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태오의 그 묵직한 한마디를 시작으로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막상 마음을 굳게 먹으니 다들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연습실에 있는 동안엔 <마이 아이돌 스타즈> 팀이 설치한 카메라가 실시간으로 돌아갔고, 숙소에선 채민주의 카메라가 돌아갔다. 화장실에 가 있을 때 빼곤 카메라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였으나 솔을 포함해 그 누구도 그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낯선 카메라가 연습실 곳곳에 설치되자 처음에만 다가가 손을 흔들고 얼굴을 내비쳤을 뿐, 촉박한 일정에 쫓기기 시작하자 카메라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물론 페널티 감소의 효과이기도 했다.
1ROUND 미션을 부여받고 첫날, 회의 끝에 태오는 선곡에 있어서 약간의 꼼수를 제안했다. 주말 평가를 치르느라 이미 숙지되어 있는 데이블락 <핫 트릭>을 첫 무대에 올리자고 말이었다. 데이블락과 똑같은 무대를 올리는 것이 아니었다. YC 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으로 참가하지만 데뷔조로서 매력과 실력도 보여 줘야 하는 무대였다.
안무를 바꾸고 나아가 가람이 편곡을 제안했다. 연습할 시간도 촉박한 상황에서 양껏 욕심을 부리려니 태오의 의견이 무척이나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 꼼수라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곡이 빠르게 끝나자 가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제 노트북을 펼쳤다. 그간 그렇게 혼자 끌어안고 들려주지 않던, 노트북 안에 잠든 작업물들이 마침내 멤버들에게 공개된 순간이었다.
솔은 폴더 안에 빼곡하게 이어지는 파일을 보며 헤 입을 벌렸다. 요즘 들어 부쩍 노트북을 끼고 앉아 있긴 했지만, 솔의 상상보다 더 많은 파일이 들어 있었다. 일전에 자신이 만든 노래를 솔이 불러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새삼 가람이 대단하게 보여 솔은 작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가람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멋쩍은지 웃음 지었다.
“과제로 작업한 것도 있고…. 그냥 개인적으로 해 보고 싶어서 한 것도 있고 그래.”
가람은 급히 스크롤을 내려 드문드문 보이는 파일명을 재빨리 감추었다. 그러고는 태오의 제안을 듣자마자 따로 빼 두었던 <데이블락 – 핫 트릭_ver.O> 라는 이름의 파일을 더블 클릭 했다. 이전에 해당 곡으로 주말 평가를 준비할 때 작업해 두었던 파일이었다.
“올해 들어와서 작업한 건데, 다들 들어 보고 괜찮으면 조금 다듬어 보려고.”
멤버 모두에게, 특히나 솔에겐 처음 들려주는 작업물이라 가람은 조금 긴장되었다. 심장이 쿵쾅거려 가람은 손바닥으로 제 왼쪽 가슴을 살살 문질렀다. 음악 재생 플레이어가 켜지며 성스럽기 그지없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데이블락의 핫 트릭은 강렬하고 열정적인 기타 리프와 빠른 템포의 곡이었다. 무대나 뮤직비디오도 반항아 컨셉으로 교복을 입기는 했으나 가죽이나 체인 같은 액세서리를 하고 다소 불량한 느낌으로 등장했었다.
하지만 가람이 재생한 음악 어디에서도 그런 강렬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햇살이 가득 내리쬐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운동장 같은 느낌이었다. 날카롭고 질주하는 듯한 간주와 그 빠른 박자는 유지했지만 마치 복도를 뛰며 장난치는 천진난만함 같은 느낌이 담겨 있었다.
스타일을 완전히 바꿔 버렸지만, 그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익숙한 멜로디를 지호가 허밍으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가람은 저마다 각자의 방법으로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멤버들을 보며 설명을 덧붙였다.
“멜로디 라인은 거의 그대로 유지했어. 작업할 때, 초반부는 원곡이랑 다르게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으로 진행했고….”
설명을 이어 가던 가람이 잠시 말을 멈췄다. 원곡인 핫 트릭의 멜로디를 떠올리며 노래를 흥얼거리던 지호도 동시에 소리를 멈췄다. 본래 랩 파트가 자리했던 부분이 확 달라져 더 이상 원곡의 멜로디를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강한 랩이 들어갔던 부분이 통째로 들어내어지고 간주가 시작될 때 들었던 종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다만 처음과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초반부의 종소리는 맑은 날의 시계탑의 종소리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종소리는 오컬트물에 어울릴 법한 음산하고 무거운 종소리였다. 종소리를 기점으로 음악이 확 달라졌다.
오히려 기존의 데이블락의 핫 트릭보다 더 강렬하면서도 불안감을 조성하는 마이너의 간주가 이어졌다. 뒷배경으로 찢어지는 듯한 바이올린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공포 영화나 핼러윈에 걸맞은 분위기였다. 음악이 끝나자 가람은 멤버들의 눈치를 살폈다.
“어때? 이게 최종은 아니고 너희들만 좋으면 의견 듣고 추가할 건 추가하고 다듬어 보고 싶어.”
“와….”
솔은 가람이 듣고 싶어 할 대답을 해 주지는 못했다. 편곡이나 작곡 같은 것에 솔은 문외한이었기에 전문적인 평가나 의견을 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저 신기한 것을 본 아이처럼 ‘와’ 하며 박수를 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다만 문외한인 솔도 확실하게 느낀 것은 있었다. 방금 들은 핫 트릭은 데이블락의 핫 트릭이 아니라 강가람의 핫 트릭이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건 곧 데이블락의 핫 트릭이 아니라 우리, TEAM ONE의 핫 트릭이 될 거라는 것. 늘 제 옆에서 느른하게 앉아 있는 그가 달리 보였다.
