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 (91)화 (91/192)

#91

한참을 솔과 웃고 떠들던 멤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들 다시금 프로필 작성에 집중했다. 하나같이 빈칸을 빽빽하게 메우는 멤버들과 달리 솔은 더 이상 쓸 것이 없었다.

취미, 특기, 장점, 단점, 활동 사항. 다른 멤버들과 달리 여전히 빈칸인 종이를 뒤집어 보니 뒤 페이지에도 여러 가지 문항들이 있었다. 솔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 시험을 보는 기분이었다. 물론 진짜 시험이었다면 답안지를 채울 수 없어 성적은 처참할 것이었다.

솔은 고개를 휘저어 가람과 지호가 했던 것처럼 다른 멤버들이 적은 내용을 곁눈질했다. 그 두리번거림을 느낀 태오가 솔에게 물었다.

“왜 그래? 뭐 찾아?”

태오의 물음에 멤버들이 모두 솔을 바라보았다.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지호가 솔의 프로필을 슬쩍 끌어당겼다.

“다 썼어?”

“어어….”

지호의 물음에 당황한 솔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하지만 솔의 대답과 달리 그의 프로필은 생일에 대해 웃고 떠들 때와 크게 달라진 바가 없었다. 지호가 종이의 빈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솔을 쳐다보았다.

“별명도 비어 있고 특기, 취미 다 비어 있는데?”

“딱히 쓸 게 없어서.”

지호의 지적에 솔은 어설프게 웃으며 머쓱한 듯, 짧아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자 가람의 팔이 솔의 앞으로 불쑥 지나갔다. 까만 볼펜을 쥔 가람의 손이 솔의 프로필 위에서 몇 번 움직이더니 특기란에 글자가 써졌다.

‘특기 : 춤’

가람이 솔 대신 빈칸을 채워 넣자 지호가 소리를 내어서 한번 읽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인정. 그런데 솔이 얼굴도 특기지.”

“얼굴도 특기에 적어요.”

지호의 말에 득용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맨 끝자리에 앉아 있던 태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르륵 끌리는 의자 소리에 솔은 늘 엄격한 리더인 태오가 이 상황을 중재하려나 싶어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지호와 득용을 더 신나게 했다.

“얼굴을 특기에 쓰는 건 좀…. 얼굴은 장점에 적어요. 노래도 잘하는 편이에요.”

“노래는 나랑 겹치잖아. 그래도 적어.”

지호는 카랑카랑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토를 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도리어 춤이라고 적힌 옆자리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들기며 가람에게 적을 것을 종용했다. 지호의 행동에 가람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노래’를 적고 태오의 말대로 장점에 ‘얼굴이 예쁨’이라 적었다. 갑자기 자신의 프로필이 수정을 당하는 상황에 솔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두 손을 든 채 바라만 보았다.

“취미. 솔이 형 취미는 잠자기 아니에요?”

“취미 딱히 없는데….”

득용의 말에 솔은 고개를 적으며 말끝을 흐렸다.

“잠이 많은 편이긴 해.”

득용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시야를 가린 것이 불편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난 태오는 솔의 프로필을 보느라 모여 있는 멤버들에게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솔의 머리 위로 태오가 만들어 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평소에 득용과 지호가 이런 식으로 장난을 시작하면 늘 태오는 뒷짐을 지고 말리거나 중재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대체 무슨 일인지 오히려 적극적으로 끼어들고 있었다. 가람도 마찬가지였다. 얼떨떨해진 솔은 그저 눈만 깜빡거렸다.

모두의 의견을 반영하여 취미에 ‘잠자기’를 적으려는데 가람이 잠시 멈칫하더니 자신의 프로필과 솔의 프로필을 번갈아 확인했다.

“나도 잠자기 적었어.”

“가람 형 실화예요? 무슨 아이돌이 취미가 잠자기야.”

솔의 취미에 잠자기가 적히는 것에는 불만이 없었으면서 득용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가람에게 핀잔을 놓았다.

“다들 프로필 진짜 재미없게 적었네.”

다들 정직하게 빈칸을 채운 것에 비해 득용의 프로필은 어딘지 요란했다. 덧붙이는 말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특기란에 ‘랩’이라고 적어 둔 그 옆에 ‘정말 잘함.’과 같이 구구절절이도 말들을 덧붙여 놓아 빈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빼곡했다. 득용이 제 프로필을 자랑하듯 팔랑거리자 가람이 반격했다.

“너는 너무 많이 적었어.”

“글씨 쓴 거 봐. 오구오구. 우리 막내.”

득용이 입을 삐죽거리자 지호가 그의 등을 툭툭 치며 얼렀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지호의 행동에 입술이 더욱 튀어나왔다.

눈앞에서 팔랑거리는 득용의 프로필에서 무언가를 보았는지 지호가 미간을 구기며 흔들리는 종이를 지긋이 노려보았다.

“저기요. 디케이 씨. 지금 자기 장점에 착하고 멋있다고 쓰신 건가요?”

“문제 있어요? 저 착하고 멋있는데.”

지호의 물음에 득용이 아주 기고만장하게 턱을 치켜들고 으스댔다. 그 모습에 모두의 시선이 득용에게로 쏠렸다. 득용의 뻔뻔한 모습에 지호는 솔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능청을 떨었다.

“착한 사람 다 죽었나? 아닌데…. 이상하다. 여기 제일 착한 솔이가 있는데?”

