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를 뽑고 싶어 (90)화 (90/192)

#90

***

솔은 멤버들과 함께 지하 연습실을 벗어나 엘리베이터를 탔다. 식당에 갈 때와 개별 레슨을 받으러 갈 때를 제외하곤 YC 엔터의 다른 공간엔 가 본 적 없는 솔은 멤버들 뒤를 따르며 두리번거렸다.

처음 오는 3층은 평범한 직장처럼 다소 엄숙한 분위기였다. 복도를 따라 걸으며 솔과 멤버들은 마주치는 사람마다 허리를 숙여 깍듯이 인사를 했다. 허리를 몇 번이나 굽혔을까, 리더인 태오를 선두로 ‘회의실’이라는 팻말이 걸린 문 안으로 차례로 들어갔다.

커다란 화이트보드와 빔 프로젝터 스크린이 설치된 방에는 채민주와 그 외 주말 평가 때 평가서를 작성하는 관계자 몇 명이 멤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렬로 책상이 쭉 나열되어 있고 채민주의 앞으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3층엔 처음 가 본다는 솔의 말에 득용은 별것 없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었다. 솔을 제외하고 다른 멤버들은 이 공간과 배치가 익숙한지 조용히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솔이 쭈뼛거리자 가람이 제 옆자리의 의자를 빼 주며 솔과 눈을 마주쳤다.

솔은 멤버들을 훑어보는 관계자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매주 마주하다 보니 익숙해진 얼굴이었지만 최근 평가에서 연달아 눈물이 찔끔 날 만한 악평을 들어 긴장되었다. 연습실이 아닌 이렇게 갖춰진 공간에서 마주하니 더더욱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혼나는 기분이라 위축되었다.

솔의 긴장이 티가 났는지, 팀장이라 불리는 여성이 웃으며 ‘얘들아, 안녕.’ 하며 인사를 건넸다. 멤버들과 함께 이제는 서로를 확인하지 않아도 철석같이 합이 맞는 인사를 한 솔은 카메라를 흘긋 곁눈질했다. 녹화 중을 표시하는 빨간불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삼각대에 떡하니 고정된 것이 아무래도 오늘은 대화를 많이 해야 하는 날인 듯했다.

“얘들아, 너튜브에 영상 올라간 거 봤어?”

“네.”

“응원해 주시는 분들 많더라. 앞으로가 기대돼.”

“감사합니다.”

팀장의 말에 유치원생처럼 다들 입을 모아 대답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팀장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거렸다. 인사치레가 끝나자 채민주가 일어나 멤버들에게 종이를 하나씩 내밀었다.

“오늘 촬영한 것도 다 중요하게 쓰일 거니까, 잘하자.”

대답과 동시에 다섯 남자는 일제히 채민주가 건넨 종이의 내용을 확인했다. 종이엔 회색의 표가 몇 개 그려져 있었고 상단에는 <프로필>이라 쓰여 있었다.

“예전에 이미 써 본 친구들도 있지? 업데이트하면서 하나씩 정리하자. 픽스되면 다시 한번 자필로 쓸 거야.”

이름, 나이, 몸무게, 키, 생일. 자신의 프로필을 작성하는데 어쩐지 분위기는 받아쓰기 시간이 떠올랐다. 다들 검은 펜을 손에 쥐었지만, 누구 하나 먼저 글을 써 내려가는 사람은 없었다.

“먼저, 이름부터. 성 빼고 이름만 사용할 거야. 그러니까 태오, 지호, 솔 이렇게. 가람이는 아직 논의 중이긴 한데 일단은 가람이라고 적어.”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볼펜 심이 종이 위를 사부작대는 소리가 이어졌다. 솔도 이름이라 쓰인 칸 옆의 빈자리에 제 이름 ‘솔’을 크게 써 넣었다. 모두가 자신의 이름을 써 내려가는 때에 득용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저는 디케이 말고 다른 거 하면 안 되나요.”

역시나 예명에 불만이 있는 득용이 기회다 싶었는지 우렁차게 말을 꺼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를 실망하게 만들었다.