“올…. 강가람. 멋진데?”
지호가 가람의 머리를 벅벅 문지르듯 쓰다듬으며 계속해서 ‘오오오올’ 하는 소리를 냈다. 득용은 제가 한 것도 아닌데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칭찬만이 아니었다.
“완전 좋은데. 원래 있던 랩 파트 어디로 사라졌어요? 가람 형…? 날 제거하려는 속셈인가.”
“아. 그러니까 그런 부분을 다듬어야지…. 초반부를 좀 더 극적일 수 있게 더 밝은 느낌으로 하고….”
득용의 지적에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던 가람은 갑자기 말을 하다 말고 저를 바라보는 멤버들의 얼굴을 쭉 훑어보았다.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팀원들의 모습이 조금 부담스럽고 쑥스럽게 느껴지는 듯했다. 모두가 가람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가람은 그저 머쓱한 표정으로 턱을 매만졌다. 결국 팔짱을 끼고 상황을 지켜보던 태오가 중심에 끼어들었다.
“그게 좋을 것 같다. 반전을 넣고 싶었던 거잖아.”
며칠 전, 두 사람 사이에 흘렀던 미묘한 불편함은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다. 태오의 긍정이 떨어지자 가람이 곧바로 대답을 이었다.
“어. 맞아.”
제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했다는 듯, 가람이 대답하자 그것을 신호로 두 사람의 토론이 오갔다.
“그럼 차라리 초반부에 컨셉적으로 종소리나 이런 부분을 부각시켜서 아예 성스러운 느낌으로 가는 건 어때?”
“음…. 그것도 괜찮을 거 같아. 회사에서 준비해 주는 의상이 교복이잖아. 컨셉을 미션 스쿨, 천사 같은 이미지 이런 거로 가져갔다가 두 번째 종소리에서 타락, 변신하는 그런 느낌으로 가는 게 어떨까? 오컬트적으로 말이야.”
“애초에 그런 컨셉으로 건드린 거 아니었어?”
“맞아.”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솔도 대충 머릿속에 언뜻 이미지가 그려졌다. 자신이 뽑았던 SSR 카드의 교복이 심플하고 단정했던 점이 떠올라 순수하고 천사 같은 이미지에도 크게 문제가 없어 보였다. 다만 오컬트에선 아리송했다. 솔이 잠시 다른 고민을 하는 사이에도 태오와 지호의 의견이 계속해서 오갔다. 긴 대화 끝에 태오가 멤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어때요?”
“나는 다 좋아. 가람아, 진짜 멋지다.”
태오의 물음에 솔은 가람을 보고 대답했다. 분위기를 보아 하니 다들 두 사람의 의견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솔의 눈엔 그저 가람이 해낸 것들이 대단하게만 느껴져 거부하고 의견을 내고 할 것도 없었다.
“나도 찬성. 인트로 나한테 주라. 내가 완전 홀리하게 해 줄게.”
지호가 기도하는 성자처럼 가슴팍에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곱게 감고 말했다. 이미 지호는 이 컨셉에 빠진듯했다. 득용도 긍정을 표했다. 다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랩 파트에 대해 의견을 덧붙였다.
“저도 좋아요. 근데 형 두 번째 종소리 거기, 간주 홀드된 부분이요. 댄브인 거죠?”
“응.”
“거기에 멈블처럼…. 아니다. 위스퍼 랩으로 주문 외우는 거처럼 소리 쌓는 건 어때요?”
득용의 의견에 지호와 가람이 ‘오!’ 하는 탄성을 냈다. 태오도 좋은 의견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용어의 등장에 솔만 눈을 말똥하게 뜨고 끔뻑거릴 뿐이었다. 이전 같았다면 눈치만 살피고 대충 알아들은 척 고개를 끄덕였을 솔이었지만, 이젠 달랐다. 솔은 더 이상 제 궁금증을 해소하는 걸 꺼리지 않았다.
“멈블은 뭐고, 위스퍼 랩은 뭐야?”
“그러니까요. 위스퍼는 말 그대로 속삭이는 것처럼 하는 거고요. 멈블은 발음을 좀 뭉개는 건데… 웅얼거리는 듯이 하는 거예요.”
득용의 대답에 솔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들어 봐야 정확하게 이해하겠지만 대충 개념과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알 것 같았다.
“좋은 거 같아.”
득용은 제 설명을 듣고 솔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흡족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솔에게 귓속말로 ‘숙소에 돌아가서 대표적인 거 몇 개 들려줄게요.’라고 속삭였다.
“우리 컨셉 너무 마니악한 거 아닐까?”
조금 전부터 계속 가슴팍에 두 손을 모으고 선한 어린양 흉내를 내고 있던 지호가 뒤늦게 걱정이 되었는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하지만 돌아온 태오의 대답에 멤버들 더 이상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았다.
“…회사 요구대로 순한 이미지만 가져가면 자칫 밋밋해질 수도 있어요. 우리 경쟁하러 가는 거잖아요. 첫인상 확실히 각인시켜야죠. 그리고 무엇보다 제2의 데이블락으로 비쳐지는 건 싫어요.”
솔은 태오의 눈에서 번뜩이는 레이저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아 입을 가리고 웃음을 삼켰다. 표정은 영 무뚝뚝한데 이글거리는 눈빛에선 소년 같은 승부욕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