 나을 듯싶었다. 횡설수설하는 제 말이 부끄러워 솔은 어물쩍 웃음 지었다. 득용과 지호가 그랬다. 불리하거나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땐 일단 웃어 보라고. 그러면 다 해결될 거라고 말이다.
“태오, 너도 그랬으면 좋을 거 같아.”
“…….”
미숙하기 짝이 없는 말과 똑바로 보지 못할 정도로 눈부시게 어여쁜 웃음. 태오는 잠시 넋을 잃고 솔을 바라보았다. 단순히 그의 외모가 아름다워서가 아니었다. 두려워하고 미숙하고 불안해 조심스러워하면서도 성솔은 어떻게든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때로는 너무도 미숙해 아파하기도 하고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래도 잠시 뒤로 물러서 아파하다가도 결국엔 한 발짝 다가오는 게 지금의 솔이었다.
경계선에 슬쩍 발을 걸친다고? 어림없는 소리였다. 솔의 웃음에 태오는 그 선을 성큼 넘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웃으며 느리게 걸어오고 있는데, 좀 더 빨리 걸을 수 있는 자신이 성큼 가 줘야 그가 걷는 길이 조금 수월해질 것 아닌가. 너무 푹 익어 문드러질 토마토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솔이 손가락을 꿈질거렸다.
그런 솔을 보며 태오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얗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목울대를 울리고 시원하게 소리를 내어 웃으며 솔에게 경계선을 훌쩍 넘어 답을 보냈다.
“나도 위로가 됐어. 고마워, 성솔.”
다시 한번 솔을 품에 힘껏 끌어안아 보고 싶었다. 그러면 좀 더 멀리, 성큼 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에게로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장 솔직한 한 걸음. 태오는 솔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팔을 내밀면 그의 어깨를 휘감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지만, 태오의 웃음에 넋이 나간 솔은 가까워진 그와의 거리를 느끼지도 못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시원한 바람처럼 청량감이 돌게 하는 태오의 환한 웃음에 솔은 동그랗게 뜬 눈을 깜빡거렸다. 겨우 진정시켰던 심장이 다시금 달리는 말처럼 쿵쾅쿵쾅 요동치기 시작했다. 태오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순간. 연습실의 문이 다시금 벌컥,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태오와 솔은 움찔, 죄라도 지은 듯 동시에 놀라며 활짝 열린 연습실 문을 바라보았다. 노트북을 한 손에 들고 서 있는 가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 다 끝냈어? 숙소 돌아가려고?”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솔은 왠지 죄를 지은 기분이라 말까지 더듬었다. 솔의 물음에 가람은 짧게 대답하곤 시선을 태오에게로 옮겼다. 평소 가람이라면 적당히 나른한 기분 좋은 어조와 목소리로 ‘솔’ 하고 부르며 부드럽게 대답했을 터였다.
“응. 윤태오 언제 왔어?”
“얼마 안 됐어.”
“일찍 왔네. 오늘 안 들어올 줄 알았는데.”
“…좀 피곤해서.”
가람은 태오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 바로 거두곤 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제 가방에 노트북을 쑤셔 넣었다. 숙소로 돌아갈 준비를 하며 가람은 다소 딱딱한 어조로 태오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느새 태오도 조금 전 환하고 기분 좋아 보이던 미소를 지운 채 예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솔은 가람의 안색을 살피곤 조용히 그를 따라 짐을 싸기 시작했다. 연습실을 나설 때와 달리 가람은 무척 저기압이었다.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는 것이 혹 녹음실에 다녀온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건가 싶어 솔은 가람의 눈치를 살폈다.
차곡차곡 늘 옷가지와 수건, 노트북을 잘 정리해서 가방을 싸던 가람이 오늘따라 우격다짐으로 짐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이내 가방을 둘러멘 가람은 멀뚱히 서 있는 솔을 향해 손을 펼쳤다.
“가자, 솔.”
“어. 불 꺼야지. 태오야 가자.”
솔은 제 가방을 다급히 챙기며 가람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곤 솔은 홀로 연습실에 우뚝 서 있는 태오에게 가람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태오는 그 손을 잡지 않고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먼저 가. 정리하고 금방 따라갈게.”
“그럼 정리하고 같이 가자.”
먼저 가라며 손짓하는 태오를 보며 솔은 이마를 긁적였다. 무언가, 가람이 오기 전과 후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태오도, 가람도, 연습실의 공기 자체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태오가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오와 가람 사이에 끼인 꼴이 된 솔은 태오의 시선을 따라 가람을 돌아보았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가람이 신경 쓰였다. 태오도 마찬가지인지 솔보다는 가람을 쳐다보고 있었다. 솔이 태오와 가람을 번갈아 보며 서 있자 가람이 다시 한번 솔의 손목을 살짝 끌어당겼다.
“솔, 먼저 가자.”
“어? 어…. 어.”
늘 여유 넘치는 가람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목소리가 얕게 갈라져 퉁명스럽게 들렸다. 솔은 가람의 낯선 모습에 걱정이 앞서 연습실에 태오만 남겨 둔 채 가람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문득 가람과 나란히 조금 걷다 보니 이렇게 둘이 돌아가도 괜찮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둘 모두 스토킹의 피해자였다. 늦은 걱정에 솔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이내 뒤를 돌아본 시야에 익숙한 모습이 보이자 솔은 걱정을 내려놓았다.
조금 떨어진 거리, 하지만 언제든 한달음에 달려올 수 있는 지척에 태오가 조용히 두 사람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태오는 자신을 바라보는 솔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살짝 손을 펼쳐 보였다. 그제야 솔은 안심하고 제 옆의 가람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