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주환도 이렇게 뺨을 툭 건들고는 했었다. 그에겐 사소한 습관에 불과했던 그 행동에 혼자 가슴을 움켜쥐고 잠든 날도 있었다.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조금만 힘들어도 의찬과 주환을 떠올리며 집에 가고 싶단 생각만 되풀이하고 징징거리던 자신이 그 둘을 한동안 떠올리지 않았다니. 신기하면서도 찜찜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곳에 익숙해지면 질수록 본래의 삶이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처음엔 어색하게만 느껴졌던 스무 살이란 나이도 이제는 아무런 괴리감이 없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의찬과 주환을, 그리고 과거이자 미래인 자신을 잊어버리는 건 아닐까? 기분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다.
솔의 복잡한 심경을 알 리가 없는 은겸은 솔의 별거 아닌 그 말 한마디에 너무도 환히 웃었다. 정말로 기쁘고 신이 나 보였다. 알량한 죄책감을 덜어 보려 생각 없이 던진 말에 은겸이 너무도 좋아하자 솔은 그를 보기가 부끄럽고 불편해졌다.
“그…. 다음 촬영 준비해야 해서요. 멤버들도 기다리고 있고….”
“아, 바쁘지. 어서 가 봐. 나도 위에 올라가 봐야 해.”
가 보겠다고 말하는 솔에게 은겸은 아무렇지 않은 척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고작 이런 말이나 나누자고 온 건 아니었지만 별수가 없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정말 바쁠 시기기도 했다. 은겸은 있지도 않은 일정을 만들어 거짓말하며 솔의 어깨에 살포시 팔을 둘렀다. 마치 정중히 파트너를 에스코트하듯 문을 열어 주고 혹여나 길이라도 잃을세라 그가 매일같이 시간을 보내는 연습실까지 안내를 자청했다.
“연습 끝나고 꼭 연락해. 톡 보내 둘게.”
“알겠어요. 이거 잘 먹을게요. 형.”
“응. 도움 필요하거나 먹고 싶은 거 있을 때도 연락해.”
“네, 고마워요.”
인사를 주고받은 은겸은 솔에게 어서 연습실에 들어가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솔은 연습실에 들어가긴커녕 오히려 은겸을 먼저 보내려 그의 등을 떠밀었다. 솔에게 등을 떠밀린 은겸이 마지못해 먼저 발걸음을 뗐다. 은겸이 사라지고 나서도 솔은 한참 복도에 서 있었다.
복잡해진 머릿속에 솔은 제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솔에겐 이전의 삶도 분명 현실이었다. 그렇다고 지금의 삶이 가짜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멤버들의 얼굴이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떻게 그들을 가짜라고 할 수 있을까. 잠시 덮어 두었던 문제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솔은 냉기가 올라오는 벽에 등을 기대고 두 손으로 쇼핑백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어깨에 힘을 쭉 빼곤 한숨을 크게 푹 내쉬었다. 뱉어 내는 숨과 함께 이 머리를 무겁게 만드는 잡생각들이 같이 빠져나갔으면 싶었다. 연거푸 한숨을 푹푹 내뱉고 있는데, 복도 코너를 돌아 걸어 나오는 득용과 눈이 딱 마주쳤다.
“솔이 형, 여기서 뭐 해요.”
“어…. 들어가려고.”
은겸만 보기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한번 시작된 이상한 마음이 번지고 번져 득용을 보는 것도 어쩐지 영 껄끄러웠다. 본래 세상에서 득용은 존재하는 인물일까?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슬플 거 같았다. 솔의 맥이 빠진 모습을 훑어본 득용이 그의 손에 들린 쇼핑백에 대해 물었다.
“그건 뭐예요?”
“샌드위치. 나눠 먹으래.”
“그래요? 들어가요. 왜 여기서 혼자 불쌍하게 서 있고 그래요. 태오 형이 히터 틀어 놨어요.”