“다른 거 뭐? 득용이라고 쓸래? 대표님이 픽스한 거잖아. 대표님한테 허락받고 와.”

“네에….”

제 이름에 콤플렉스가 있는 득용은 이전에도 몇 번 DK 외에 다른 예명 후보를 짜 갔지만 하나같이 거절당했다고 투덜거린 적이 있었다. 그래도 본명으로 불리는 편보다 낫긴 하니 임시 예명으로 디케이를 사용해 왔다. 솔이 대체 무슨 의미로 예명을 디케이라 지었냐 물으니 득용은 그저 입만 삐죽이고 옆에서 웃기만 하던 지호가 원래 이 바닥 아저씨들이 짓는 이름은 아무렇게나 막 지어 주는 거라 말했다.

덤으로 지호가 몇몇 그룹의 이름 탄생 비화도 알려 주었었다. 단골 바(BAR)의 이름을 붙이거나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알파벳을 나열하고 직원들에게 의미를 부여해 보라 해 쥐어짜 탄생한 그룹명도 있다고.

그때 그 말을 들으며 솔은 자신들의 팀명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다. 득용의 예명을 보자면 딱히 YC 엔터의 대표 백의찬이 그다지 작명 센스가 좋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힘들게 데뷔했는데 팀명이 ‘럭키보이즈’ 이런 거면 조금 슬플 것 같았다.

“참, 너희는 당분간 TEAM ONE이라고 부를 거야.”

때마침 솔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팀장이 ‘TEAM ONE’라는 이름을 꺼냈다. 추후 팀의 이름에 대해 솔은 조금 위기감을 느껴 슬쩍 태오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던 태오도 때마침 고개를 돌려 솔과 눈이 마주쳤다.

덤덤한 얼굴이었지만 왜인지 그의 눈동자도 솔과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비록 가칭이긴 하지만, 하나로 묶일 명칭이 생기니 정말 하나의 팀으로 데뷔할 수 있다는 형체가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득용이 다시금 손을 번쩍 들고 짓궂은 학생처럼 질문을 했다.

“TEAM TWO도 있나요?”

“아직은 없는데 곧 생길지도 모르지. 천천히 쭉 쓰고 다 쓰면 말해.”

팀장이 친절히 웃으며 말했지만, 어딘지 서늘하고 사람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더 이상 질문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는지, 득용이 책상에 코를 박을 듯 납작 엎드려 말없이 펜만 놀렸다. 멤버들 모두가 프로필 쓰기에 집중하자 팀장과 다른 직원들은 커피 한잔하고 오겠다며 회의실을 떠났다.

조용한 가운데에 묵묵히 제 프로필을 써 내려가던 솔은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어 좌우를 살폈다.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닌데, 양옆에 앉은 지호와 가람이 솔이 써 내려간 프로필을 커닝하듯 훔쳐보고 있었다.

“…왜?”

두 사람의 노골적인 시선에 솔은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했나 싶어 둘을 번갈아 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가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솔이 지호를 쳐다보자 지호는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생일, 저번 달이었네?”

“아…. 응.”

지호의 물음에 솔은 고개를 끄덕이며 까만 글씨로 또박또박 쓰인 제 생일을 바라보았다. 솔의 생일은 곧 부모님의 기일이었다. 그 사고 이후로 솔에게서 생일은 사라진 날이었다. 더불어 부모님의 기일도 마찬가지였다.

“진작 물어볼걸…. 생일 파티도 못 해 주고 놓쳐 버렸네.”

“난 생일 안 챙겨서. 괜찮아.”

기억에서 사라진 날이기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누군가는 부모님의 기일도 챙기지 않는다고 손가락질할지도 몰랐지만 솔에게는 그날 자체가 고통의 날이었다. 하필이면 제 생일에 그 여행을 가자 해서…. 애초에 기일을 챙기려 해도 어떻게 챙겨야 하는지 알려 주는 이가 없었다.

누군가 솔에게 생일이 언제냐 물으면 늘 어물쩍, 어색하게 웃으며 ‘지났어.’ 하고 말을 돌렸었다. 물론 그 정도로 친밀한 사람도 없었지만.

