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 (98)화 (98/192)

#98

열혈 청춘 스포츠물의 주인공처럼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서서 야망이 가득한 말을 내뱉는 태오를 보며 지호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야, 우리 리더 쫀심 있다.”

지호도 솔과 같은 감정을 느낀 듯, 쉬이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태오의 어깨를 팡팡 두들겼다. 태오의 그 이글거림은 지호와 솔을 웃게 하는 데 멈추지 않고 득용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어느새 전염되었는지, 득용은 당장 변신이라도 할 것 같은 비장한 포즈로 우렁차게 소리쳤다.

“데이블락 형들 누르고 <핫 트릭> 우리가 뺏어 와요!”

“파이팅!”

늠름하게 주먹을 움켜쥔 득용의 모습에 솔도 주먹을 불끈 쥐고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순간, 등 뒤에서 무언가 바닥에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제법 묵직하지만 얇은 비닐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솔은 뒤를 돌아보았다. 옹기종기 모여 불타오르는 멤버들의 뒤로 입을 쩍 벌린 영호가 서 있었다. 무언가사 들고 왔는지, 조금 전까지 영호의 손에 들려 있었을 봉투들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얘들아…. 이거 다 녹화되고 있는 거 알지? 그리고 데이블락 너희 선배야!”

“헉. 맞다. 카메라 돌아가고 있지!”

절규에 가까운 영호의 외침에 득용은 그제야 손바닥을 짝 소리 나게 맞추며 모서리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 앞으로 다가가 팔을 휘휘 휘둘렀다. 사방에 설치된 카메라 모두에 녹화 중이라는 의미의 빨간불이 들어와 있었다.

“편집…. 아니, 나중에라도 악편으로 써먹으면 어쩌지?”

영호가 터덜터덜 걸어오더니 멤버들의 앞에 비련의 주인공처럼 털썩, 쓰러졌다. 영호의 그 과장된 움직임에 득용이 쓰고 있던 모자를 반대로 돌려 썼다. 그러자 사나운 얼굴이 조금 누그러지고 짓궂어 보였다. 짓궂은 얼굴을 한 득용은 미끄러지듯 영호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득용이 요즘 연습하고 있는 ‘개구쟁이 막내의 애교’였다. 사죄하듯 무릎을 꿇은 건 득용이었지만, 정작 사과의 말을 내뱉은 건 태오였다.

“죄송해요. 의욕이 앞섰어요.”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득용과 언제 눈을 빛내며 들뜬 모습을 보여 줬냐는 듯이 차분해진 태오를 번갈아 본 영호는 한숨을 내뱉었다. 태오는 이제 막 스무 살, 득용은 아직도 고등학생이었다. 이럴 때는 영락없는 애들이었다. 영호는 태오와 득용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데이블락’ 관련한 언급을 한 녹화분은 절대로 사용하지 말아 달라고 제작진의 바짓단을 잡아야겠다 다짐했다. 하지만 멤버들에게 한번 경고하기는 해야 했다.

“너희가 무슨 의미로 말한 건지 이해하는데. 발언 조금씩만 더 조심하자. 선배 호칭 깍듯하게 붙여 줘.”

“네. 앞으로 더 신경 쓸게요.”

“부탁할게. 심장 떨린다. 사소한 말 때문에 버릇없다느니 인성이 어쩌니, 그런 괜한 욕 먹지 말자.”

영호는 엎어진 몸을 일으켜 세우며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생도 고생이지만 서러움도 많은 멤버들이니 마음이 쓰였다. 어쩔 수 없이 서바이벌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그간 온뮤직넷에서 진행했던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에서처럼 화면에 비치는 모습으로 괜한 욕을 먹지는 않았으면 했다.

“네! 조심하겠습니다!”

“네가 제일 걱정이다.”

득용이 씩씩하게 외쳤지만 그를 쳐다보는 영호는 오히려 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고개를 가로저은 영호는 이내 무릎을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호가 바닥에 내려 둔 봉투를 주워 들자 득용이 눈을 빛내며 그의 손에 들린 봉투를 쳐다보았다.

