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성솔 단점은 몸 아낄 줄 모르는 거.”
“그거 은근히 칭찬하는 거잖아요.”
태오가 솔의 프로필을 제 앞으로 끌어오며 의견을 내자 득용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가람은 손가락 끝을 솔의 프로필 끄트머리에 걸치고 태오를 쳐다보았다.
“솔은 단점 같은 거 없어.”
가람의 말에 태오는 짙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솔이 두 사람을 돌아보지 않고, 제 앞에 바짝 끌어당겨진 프로필만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어 다행이었다. 태오가 다시 한번, 솔의 프로필을 끌어당기자 가람은 손끝에 힘을 주어 다시 제 앞으로 끌어갔다. 가람의 그 행동에 태오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가람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고저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평소처럼 대답했다.
“못 들었어? 득용이가 방금 은근히 칭찬하는 거라잖아.”
태오를 향하는 가람의 시선이 답지 않게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을 이젠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가람도, 태오도 서로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을 깨닫고 나니 제 친구를 마주 보는 것이 불편했다. 결국 이 미묘한 신경전이 불편해진 태오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지만, 그는 솔의 어깨에 올린 제 손을 거두지 않았다. 가람 또한 무언가 느낀 것이 있는지 별말 없이 다시금 솔의 프로필을 제 앞으로 끌어당겨 글씨를 써 나가는 데에 집중했다.
한참 웃고 떠들던 지호가 어느새 서로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두 사람을 보며 슬쩍 웃음을 지었다. 턱을 괴고 태오와 가람을 번갈아 빤히 쳐다본 지호는 눈썹을 살짝 들었다 내려놓고는 솔이 쪽으로 제 어깨를 바짝 밀어붙였다.
맏형의 눈엔 동생들의 변화가 훤히 보였다. 지호가 몸을 붙이며 치대자 아무것도 모르는 솔만 맹한 얼굴로 그를 보며 태평하게 웃을 뿐이었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완성된 솔의 프로필은 득용의 것 못지않게 너덜너덜해졌다. 작성이 어느 정도 끝나자 멤버들 몫의 음료를 들고 돌아온 팀장은 차례대로 한 명씩 개별 면담을 했다. 솔은 멤버들이 반쯤 채워 준 프로필을 손에 든 채 제 순서를 기다렸다.
솔의 순서는 맨 마지막이었다. 차가운 복도 벽에 등을 기대고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르길 기다리던 솔은 손에 들린 종이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특기 : 춤’
가람이 검은 볼펜으로 꽉꽉 눌러쓴 그 글자 위를 솔은 손끝으로 더듬어 보았다. 얼마나 눌러서 썼는지, 뒤에서 봐도 ‘춤’이라고 쓰인 글자가 큼직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 살짝 볼록하게 튀어나온 모양을 손끝으로 여러 번 매만진 솔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가슴 속에서부터 시작된 알 수 없는 것이 울컥, 목구멍을 넘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간 모두의 걱정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연습했지만, 한 번도 제 움직임에 만족한 적이 없었다. 물론 첫술에 배가 부를 수는 없었지만, 솔은 자신이 너무도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멤버들에게 제대로 된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제 손끝에 닿는 이 글자가 멤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특기(特技), 남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기술이나 기능. 쉽게 말하자면 잘한다는 뜻이었다. 재능이 있다. 사고 이전에는 늘 이런 ‘특기’를 쓰는 난에 솔은 춤, 무용을 썼었었다. 하지만 무용을 그만두면서 특기에 그 단어를 쓸 자격을 잃어버렸다고 느꼈다.
재능이 있어도 그 재능을 발휘하지 않는다면 그게 진짜 재능이 있는 걸까? 내가 춤을 추지 않는데, 그 누가 내가 춤에 재능이 있다고 말해 줄까. 저 혼자 잘한다고 떠든다면 그걸로 되는 것일까? 그렇게 제 빛나는 모습을 잃어버렸었다.
그런데 오늘 생각지도 않게 제 재능을 돌려받았다.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이건 일종의 인정이었다. 그간 자신이 멤버들에게 보여 준 모습이 썩 나쁘지 않았다는. 솔은 조용히 구깃구깃해진 종이를 가슴팍에 끌어안았다.
별것도 아닌 그 종이를 벅찬 마음으로 꽉 끌어안고 서 있던 솔은 자신을 부르는 걸걸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솔이 형.”
상담을 끝내고 나온 득용의 표정이 영 시무룩한 게 늘 그렇듯, 또 한 소리를 들은 듯싶었다.
“잘 하고 와요. 연습실에 내려가 있을게요.”
풀이 죽어 커다란 어깨를 축 늘어뜨린 득용은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솔을 보며 작게 손을 흔들고는 다른 멤버들처럼 복도를 걸어 멀어졌다. 채민주의 부름에 솔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로 들어갔다.
시험지를 채점 받는 분위기였다. 솔이 내민 프로필을 한참 들여다보던 팀장은 볼펜들 탁, 탁 소리가 나게 굴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뒷장은 다 백지네?”
팀장이 펄럭, 소리가 나도록 종이를 뒤집으며 숨을 내뱉듯 말했다. 그녀의 지적대로 솔은 뒤 페이지를 거의 채우지 못했다. 앞 페이지야 멤버들이 나서서 채워 주었지만, 뒷장은 그러기엔 무리가 있는 문항들이었다. 이를테면 ‘이 회사에 있는 이유’라거나 ‘좌우명’ 이런 추상적이고 개인적인 문제들이었다. 솔은 고개를 끄덕이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다른 친구들은 흔하게 ‘래퍼가 되고 싶어서’ 이런 거라도 적었는데…. 그런 거라도 적어야지, 솔아.”
