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오랜만에 보는 은겸의 모습에 반가워하는 솔의 뒤로 태오과 가람, 지호와 득용이 늘어섰다. 늘어선 네 사람을 은겸은 눈을 굴려 싹 훑어보았다. 일정도 없는데 일부러 솔을 보려 회사에 온 참이었다. 어제 첫 촬영에서 1위를 했다는 소식을 제일 먼저 듣고 축하해 주러 달려온 것인데 불필요한 꼬리들이 너무 많았다.
분명 온뮤직넷에서 진행하는 서바이벌에 참여한다는 소식까지는 들었는데, 그 뒤가 깜깜무소식이었다. 괜히 신인 개발팀을 기웃거리고 평소엔 연락 한번 안 하는 실장에게 안부 인사랍시고 톡까지 넣었다. 그렇게 해서 입수한 첫 촬영을 무사히 끝냈다는 소식. 축하도 하고 고생했다며 응원의 말이라도 건네주고 싶어 매니저에게 연락처를 알아봐 달라 부탁했다. 하지만 돌아온 매니저의 답변은 ‘걔 핸드폰 안 쓴대’였다. 번호를 전달받긴 했으나 무용지물이었다.
가택 침입하려던 사생에게 도둑맞았고 그 후로 비슷한 문제가 또 생길지 모른다며 연락이 올 곳도 없다고 핸드폰을 아예 꺼두고 생활한다는, 제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말이 돌아왔다. 은겸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다시 한번 반문해야 했다. 종종 다른 소속사에선 데뷔 전까지 연습생의 핸드폰을 금지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다. 다만 그건 불가항력이고 개인의 선택은 아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처음 솔을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여기엔 내 친구가 없어요.’
그 처연하기 짝이 없던 모습이 생각나니 그냥 넘길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걸어 봤지만,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 메시지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스스로 나서서 무언갈 하는 건 딱 질색이었다. 백기를 든 상대가 찾아와 부탁하는 게 아니라 제가 먼저 숙이고 들어가는 건 더더욱 싫었다. 그런 자신이 대체 무슨 바람인지 모처럼의 휴일에 애써 스케줄을 만들어 회사에 나왔다. 저 지나치게 이쁘게 생긴 얼굴 한번 보려고 말이었다.
조금쯤 피곤한 기색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로비에서 마주한 솔은 너무도 해맑게 웃고 있었고 피곤한 기색은커녕 반짝반짝 윤이 났다. 기대에서 벗어난 솔의 얼굴에 은겸은 아쉽기도 하고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갈팡질팡하는 제 마음을 은겸 스스로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날 연습실에서 홀로 울었던 때처럼 자신 외엔 의지할 구석이 없었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저렇게 멤버들과 어울려 웃고 있는 걸 보니 이것도 좋다 싶었다.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단지 화려한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낭만적인 성격은 되지 못하는데, 일종의 운명? 우습게도 이젠 꽤 그럴싸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연습실에서 서럽게 우는 모습을 지켜본 그 순간 ‘아, 얘다.’ 했던 거다. 성솔에게 유일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콕 박혀 버렸다.
심사가 뒤틀리는 건 돌아가는 꼴을 보아 하니 유일한 사람은커녕 제 팀 멤버들에게 밀려 뒷전이 되어 가고 있었다. 윤태오, 강가람, 도지호. 저 셋은 전부터 왜 자신과 같은 자리를 두고 부대껴야 하는지.
은겸은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 솔의 너머로 그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빛나는 갈색 눈동자엔 적대감이 가득했다. 은겸은 시선을 무표정한 태오에게서 자신을 보며 미소 짓는 솔에게로 옮겼다. 비릿한 냄새가 날 것처럼 속내가 뒤틀렸다. 강가람의 두 손이 솔의 어깨에 올라갔다.