지호가 뺀질뺀질하게 웃으며 솔의 얼굴 가까이에 제 얼굴을 붙였다. 뺨이 서로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맏형의 놀림에 득용이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가람이 솔의 프로필, ‘얼굴이 예쁨’ 옆에 ‘착하다.’까지 적었다.

하나씩 채워지는 제 프로필을 보며 솔은 이쯤 되니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스스로는 채우지 못할 문제들이었다. 솔이 말없이 그저 바라만 보자 그의 뒤에 와 서 있던 태오가 슬쩍 솔의 어깨에 제 손을 눌렀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 후로도 장점에 몇 개가 더 써졌다. 당연하게도 ‘뭐든지 열심히 한다.’와 같이 다 좋은 말뿐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말들이 빈자리를 채우자 솔은 고개를 기울였다. 멤버들이 서술하고 있는 사람과 자신이 동일 인물이 아닌 것만 같았다.

“단점은?”

“음….”

득용과 한참 장난을 치며 투덕거리던 지호가 마저 남은 빈칸을 가리며 물었다. 술술 나오던 다른 항목과 달리 멤버들 모두 침음을 흘리며 각자 생각에 잠겼다.

솔의 어깨에 손을 올린 태오는 제 앞에 가만히 자리한 머리통을 빤히 내려보았다. 반듯하게 가르마가 타진 머릿속이 사실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복잡할 것 같았다.

태오는 제 손에 잡히는, 생각보다 단단한 어깨의 감촉을 느끼며 솔에 대해 되짚어 보았다. 성솔의 단점.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 사실 첫인상만 생각해 보았다면 이렇게 지금처럼 지낼 수 있을 거라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날 자신이 유독 날을 세웠던 것처럼 그도 사정이 있지 않았나,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단점이 없지는 않았다. 도저히 고쳐지지 않는 아침잠이라거나 가끔 제 일이 아닌 것처럼, 저 자신의 문제가 타인의 문제인 것처럼 굴 때가 있었다. 그리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살아온 이야기나 사정 같은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힘들면 힘들다, 아프면 아프다 같은 단순한 표현을 말하는 것이었다.

배고프면 배고프다, 추우면 춥다. 솔은 먼저 나서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일이 없었다. 다른 멤버들이 먼저 이야기하고 나면 그제야 작게 ‘나도’ 하며 맞장구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다 보니 행동을 세세하게 관찰해야 했다.

처음에는 그저 늘 그래 왔듯이 제 식구 챙기기였다. 계획에 차질이 생기는 게 싫었고 강가람이나 다른 사람들의 상태를 체크하듯이 솔도 조금 챙긴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느새 하루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태오는 제일 먼저 솔부터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젠 그가 말하지 않아도 그 얼굴에 불편함, 어색함, 아픔 같은 것들을 알아챌 수 있게 되었다. 강한 부정도 긍정도 없다. 무언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어 느닷없는 연습생이 된 것은 확실했다. 다만 태오가 그를 신경 쓰게 된 데에는 분명 힘들고 고통스러우면서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연습에 임한다는 점이었다. 심지어는 쓰러질 정도로 말이었다.

위태위태했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에 항상 솔을 쳐다보게 되었다. 분명 그랬는데 어쩐지 요즘 들어 시도 때도 없이 솔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 지호가 솔을 끌어당기며 안을 때도 솔이 불편할 텐데 하는 생각과 동시에 그 모습을 보는 것이 불편한 자신을 막 깨달았다.

웃는 모습이 이뻤다. 미처 다 말하지 않은 그의 속사정을 가늠해 보다 보니 동질감도 생겼다. 한참 솔에 대해 생각하던 태오는 문득 스치는 생각에 그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손바닥에 그의 어깨뼈가 단단하게 느껴지자 태오는 이내 너무 세게 잡았나 싶어 조심스레 힘을 풀었다.

강가람이 느닷없이 성솔이 좋다고 했을 때 왜 그리 불편했는지, 태오는 이제야 깨달았다.

좀처럼 당황하는 내색을 하지 않는 태오의 시선이 일순 흔들렸다. 솔의 뒤에 서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귀를 새빨갛게 달구고 못난 표정을 지을 것 같았다. 괜히 메는 목에 태오는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놀리듯 장난치며 솔의 단점에 관해 이야기하던 지호가 웃음을 터뜨리며 솔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득용이 왜 자기만 나쁜 사람 만드냐며 다시금 입술을 삐죽였다. 이 상황이 솔도 나쁘진 않은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솔의 프로필을 대신 써 주고 있던 가람이 태오의 헛기침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태오와 가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오래 봐 온 친구 사이. 10대 시절 내내 사실상 동고동락했으니 가족보다도 더 자주 부대낀 사이였다.

태오는 마주한 가람의 얼굴에서 그날 그의 그 고백이 단순한 친구와 우정, 동료의 감정을 말한 것이 아님이 보였다.

태오는 솔의 어깨를 더욱 감아쥐며, 더욱 가까이 몸을 붙였다. 허리를 살짝 숙이며 가람의 팔 안에 있는 솔의 프로필을 가운데로 끌어왔다. 큰 키의 태오가 허리를 숙이자 솔이 그의 품에 안긴 것 같은 자세가 되었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커다란 그림자와 온기, 같은 방을 사용해 익숙한 스킨의 향기가 확 낯설게 느껴져 솔은 그림자의 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솔과 눈이 마주치자 태오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풀어졌다. 다른 사람은 느끼지 못할 작은 변화였지만 오랜 시간 함께해 온 가람의 눈엔 확연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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