저 답변은 분명 득용일 것이었다. 뭐라도 할 말을 찾으려 팀장이 괜히 종이를 요란하게 넘겼다. 앞장과 뒷장을 번갈아 가며 확인하던 팀장은 그래도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는지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활동 사항에 수상 내역이 있네? 솔이 무용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상도 탔었어?”
“…네. 조금요.”
“잘했었나 보네. 근데 왜 이제야 말하니? 이런 게 다 네 거름이 되는 건데….”
팀장은 반색을 표하다가도 의문스럽다는 듯, 솔을 쳐다보았다. 그간 왜 말하지 않았느냐 묻는 시선이 조금 따가웠다.
별로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기껏 해 봐야 초등부, 중등부다. 그 시절엔 발레든 현대 무용이든, 한국 무용이든 닥치는 대로 콩쿠르를 준비했고 나가다 보니 부문별로 상 이름 하나쯤은 쓸 수 있었다. 별로 거창한 수상 이력은 아니지만 그래도 당시 수상했던 안무들이 솔의 머릿속에 여전히 생생했다. 그날 무대의 조명, 바닥을 때리는 자신의 발꿈치 소리까지.
그 기록이 아이돌 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도 모르기도 했어 입을 다문 것도 있었지만, 무용에 대한 화제를 애초에 피하고 싶어서기도 했다. 말하는 순간 어차피 과거의 영광이 되어 버리는 것 아니었던가. 지금은 할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여태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이제 와 종이에 써 내려간 이유는 뭘까.
‘그냥….’
솔은 그렇게 속으로 대답했다. 멤버들에게 때늦은 생일 축하를 받고 나니 불현듯 이쯤 했으면 인정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계에서야 2년이지만, 솔의 정신은 스물다섯 살이었다. 7년을 죄책감에 시달리며, 인정하지 못하고 도피했으면 이제 그만해도 뻔뻔하다 삿대질 당하진 않겠지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이 춤을 사랑했고 그간 춤을 추고 싶어 했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춤을 출 때 행복했다. 그때엔 몰랐다. 본래 잃어 봐야 깨닫는 것도 있는 법이었다.
그래서 그냥 인정하기로 했다. 무용을 좋아하고 또 좋아했었지만, 어찌 되었든 그리 잘되진 않았다고. 그렇지만 이제는 과거가 되었다고.
“아이돌 준비하는 거랑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었어요.”
솔은 태오를 따라 하듯, 덤덤한 얼굴로 대답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옆자리 지호의 활동 사항을 보니, 방송 출연에 관련된 것들만 쓰여 있었다. 사실 적으면서도 솔은 수상 경력을 적어도 되나? 싶었었다.
“한국 무용 전공이라고 했었지?”
“네.”
“따로 들은 건 없는데, 왜 그만뒀다고 했지?”
“…부상 때문에요.”
처음이 어려운 것이라고 인정하기로 마음먹으니 별일도 아니었다. 부상 때문에 포기하는 무용수는 생각보다 많다. 본래가 수명이 짧은 직업이기도 했다.
“지금은 괜찮니?”
“네. 괜찮아요.”
팀장이 솔을 흘깃 보며 물었지만 예의상, 형식적으로 하는 물음이었다. 솔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신체적으론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단지 정신적인 문제가 남아 있을 뿐이지.
“좋아. 솔아, 이게 다 네 이미지 메이킹이야.”
솔이 몸을 앞쪽으로 숙이자 팀장은 그가 자기 말에 집중하고 있음을 느끼고 말을 이어 나갔다.
“부상 때문에 무용은 포기했지만, 계속해서 무대에 서고 춤이 추고 싶어서 아이돌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런 스토리로 가면 되겠다.”
팀장은 그렇게 말하며, 솔의 프로필 비어 있는 뒤 페이지에 체크 표시를 했다. 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솔은 조금 멍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 네.”
“그런 식으로 채워도 괜찮지?”
솔의 반응이 영 이상했는지, 그녀는 고개를 들어 솔을 바라보며 재차 확인했다. 솔은 고개를 끄덕이며 반복하여 대답을 했다.
“네…. 네. 좋아요. 감사합니다.”
팀장의 형식적인 프로필 첨삭이 순간 솔의 가슴에 훅 박혔다. 멤버들과 연습하면서 느꼈던 감정들, 퀘스트가 강요하지도 않는 연습을 멤버들이 걱정할 정도로 하는 자신.
갑자기 머릿속에 환한 전등이 하나 반짝 켜진 느낌이었다.
솔은 제 가슴 속에 글귀를 하나 남기듯, 되뇄다. ‘춤을 추고 싶다, 지금 멤버들, 이곳에서 만나게 된 친구들과 무대에 서고 싶다, 함께 데뷔하고 싶다.’
반짝, 반짝.
스스로를 고립시키려 안간힘을 썼는데 모순적이게도 사실 외로웠던 거다. 인정받고 싶고, 도와주고 관심을 주고 한결같이 믿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지금 제 가슴속을 채우는 말을 멤버들에게 직접 목소리를 빌어 들려주고 싶었다.
머릿속에 깜빡이던 백열등 전구의 불빛이 점점 강렬해져 어두웠던 가슴을 환히 밝혔다. 어느새 커진 전등불은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처럼, 크고 환하고 강렬해졌다. 순간 눈앞이 정말 반짝이며 민트색 알림 창이 떠올랐다.
[인물 ‘성 솔’에 대해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1단계 조건을 충족하였습니다. 특성과 관련된 페널티의 효과가 50% 감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