“다음 생일엔 형이 꼭 미역국 끓여 줄게.”

“괜찮아, 지호 형.”

솔이 한동안 꺼내지 않았던 특유의 어색한 웃음을 끄집어냈다. 무어라 더 할 말이 없었다. 여기서 뭘 더 말한단 말인가? ‘내 생일이 부모님 기일이야?’ 제 기분이 안 좋다고 다른 사람의 기분까지 늪으로 끌고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뭐가 괜찮아. 이날 우리 뭐 했지?”

“이날 평가하고 대차게 까임.”

“진짜 괜찮아. 나 원래 생일 같은 거 신경 안 써서….”

“아니다, 생일 지났으면 어때? 그냥 솔이가 태어난 걸 축하해 주면 되는 거잖아. 오늘 파티할까?”

손사래를 치는 솔을 지호가 어깨동무하며 끌어당겼다. 맥없이 지호의 손길에 끌려 그의 품에 푹 안긴 솔은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지호의 말처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생일이 아니어도 태어난 걸 축하해 주면 된다. 친구인 주환과 백의찬도, 애초에 그 무렵이 다가오면 솔이 연락을 끊고 잠수한 탓도 컸지만, 너무도 조심스러워 생일의 ‘생’ 자도 꺼내질 못했었다.

“좋아요.”

좋긴 뭐가 좋단 말인가. 솔은 대답이 날아온 방향을 쳐다보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었다. 맨 첫 자리에 앉은 태오의 대답이었다. 솔이 황당해하는 얼굴로 태오를 바라보자 여전히 365일 다이어트 중인 득용이 칭얼거렸다.

“아, 나는 못 먹는단 말이에요.”

“우리는 케이크 먹을게, 득용이 너는 닭 가슴살이나 뜯어.”

“맨날 나만 못 먹어.”

칭얼거리는 득용을 놀리며 지호가 더욱더 솔을 끌어안았다. 솔은 갑자기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눈만 동그랗게 뜨고 큰형의 품에 몸을 맡겼다. 지호의 품에 푹 안긴 솔에게 순간 예리한 두 쌍의 시선이 내리꽂혔다.

지호와 득용, 그리고 갑작스러운 자신의 생일 파티에 당황한 솔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솔의 어깨와 등에 둘러싸인 지호의 팔을 향해 태오와 가람의 눈길이 고정되었다. 솔이 미처 느끼지 못한 따가운 눈총을 지호는 느꼈을까. 이상한 웃음을 흘린 지호가 자연스럽게 솔을 끌어안은 팔을 풀었다. 그러자 태오가 허리를 숙여 솔과 눈을 맞춰 말했다.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태오의 축하를 시작으로 가람도 질세라 늦은 축하를 보냈다.

“맞아. 태어난 걸 축하해. 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가운데 끼인 지호가 아주 크게 방긋방긋 웃으며 손뼉까지 쳤다.

“태어나 줘서 고마워요. 솔이 씨. 참고로 내 생일은 3월 27일이야. 기대할게, 얘들아.”

“아아아아아. 아무것도 못 들었다. 안 들려요.”

손뼉을 치며 제 생일을 기대한다는 지호의 말에 득용이 양 귀를 틀어막으며 고개를 내젓고 ‘아아아’ 하는 소리를 내었다. 유치한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에 당황했던 솔도 현실로 돌아왔다.

“솔이 형,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요.”

사고 이후로 비록 제날짜는 아니었지만 처음 들어 보는 생일 축하 인사였다. 지호의 말대로 생일이 아닌들 어떠한가. 그의 말대로 생일엔 슬퍼하고 그저 아무 때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걸 축하받으면 되는 것 아닌가. 별일도 아니었다. 솔은 희미하게 웃음 지어 보였다. 부모님을 떠나보낸 생일에 축하받고 웃는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그것이 지금은 없었다.

솔은 입가를 매만졌다. 당혹감이 서렸던 얼굴 대신 웃는 얼굴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 순간 솔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현재 ‘아주 작은 행복’ 상태입니다. 피로도가 빠르게 감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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