내심 득용이 반길 거로 생각했는데, ‘샌드위치’라는 솔의 대답에 득용은 시큰둥하게 대답하곤 턱짓했다. 늘 음식 이야기만 나오면 제 것이 있느냐, 먹어도 되느냐, 맛있겠다 등등 말이 많아지는 득용이 영 심드렁했다. 득용이 연습실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솔은 그 사이로 머리를 먼저 빼꼼 밀어 넣었다. 히터를 틀어 놨다더니 얼굴에 따뜻한 공기가 느껴졌다.
이미 몸풀기는 끝냈는지, 뺨이 발그레해진 가람이 솔을 반겼다. 어물쩍 연습실로 들어선 솔은 연습실 중앙에 서 있는 태오와 지호를 보는 둥 마는 둥 지나쳐 선반에 쇼핑백을 올려 두었다.
“어디까지 얘기했어?”
“별거 안 했어. 일단 발라드니까 편곡은 필수고….”
“아, 그렇지.”
솔은 슬쩍 시선을 피하며 가람의 옆에 가 웅크리고 앉았다. 불편한 마음 때문일까 따라붙는 태오와 지호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대면식 무대, 1라운드를 1순위로 끝마치고 7조가 얻은 혜택은 다음 경연 무대의 순서와 우선 선곡이었다. 우선 선곡이라고 해 봤자 그다지 커다란 이득은 아니었다.
사회자가 고르라고 띄워 준 화면과 카드엔 온통 느린 템포의 발라드곡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곡을 골라도 피차 마찬가지인 상황이었기에 멤버들은 짧은 회의 끝에 너무 깊은 감정을 가진 곡보단 상대적으로 가벼운 짝사랑 소재의 곡을 골랐었다.
발라드곡이라고 무조건 안 좋은 것은 아니지만 팀에 래퍼가 있었고 솔도 아직까지 노래를 중심으로 하는 것은 부담스럽기도 해서 다소 난감한 선곡이었다. 다인원이 하나의 곡을 소화해야 하니 가람의 말대로 두루두루 멤버들의 매력을 보여 주려면 편곡이 필수 불가결이었다. 그것도 전체적인 편곡이.
또다시 일주일이란 시간이 주어졌는데, 첫 무대보다 더한 대공사를 해야 했다. 본래 발라드곡이라 안무도 아예 새로 짜내야 했다. 더불어 보컬 미션이랬으니 멤버들 모두 노래 실력을 끌어올리기도 해야 했다.
방향성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지만, 솔은 오랜만에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그저 웅크리고 앉아 바닥만 내려다보며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는 게 고작이었다. 연습실 바닥의 나뭇결무늬 따위나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이따금 지호가 솔의 어깨를 조물조물 주무르며 ‘피곤해?’, ‘무슨 일 있었어?’라고 물어 왔지만, 솔은 그저 고개만 가로저었다.
점심을 은겸이 사 준 샌드위치로 대충 때우고 개별 레슨 시간까지 회의가 계속되었지만 이렇다 할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득용이 내일 오전에 학교에 다녀와야 한다며 지호와 10시쯤 숙소로 가 버리고 태오도 병원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연습실을 떠났다.
어깨가 무거워진 가람이 나머지 수업을 자청했다. 솔 또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연습실에 남기로 했다.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노트북 화면에 집중하던 가람이 녹음실에 올라가겠다며 숙소로 돌아갈 때 불러 달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연습실에 혼자가 된 솔은 그저 덩그러니 앉아 거울만 쳐다보았다.
원하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는데 어째 더 심란하기만 했다. 차라리 득용이나 지호와 부대끼며 웃고 떠드는 편이 머리를 비우기에 더 나을 것 같단 늦은 후회를 했다. 이도 저도 못 하고 시간만 버리는 중에 누군가 연습실 문을 열었다. 가람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의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태오였다.
“…일찍 왔네?”