친구가 없다더니 이젠 저렇게 티를 내는 친구도 생겼다. 아니, 친구라고 부르기엔 참 미묘한 감정을 품은 듯했다. 뒤에 늘어선 시커먼 놈들과 달리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하고 웃는 솔을 보니 괜스레 기분이 복잡해졌다.
“어제 촬영이었다며?”
“어, 네.”
은겸의 질문에 솔이 로비를 한 바퀴 쭉 둘러보고는 대답했다. 회사 로비다 보니 듣는 귀가 많아서일까, 표정은 좋아 보였지만 어쩐지 목소리가 흔들렸다.
“선배님. 저희 곧 연습 시작이라서요.”
솔에게 말을 붙이기 무섭게 지호가 모서리처럼 툭 튀어나와 톡 쏘는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은겸은 표정 관리도 잊고 인상을 찌푸릴 뻔했다. 도지호는 정말이지 저 셋 중에서도 유독 거슬리는 인물이었다.
“알아. 먼저들 가 있을래? 솔이랑 잠깐 이야기 좀 하게.”
은겸은 세 사람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오로지 솔만은 빤히 응시하며 말했다. 은겸이 눈웃음을 짓자 솔은 입가를 살짝 씰룩이더니 태오를 비롯한 멤버들에게 먼저 가라며 등을 살짝 떠밀었다.
“금방 갈게.”
솔이 등을 떠밀자 마지못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는 태오와 가람과는 다르게 지호는 삐딱하게 서서 은겸을 바라보았다. 솔이 다시 한번 ‘지호 형’ 하고 부르며 등을 떠밀자 그제야 도지호도 은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잠깐 이리 와 봐.”
방해꾼들이 사라지자 은겸은 슬쩍 솔의 손목을 붙잡고 걸음을 이끌었다. 1층에 있는 작은 미팅 룸으로 솔을 데리고 들어온 은겸은 테이블 위에 챙겨 온 쇼핑백을 올려 두었다. 얼굴은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처럼 파리하고 앙상한 게 신경이 쓰여 챙겨 온 것들이었다. 따뜻한 커피와 샌드위치. 별것 아니지만, 영양제도 챙겨 왔다.
“아침 먹었어? 커피랑 샌드위치야. 이 앞에 유명한 집 있거든.”
“아침 먹고 왔는데…. 지호 형이 아침마다 차려 줘서요.”
“도지호가?”
“네.”
은겸의 말에 솔은 머쓱하게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웃었다. 은겸은 속으로 혀를 찼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그러잖아도 인원수에 맞춰 샌드위치를 사기는 했다. 괜한 놈들까지 챙겨 주는 모양새가 되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지, 얼굴 앞에서 아쉬운 티를 내거나 나중에 먹으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래? 그럼 놔뒀다가 멤버들이랑 나누어 먹어. 요즘 방송 준비하느라 밥 먹을 시간도 없다며.”
은겸이 건네는 쇼핑백을 받은 솔은 안에 든 내용물의 개수를 얼핏 보곤 은겸에게 인사를 했다. 첫 만남부터 늘 은겸에겐 도움만 받는 듯했다.
“첫 촬영에서 1위 했다며.”
“점수 반영되는 무대도 아니고 별거 아니었어요.”
“데뷔한 건 아니지만 엄연히 네 첫 무대였잖아. 소식 듣고 축하해 주고 싶었는데 핸드폰 꺼 둔다며? 그래서 이렇게 직접 찾아왔지. 힘들었지?”
은겸의 말에 솔은 그제야 그간 잊고 있던 핸드폰이 떠올랐다. 멤버들과는 24시간 함께하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그 외엔 연락이 올 곳이 없으니 아무 문제를 느끼지 못했는데 은겸이 연락하려 했을 거란 생각은 못 했었다.
“고마워요. 형.”
그의 따뜻한 축하 말에 고맙다는 말을 건네며 솔은 고개를 들어 은겸을 바라보았다. 로비에서 그를 마주친 순간 분명 은겸이라고 그를 인지했는데, 이렇게 둘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자니 주환이 생각났다.