“저 진짜 조심할게요. 영호 형. 근데 뭐 사 온 거예요?”

득용의 물음에 영호는 봉투를 들어 올려 멤버들을 향해 내밀었다.

“뭐긴, 너희 점심도 걸렀다고 그래서 도시락 사 왔지.”

“영호 형, 사랑해요!”

“자, 다들 따뜻할 때 먹고 다시 해. 의욕 있는 거 좋은데 컨디션, 건강 잘 챙기자.”

득용이 펄쩍 뛰었다. 조금 전까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마치 용수철처럼 단번에 튀어 올랐다. 그를 보고 서 있던 솔은 갑작스레 튀어 오른 득용을 보고 놀라 혀를 내둘렀다. 영호가 봉투에서 도시락을 하나씩 꺼내 멤버들의 손에 쥐여 주었다. 솔의 손에도 들린 도시락의 밑판은 적당히 따뜻했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딱 먹기 적당한 온도.

도시락을 건네받자 그제야 시간을 확인한 멤버들이 저마다 영호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조금 전 곡의 방향과 컨셉에 대해 토의할 때만 해도 다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것 같았는데, 영호가 건네준 도시락 하나에 몽글몽글한 온도가 되었다. 처음의 걱정은 어디론가 멀리 사라지고 목표를 향한 열기만 남았다.

흔히들 불타오른다고 말하는 그 표정이 모두의 얼굴에 있었다. 그 모습이 딱 혈기 왕성한 그 나이대의 사내들 같기도 했고, 아직 데뷔는 요원하지만, 나름 프로페셔널해 보이기도 했다. 그런 모습과 열기에 취해 시간이 이토록 흐른지 모두들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영호는 ‘오늘만 특별히야.’라는 말을 덧붙이며 득용에게도 도시락을 내밀었다. 득용의 입이 귀에 걸린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간 멤버들과 함께했던 사내 식당이 맛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오늘은 그 맛이 더 특별했다. 튀김 몇 조각과 계란말이, 멸치볶음과 김치. 평범한 도시락 메뉴였지만 연습실에 둘러앉아 먹으니 거창한 무언가를 함께하는 기분이라 밥이 더욱 달았다. 늘 음식을 깨작거린다는 평을 듣는 솔도 오늘은 도시락을 싹싹 비웠다.

그날을 기점으로 영호는 매일 다른 메뉴로 점심과 저녁을 연습실로 사다 날라야 했다.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하다 보면 중식, 석식 시간을 놓치기 마련이었고 다들 식당에 올라가는 시간마저 아까워했다. 주어진 시간은 촉박한데 보여 주고, 하고 싶은 것은 너무도 많았다.

아예 식당에 갈 시간은 물론, 시계를 볼 시간조차 사라진 멤버들을 보곤 영호도 덩달아 바빠졌다. 연습실에 놓인 미니 냉장고에 얼음, 물, 이온 음료를 수시로 채워 넣었고 식사는 물론 혹여 당이라도 떨어질까 간식을 사다 주었다. 물론 ‘평생 다이어터’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득용에겐 야박했다.

방향이 정해지자 가람은 그날로 밤을 꼴딱 새워 결과물을 들고 왔다. 자잘한 요소들이 추가되고 좀 더 매끄럽게 다듬기는 할 거지만 큰 변화는 없을 거란 그의 말에 태오와 솔은 멤버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안무를 짜기 시작했다.

“1절에선 최대한 기존 선배님들의 안무를 살려 두는 게 좋을 거 같아. 이 부분도 대표적인 안무니까 살리는 게 좋을 것 같고.”

태오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진짜 우리만의 <핫 트릭>이 되는 순간은 두 번째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부터였다. 꼭 오래된 레코드판이 돌아가는 것처럼 간주가 툭툭 튀다가 일순 끊어지고 나면 그때부터 우리의 무대였다.