그간 빽빽했던 일정 탓에 그의 가족을 챙기지 못했으니 내일 아침에야 얼굴을 다시 볼 거로 생각했던 태오였다. 몇 시간 만에 돌아온 태오는 떠날 때와 다르게 색이 바랜 편지지처럼 여러 가지 묵은 감정과 내용을 담은 듯해 보였다. 솔의 물음에 태오는 대답 대신 가방을 던져 놓고 그의 옆에 와 나란히 앉았다.
“강가람은?”
“녹음실 올라갔어.”
“왜 혼자 있어?”
“그냥.”
잠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앉아 거울에 비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참 이어진 침묵을 먼저 깬 건 태오였다. 태오는 슬쩍 팔을 벌려 솔의 옆을 짚고는 솔의 표정을 살폈다.
“혹시, 은겸 선배가 안 좋은 소리라도 했어?”
“어? 아니?”
“은겸 선배 만나고 온 뒤부터 기분 안 좋아 보여서.”
“은겸 형 때문은 아니야. 샌드위치 사 주시고 1위 한 거 축하한다고…. 좋은 말만 해 줬어.”
태오의 물음에 눈을 동그랗게 뜬 솔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은겸 탓이라기보단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전히 솔 자신의 탓이었다. 은겸은 아무 잘못도 없지. 그저 주환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뿐. 어느 쪽이 진짜고 가짜고, 그런 것은 사실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데 괜한 고민을 하는 자신이 문제였다. 솔은 다리를 모아 세우고 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한숨을 푹 내쉬니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태오가 조심스레 물어 왔다.
“그럼…. 도망치고 싶어졌어?”
“…….”
솔은 얼굴을 무릎에 댄 채로 고개를 돌려 태오를 바라보았다. 회피 병이 또 도진 거다. 한가하게 이렇게 시간을 버릴 때가 아닌데. 멤버들보다 배는 더 연습해야 하는 처지면서. 안정의 포션 없인 아무것도 못 하는 반쪽짜리면서.
말 그대로 어느 게 진짜고 가짜이고, 의찬과 주환을 잊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지금 살고 있는 세상에 집중하는 게 중요했다. 멤버들이 흘리는 땀은 진짜임엔 변함이 없었고 일주일 뒤에 또 새로운 무대로써 올라가야 했다. 심란한 마음을 핑계 삼아 또 도망치려고 꿈지럭대는 거다. 도망치고 싶냐고 묻는 태오의 말에 솔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조금 그런 거 같아.”
따끔하고 엄한 말이 돌아올까 싶었지만 정작 돌아온 건 의외의 말이었다. 태오는 솔을 보며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나도 그래.”
생각지 못한 태오의 말에 솔은 눈과 입을 동그랗게 떴다. 자조하듯 말을 내뱉는 태오가 무척 지쳐 보였다. 아마도 늦은 밤 외출이 그를 퍽 힘들게 하고 솔처럼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 듯했다.
“태오 너도 그럴 때가 있구나. 다행이다. 말하고 나서 혼나는 거 아닌가 싶었거든…. 동지네.”
태오를 따라 푸념하듯 말하며 솔이 살포시 웃었다. 솔은 순간적으로 태오가 가까워짐을 느끼며 이상함에 웅크리고 있던 등을 펼쳤다. 그의 키처럼 길쭉하고 커다란 손이 제 손목을 움켜잡고 끌어당겼다. 그리 강한 힘은 아니었지만 무방비했던 솔은 작은 힘에도 무너져 내렸다. 흐트러지는 솔을 태오는 제 품 안에 끌어안았다.
태오의 품에 무너지듯 안긴 솔은 복잡했던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깨끗하게 비워 버린 휴지통처럼. 가짜가 아닌, 온전한 온기를 가진 진짜 윤태오였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 조금 높은 체온. 제 머리 위로 부는 깊은 한숨. 너무도 생생했다. 쿵쿵, 귓가에 들리는 윤태오의 심장 소리와 맞물려 솔의 심장도 널을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