제가 오래 짝사랑으로 가슴앓이했던 ‘서주환.’ 갑자기 그 이름이 입가에 맴돌자 솔은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주환과 의찬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게 된 게. 이곳엔 없는 그 둘의 그림자를 애써 찾으려 애쓰지 않았던 게.
“우리 곡 했다며? 기대된다. 방송되면 내가 꼭 챙겨 보고 홍보도 할게.”
은겸이 다정하게 웃으며 솔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로비에서 가람이 붙잡았던 그 위치였다. 꼭 마치 어깨에 붙은 먼지를 털어 내는 듯한 손길이었지만 은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솔은 정작 그가 자기 어깨를 건드리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간 주환과 의찬을 잊고 있었다는 생각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했다.
은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솔은 미간을 찌푸리고 눈썹 끝을 축 늘어뜨렸다. 비를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이었다. 그렇게 주환이나 의찬이 없으면 세상 못살 것처럼 굴어 놓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람이란 참 간사하지. 주환을 향한 감정이 그렇게 알량했나 싶기도 했다.
그런 솔의 눈앞에 주환과 닮은 은겸이 자리하자 솔은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솔은 손에 쥔 쇼핑백과 은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주환에게도 그랬지만, 은겸에게도 일방적으로 뭐든 받기만 한 듯했다. 제멋대로 기대고 의지해 놓고 다른 비빌 구석이 생기니 잊고 있었다.
은겸은 절대 주환의 대신이 될 수 없지만,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죄책감 때문일까? 솔은 오늘따라 은겸의 얼굴에서 주환이 보이는 듯했다. 결국 솔은 은겸을 향해 쇼핑백을 살짝 들어 보이곤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기로 했다.
“이거 잘 먹을게요. 맨날 도움만 받는 거 같아서…. 다음엔 제가 뭐라도 살게요.”
예전의 솔이라면 따로 시간을 가지자는 말 따윈 전혀 하지 않았을 테지만 오늘은 조금 특수 케이스였다. 자신을 보며 웃는 은겸이 오늘따라 주환을 떠올리게 해서. 때마침 자신이 두 사람을 까맣게 잊고 있어서. 그가 선물한 쇼핑백이 생각보다 무거워서.
솔의 속내를 알 리가 없는 은겸은 그의 말에 아주 활짝 웃었다. 제일 좋아하는 장난감을 찾은 강아지처럼 아주 기분 좋은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정말? 거절 안 한다. 꼭 둘이서 밥 먹자. 아무 때나 시간 될 때 연락해. 내가 맞출게.”
은겸이란 커다란 강아지가 덥석 물은 장난감은 솔이었다. 솔의 제안을 덥석 물은 은겸이 ‘오늘도 괜찮은데.’ 하고 슬쩍 말을 던지기도 했다. 은겸의 뒤로 붕붕 돌아가는 꼬리가 보이는 듯했다.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나 보이기도 했다. 그저 불편한 감정을 조금 덜어 보려고 던졌던 말을 생각보다 은겸이 바로 받아들이자 조금 당황한 솔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당분간은 촬영 준비 때문에 좀 그렇지? 끝나면 둘이 꼭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아니면 난 커피 한잔도 좋아.”
“어어…. 연락할게요, 형.”
“핸드폰 켜 놔. 그래야 연락하지.”
“네? 네….”
솔은 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괜한 말을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늘 저녁에 확인차 연락할 거야. 꼭 켜 놔.”
은겸이 정말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로 시원스레 웃으며 솔의 뺨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솔은 그가 스치듯 톡 건드리고 간 제 뺨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분명 주환이 아닌데, 조금 전까지 주환을 까맣게 잊고 있었으면서. 방금 은겸의 그 행동에 자신이 짝사랑했던 주환이 떠올라 가슴이 울렁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