그렇게 TEAM ONE만의 핫 트릭 안무가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다. 득용이 가람과 나란히 앉아 랩 파트에 대해 대화를 하는 사이, 태오와 솔은 설렁설렁 몸을 풀듯 안무를 점검해 보았다. 살짝살짝 몸을 움직이며 전체적인 흐름을 점검하던 중, 태오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까닥거렸다.

사실 주말 평가 방식이 바뀌기 전까지 솔은 스스로 안무를 짜 본 적이 없었다. 과거, 대회에 나가거나 무대에 설 때면 원장 선생님이나 안무가 선생님이 한 안무를 그들의 요구에 맞춰 수행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솔은 태오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험이 적었고, 반면에 태오는 지나치게 능숙했다. 지나치게 능숙하다 보니 오히려 놓치는 부분이 생겼다.

“임팩트가 부족한 거 같아.”

동영상을 반복 재생 하는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안무를 반복하던 태오가 우뚝 멈춰 서더니 솔을 보며 말했다. 경험이 부족한 사람과 지나치게 능숙한 사람. 두 사람이 서로의 동작에서 놓친 부분이었다. 지나치게 매끄러웠다. 좋게 말하면 안정적이었지만 그 안정감은 반대로 지루함이 될 수도 있었다.

쉽게 말해 튀어야 사는 아이돌이었다. 지나치게 매끄럽고 능숙한 나머지 뇌리에 확 각인되는 임팩트가 부족하게 느껴졌다. 태오가 계속해서 솔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 말이라도 해 보라는 듯한 눈빛이었다. 솔은 쭈뼛거리며 태오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태오의 앞에서 어설픈 의견을 내려니 부끄러워서였다. 솔은 흘긋, 뒤를 돌아 제 할 일에 바쁜 멤버들을 확인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태오에게 말했다.

“그…. 종소리 나오고 간주 멈출 때 말이야. 이런 거 넣어 보는 건 어떨까?”

솔은 그의 작은 목소리만큼 작은 몸짓을 해 보였다. 몸을 살짝 틀어 어깨가 정면으로 오게끔 비스듬하게 선 솔은 마치 천주교 신자가 할 법한 손동작을 해 보였다.

“십자 성호?”

“응. 이렇게 하는 거 맞나?”

솔은 딱히 종교를 믿지는 않았지만, 그 작은 손동작은 경건하다고 느꼈었다. 태오의 말에 솔이 다시 한번 반복해서 보여 주었다. 태오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솔의 움직임을 진지한 얼굴로 관찰했다. 다시 한번 동작을 반복해 보인 솔은 슬쩍 고개를 숙이고 태오의 눈치를 살폈다.

“눈치 볼 거 없어. 좋은데?”

자신의 답을 기다리는 솔에게 태오는 무심하게 대답하며 그가 했던 손동작을 따라 해 보았다. 저렇게 소심하게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아주 좋은 아이디어였다. 진지한 얼굴의 태오가 십자 성호를 긋자 솔은 자신이 했을 때와 달리 정말 경건해 보인다고 느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솔은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태오에게 물었다.

“신성 모독이라고 혼나는 거 아닐까?”

솔의 엉뚱한 질문에 태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거짓말을 뜻하는 제스처 알아?”

태오는 솔에게 물으며 검지와 중지를 꼬아 보여 주었다. 종종 외국 영화에서 등 뒤에 숨겨 보여 주는 손 모양이었다.

“우리 컨셉은 타락이니까. 이 제스처를 이용해서….”

태오는 설명을 이어 가며 손가락에 힘을 느슨하게 풀고 검지 아래에 엄지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한결 느슨해진 손 모양을 솔에게 자세히 보여 준 태오는 몸을 비스듬히 돌리고 어깨를 살짝 올렸다. 그 모습이 움츠린 듯하면서도 묘하게 반항적이었다. 그러고는 그는 솔이 했던 것처럼, 경건하지만 아주 사악하게 십자 성호를 그었다.

“가짜 성호를 긋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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